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이어진 강연…무슨 종교집단이냐
신경영 선언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삼성은 전혀 준비가 안됐다
2013년 10월 28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 신경영 20주년 선포’ 기념 만찬에서 부인 홍라희 당시 리움미술관 관장과 함께 행사장을 나서는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당시 삼성물산 유럽본부장으로 회장을 수행했던 원대연 전 제일모직 사장의 회고다.
“본래 프랑크푸르트로의 임원들 소집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회장은 도착하자마자 유럽 주재원들과의 대화 때 당신의 주된 관심사였던 복합화와 국제화를 주제로 강연했다. 분위기는 그런대로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강연 주제가 갑자기 ‘질 경영’으로 바뀐 거다. 세탁기 뚜껑 조립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거였다. 회장은 영상을 본 다음날 바로 서울에 전화를 걸어 당장 임원들을 소집하라고 지시했고, 서울은 그때부터 북새통이 되어 대거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해외 임원 회의라는 전무후무했던 프랑크푸르트 선언 행사의 1인 기획자이자 연출자이며 배우였다. 자리를 비우면 큰일 나는 줄 알던 시절에 임원 수백여 명을 모두 비즈니스석에 태워 비행시간만 12시간이 넘는 프랑크푸르트로 부른 것이다. 장기간 고급 호텔에서 숙박시키는 것 자체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인데다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보니 삼성 내부에서도 ‘낭비’라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회장은 장거리 비행을 편안하게 이동하고 자신이 묵은 호텔과 똑같은 고급 호텔에서 묵으며 교육을 해야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며 “모든 것이 투자”라고 밀어붙였다고 한다.
무슨 종교집단이냐
1993년 신경영 선언 현장에 있었던 삼성맨들의 기억은 30여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김광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의 말이다.“당시에는 서울에서 제주 가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더구나 임원들이 평일에 자리를 뜨면 회사에 큰일 나는 줄 알던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많은 임원들에게 독일로 날아오라고 했으니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겠나. 호텔과 비행기표도 구하기 힘들었다. 3, 4일 예상하고 출장 준비를 해갔는데 1주일, 2주일이 지나가니 속옷을 빨아서 호텔 베란다에 널어놓곤 했다. 호텔 측에서도 난처해했다. 준비해간 달러도 떨어져 신용카드를 써야 했는데, 외환 자유화가 이뤄지지 않을 때라 삼성카드 본사에 전화해 한도를 늘리느라 아우성이었다.”
갑자기 동양에서 양복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사람의 강의를 부동자세로 앉아 듣는 모습은 외국인들 눈에 얼마나 기이하게 비쳤을까. 김 전 부회장은 “호텔 측에서 무슨 종교집단 아닌가하는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았다”고 전한다.
당시 역사적 현장에 참석했던 삼성맨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들은 우선 회장의 폭포수 같은 말과 방대한 지식, 미래를 보는 혜안에 놀랐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잠도 안 주무시고 계속 연설을 하시는데 갖고 있는 지혜와 지식이 총동원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저런 방대한 내용을 알고 계실까 놀라웠다. 게다가 처음 듣는 내용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 앞으로는 자동차가 단지 이동수단이 아니라 전자와 융합하는 전자제품이 될 거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신경영의 변화와 혁신을 보잉 747기에 비유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보잉 747기가 이륙할 때 일단 활주로를 달려 공중으로 뜨게 되면 불과 몇 분 안에 1만m까지 확 올라가야 하는데, 만약 이 시간에 올라가지 못하거나 중간에서 멈추게 되면 추락하거나 공중폭발 한다면서 삼성 신경영도 한번 시작한 이상 방향을 바꿀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다시 내려올 수도 없다고 하시면서 변화를 독려했다. 당시 말씀들을 지금 떠올리면 우리가 보는 시야라는 게 얼마나 좁았는지 절절하게 느껴진다. 회장은 20, 30년 후 일어날 일을 미리 당겨서 한 거였다.”(김인 전 SDS 사장)
“정말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줄 몰랐다. 그냥 생방송으로 원고도 일체 없었다. 다들 기절초풍했다. 무엇보다 놀란 게 풍부한 상식,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었다. 회장의 말은 논리적으로 기승전결에 맞춰 얘기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일본 얘기 나왔다가 다른 얘기 나왔다가 막 여기저기로 튀는데 맥을 연결해서 보면, 툭툭 던진 조각조각들 하나하나가 보석 같은 얘기들이었다.”(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은 지금이야 평범하게 들리지만, 당시 현장에선 엄청난 충격이었다. ‘저 어른이 얼마나 고심했으면 저렇게까지 임팩트 있는 말을 던질까’ ‘가슴 속에 얼마나 큰 응어리가 쌓이고 쌓였으면 저런 표현을 할까’ 생각하며 직원들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
