2013년 1월호

가슴 떨리는 추억의 ‘은교’에게 띄웁니다

  • 조영남│가수

    입력2012-12-26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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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 떨리는 추억의 ‘은교’에게 띄웁니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편지의 시작이 인상적이었습니다.“조영남 선생께. 안녕하세요? 강은교입니다. 시를 끼적거리고 있죠.”

    그래서 나도 답장의 머리글을 이렇게 써봅니다.

    “시인 강은교 선생께. 안녕하세요? 조영남입니다. 노래를 흥얼대고 있죠.”

    강 선생의 편지를 받아 들고 얼마나 가슴 떨렸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이게 얼마만입니까. 우리의 첫 인연부터 따지면 굉장합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열여섯 살, 당신이 중학교 1학년 열네 살 무렵부터니까 무려 50년이 넘어가네요. 수치로 반세기 만에 받은 편지라서 크게 놀랐고 반가웠습니다.



    나는 늘 강 선생에 대해 듬성듬성 생각하면서 잘살고 있나 궁금했는데 편지봉투에 명함처럼 찍혀 있는 ‘동아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라는 직함을 보고 아! 먹고는 살았겠구나, 안심이 되었습니다.

    내가 강 선생의 뜬금없는 편지를 받고 가슴 설레는 걸 봐서 ‘사람은 몸이 늙지 마음은 늙지 않는구나’ 하는 과장 섞인 생각까지 하게 됐습니다. 진도가 더 나가기 전에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게 있는데 강 선생께서 편지 말미에 답장을 기다린다고 써놨기에 물론 답장을 쓰겠다고 맘먹고 있었는데, 무슨 조화인지 공교롭게도 월간지 ‘신동아’로부터 원고지 20장의 신년수필 원고청탁을 받아놓고 있던 터라 나는 불현듯 강 선생에게 보내는 답문의 전문을 ‘신동아’ 쪽으로도 띄우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한 통의 편지가 강 선생과 ‘신동아’ 쪽으로 동시에 배달되는 거죠. 요컨대 우리의 관계를 세상에 털어놓는 겁니다. 강 선생이나 나나 이제 살 만큼 다 살았고 또 어차피 강 선생의 시를 내가 노래로 만들어 부를 경우 세상에 알려지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얘기는 10대 때부터 시작됩니다.

    아! 우리에게도 10대 시절이 있었군요. 내가 충청도 시골에서 중학교를 막 졸업하고 서울로 밀려가야 했던 때가 있었죠. ‘밀려간다’는 뜻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아버지가 중풍으로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병석에 누워 계셨기 때문에 시골집에선 고등학교에 올라갈 엄두를 못 내고 서울에 먼저 가 있던 누나네 집으로 쫓겨가야 했다는 겁니다.

    그즈음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줬던 강연희라는 이름의 우리 중학교 예쁜 영어선생님이 나한테 쪽지 한 장을 내밀며 이런 식의 설명을 해줬죠.

    “영남아, 서울 올라가면 얘를 좀 만나보거라. 이름은 강은교, 내 사촌여동생이다. 이번에 경기여중을 수석으로 입학한 아이야. 은교가 나폴레옹을 몹시 좋아하니까 네가 나폴레옹 초상화를 멋지게 그려서 선물을 하렴.”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녀 영어선생님이 열댓 살 소년 제자한테 열서너 살 소녀를 중매해준 셈이죠. 이런 걸 보통 쿨-이라 하죠.

    나는 물론 장항선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누나가 취직해서 일하는 을지로 6가 수구문 근처 쪼그만 약방 구석방에 짐을 풀고, 전화 거는 방법과 서울 말씨를 습득해 난생처음 전화를 걸어본 것이 혜화동 강은교네였죠.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화번호를 돌렸고 저쪽에서 따르릉 소리가 들리며 신호가 갔고 “여보세요” 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얼른 연습해두었던 서울 말씨로 전화통화를 이어나갔죠.

    “여보세요. 저는 충청도 삽다리 중학교 강연희 선생님의 소개로 나폴레옹 초상화를 그려서 들고 온 조영남인데요” 하자 저쪽에서 “네에 제가 강은굔데요. 아! 이걸 어쩌나”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 입에선 다음 대사가 튀어나오질 않았습니다. 다음 대사를 연습해두지 않았던 거죠. 그것으로 전화통화는 끝이 났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달빛이 어쩌구 새벽별이 어쩌구 하는 멋진 대사 한 구절 없이 그날 우리의 첫 접선은 맥없이 끝났습니다. 다시 시도하는 뭐 그런 것도 없이 말입니다. 서울 소녀와 시골 소년이 가까운 거리에서 쌍방 전화통화를 실현한 것만도 굉장한 사건이었죠.

    그 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세월은 흘러갔고 내가 고3 때던가, 대학에 들어가서던가, 내가 다니던 동대문 근처 동신교회 학생 성가대원 중에 경기여고에 다니는 학생이 몇 명 있기에 문득 생각나서 이렇게 물었죠.

    “얘들아, 니네 학교에 강은교라는 학생 있니?”

    그런데 이름도 기억나는 도건옥이라는 애가 “영남 오빠! 걔 우리 반 반장이야” 하고 알려주더군요.

    “그럼 학교 가서 강은교한테 내 얘길 해보렴” 했더니 다음 주일 아침 바로 도건옥을 따라 여고생 강은교 당신이 나를 보러 동신교회엘 나온 겁니다. 아! 내 생애에 강은교를 최초로 보게 된 순간이었죠. 당시 내가 본 여고생 강은교의 인상은 유난히 눈이 큰 예쁜 얼굴에 부티가 주르르 흐르는 소녀였습니다. 그 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오빠 동생이 되어 매주 교회에서 만났고 예배가 끝나면 교회가 있던 동대문에서 혜화동 로터리, 어린 강 선생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곤 했던 주유소 뒤 골목 입구까지 바래다주곤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우리들 젊은 날의 데이트였던 것 같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입니다만 그때 우리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 못했던 건 너무 어렸던 탓도 있고, 어렸지만 너무도 우아해 보여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 당신의 자태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게다가 당신과 나의 정신세계가 영 딴판이었죠. 당신이 니체며 릴케며 범신론 등의 얘기를 꺼내면 나는 한마디도 못 알아먹고 그러다가 우물우물하면서 우리의 사이는 또 단절됐죠.

    그러나 우리 사이는 지루한 장편소설처럼 또 이어집니다. 나는 오페라와 성악을 공부하는 서울음대 학생 때부터 경음악 감상실 ‘쎄시봉’을 드나들게 되고 등록금을 번답시고 미8군 쇼단에도 취직하고 그러다가 쇼단에서 배운 ‘딜라일라’라는 노래를 TV에서 부르게 되어 단 하룻밤 사이에 팔자에도 없는 대중가요 가수로 소위 스타덤에 오릅니다. 유명가수가 된 직후쯤 나는 대학 연극반에서 연극쟁이 오태석과 정하연을 만납니다. 그들은 둘 다 강 선생과 똑같은 연세대 출신으로 공부보단 연극에 몰두하던 친구들인데 우리 서울음대 연극반에서 그들을 불러들여 연극 활동을 함께하며 친해졌죠.

    그러던 중 우연히 TV 드라마를 쓰던 정하연을 만났습니다. 그자가 가지고 있던 ‘연세춘추’인가 하는 두꺼운 책을 무심코 들춰보는데 첫 장에 권두시로 ‘순교자’인가 하는 제목의 시 한 편이 실려 있었고 시인의 이름이 놀랍게도 바로 강은교였습니다. 내가 가수 나부랭이가 되는 사이 당신은 여류시인이 되어 있었던 거죠. 나는 이런 식으로 물었죠.

    “야! 하연아, 너 강은교 아니?”

    “그럼, 연대문학부 동아리 직계 후배야. 굉장히 친해.”

    “강은교 지금 어딨냐?”

    그때 이미 모든 여성잡지에서는 강은교의 파란만장한 얘기가 넘쳐날 때였죠. 나의 질문에 이어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 같은 문과 계통의 남자와 결혼했다, 쌍둥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큰 수술을 해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 구슬픈 답변이 쭉 나오더군요. 나는 혼자 찾아가도 될 것을 치사하게 하연이를 앞세워 명동성모병원에 찾아가 당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도 보고 당신 남편 되는 사람과도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때 당신이 죽을 먹고 싶다고 해 하연이와 내가 명동 골목길로 내려가 쭈그러진 냄비에 죽 한 그릇을 담아 올려 보낸 기억도 비교적 선합니다.

    그 후 또 소식이 끊기고 당신이 잡지사 ‘샘터’에 근무하면서 원고 청탁을 나한테 하고 내가 원고를 보내고 했던 기억밖엔 없습니다. 20, 30년 가까이를 지금까지 잊고 산 것이죠. 그러다가 당신이 명예교수직에 오르고, 내가 은퇴 지경의 노가수에 이르러 또 한번 이런 편지 한 통을 교환하게 됩니다.

    강 선생도 나에게 편지를 보내는 게 좀 쑥스러웠는지 편지를 쓰게 된 두 가지 이유를 똑 부러지게 댔더군요. 첫째는 당신이 2002년에 쓰셨다는 ‘혜화동’이란 제목의 시를 나의 작곡 솜씨로 노래로 만들었으면 하는 것과, 둘째는 어느 문학지에서 조영남이 쓴 시인 이상의 시 해설서가 출간되어 반가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이유가 편지를 쓴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고 적었습니다. 돌이켜보니 내가 해놓고도 내 스스로가 화들짝 놀랄 만한 일이었습니다. 대중가요로 먹고사는 놈이 감히 우리 시대 최첨단 시인의 해설 불가능에 가까운 시를 해결한다고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라는 시건방진 제목으로 책을 펴내다니. 하여간 어쩌다 그런 책을 쓰게 됐고, 책을 낸 게 10년이 넘었는데 어느 구석으로부터라도 잘 썼다거나 못 썼다는 한마디 질문이나 코멘트를 못 들어오다가 오늘날 당신, 여류시인 강은교로부터 그런 책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는 소식을 받고나니 아! 그런 거라도 쓰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 책이 아니었으면 강 선생의 편지도 못 받았을 거 아닙니까. 하하하.

    편지에 강 교수께서 최근 TV를 보다가 내가 노래했던 ‘목련’인가 하는 노랠 듣게 됐다고 했는데 아마 TV 프로그램의 제목은 KBS의 ‘열린 음악회’였고 내가 부른 노래 제목은 ‘모란동백’으로 마산 출신의 시인 이제하 선생이 직접 자신의 시에다 곡을 붙인 노래였습니다.

    가슴 떨리는 추억의 ‘은교’에게 띄웁니다
    조영남

    1945년 황해 사리원 출생

    서울대 성악과, 미국 트리니티신학대 졸업

    1970년 노래 ‘딜라일라’로 데뷔

    한국방송대상 가수상, KBS 연예대상 공로상, MBC 연기대상 라디오 부문 최우수상 등 다수 수상

    저서 ‘삽다리를 아시나요’ ‘예수의 샅바를 잡다’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 ‘쎄시봉 시대’ 등 다수 출간


    그리고 강 교수께서 노래로 만들고 싶다는 의향과 함께 보내준 두 편의 시 ‘혜화동’과 ‘어느 황혼을 위하여’는 단연 썩 좋은 시였습니다. 어느 작곡자가 봐도 곡을 붙이고 싶게 하는 훌륭한 노랫말이란 얘기죠. 문제는 저의 음악 실력이겠죠. 확실히 나이를 먹으니 굼떠졌다는 얘깁니다. 노력은 해볼랍니다.

    참, 요 몇 달 전 ‘은교’라는 제목의 영화가 나왔을 때 정말 속으로 화들짝 놀랐어요. 한편으론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큰맘 먹고 가봤는데 너무 실망했습니다. 영화가 잘나가다가 신파 쪽으로 빠지더니 치정으로 끝을 맺더군요. 내가 아는(?) ‘은교’ 스토리와는 영 달랐습니다. 갑자기 경기여고 교복을 입고 혜화동 골목길로 손을 흔들며 사라지곤 했던 내 추억의 가상 영화 ‘은교’의 한 장면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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