“회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내에 출근도 안하시고 집에서 업무를 봤기 때문에 사내 직원들에게는 ‘인비저블 맨(invisible man)’으로 통했다. 더구나 말씀도 어눌했다. 내가 1985년도에 이사가 돼 용인연수원에서 신임 임원 교육을 받는데 부회장으로 강의를 하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강의 중간에 말이 막혀 5분 정도 침묵하다가 강의를 끝내버리는 것 아닌가. 성품이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서 말도 잘 하지 못했던 분이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마치 해탈이라도 한 듯 테이블에 주스 한잔 놓고 새벽 서너 시까지 강연을 이어갔다. 그렇게 3주가 지나고 공항까지 수행을 했는데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너무 무리하시면 건강을 해칩니다’라고 했더니 ‘가장 가까운 비서실 사람도 내가 하는 이야기 반의반도 못 알아듣는다. 전 직원들을 알아듣게 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잠을 자겠느냐’며 한숨을 쉬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원대연 전 제일모직 사장)
“회장은 원래 소수만 모아서 하는 회의를 선호했고 말하기보다는 듣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날은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 쉴 새 없이 새로운 얘기들을, 그것도 자료하나 보지 않고 하셨다. 다들 ‘어느 팀에서 저런 자료들을 만들어 보고한 거야’ 했는데 비서실 소속인 우리들도 처음 듣는 내용이라 받아 적기만 했다. 당시 회장 말씀은 선대회장 말씀들을 깔고, 그 위에 본인의 콘텐츠를 얹어 당신의 방식대로 요리를 다시 해서 나온 내용들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다 일본인 고문들과 대화를 하면서 얘기했던 것들까지 더해지니 엄청나게 힘이 있는 내용이 된 것 같았다. 결국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면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
김광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회장과 신경영 초기에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제일 많이 나눈 사람들 중 하나가 내가 아닐까 싶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게 오래 말씀하시는 데도 등을 의자에 기대는 법이 없었다. 어떤 날은 새벽 4~5시가 되어 창 밖에 동이 훤히 터서야 ‘자, 오늘은 그만’ 하며 일어나셨다. 우리들은 졸음을 참아가며 앉아서 적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회장은 원래 한번 말문이 터지면 끝이 없는 분이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싱가포르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7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정말 모르는 게 없다고 느낄 정도로 굉장히 박식했다.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까지 깊이 쑥 들어가 오래 고민하고 생각하고 말씀하시니 밑에 사람들은 당할 재간이 없었다.”
미국을 포함해 독일 영국 일본 신(新)경영 선언 일정에 모두 참여했던 박근희 전 삼성생명 사장(현 CJ 대한통운 회장) 말도 비슷하다.
“나는 당시 비서실 재무팀 부장 3년차여서 상세히는 아니더라도 각 계열사들이 어떤 문제를 갖고 있다는 걸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회장이 알고 있는 디테일한 내용들은 상상을 초월했다. 저 정도로 알고 계시면 어느 계열사 사장도 당해낼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종렬 전 제일기획 사장은 삼성그룹 비서실 홍보팀장 등을 지내며, 이건희 회장이 부회장으로 경영에 참가하던 시절부터 참모 역할을 했다. 회장의 의중을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인물로 꼽힌다. 그는 당시 이 회장의 의중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라며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이 조직을 끌고 가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변하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 변할까. 굉장히 입체적으로 느껴야 되는데, 이 사람들이 눈으로만 봐서도 안 되고 귀로만 들어서도 안 된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야 한다. 그래야 변한다’ 이렇게 생각하신 것 같다.
일본에 가셨을 때에도 낮에는 일본의 인프라를 둘러보라고 하고, 일류 회사들도 가보고, 동경 시티홀, 후지 TV도 가서 보라고 했다. 저녁에는 강연하고, 어떤 때는 토론도 시키고 굉장히 다양하게 했다. 사실 돈으로 계산하면 엄청난 거였다. 회장은 회사를 일류로 만들기 위해서 마치 큰 산을 넘어갈 때 막 드라이브를 거는 것처럼 계속 몰아갔다. 무슨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다. 등골에서 식은땀이 난다. 이래 가지고는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신경영 선언,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 당시의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박정옥 전 에스원 대표는 삼성전관(삼성SDI 전신)에서 종합연구소장, 삼성 비서실에서 기술팀장 등을 역임하면서 삼성의 기술 발전을 함께한 엔지니어다. 그의 말이다.
“1991년에 비서실 기술팀장으로 발령받고 얼마 안 있어 회장을 직접 대면한 적이 있다. 회장은 막 부회장이 돼 얼마 지나지 않은 1981년에 말씀하셨던 91개 아이템을 또 다시 말씀하셨다. 그 뒤로 매일 말씀을 듣고 정리하면서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들이 10년 전부터 똑같은 것이었구나’를 새삼 깨닫던 때가 많았다. 부회장 시절부터 그렇게 말했어도 현장에 전달되지 않았던 거다.”그는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은 평소 목 놓아 강조했던 것의 연장선상이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마이크론, 디지털, 소프트웨어, 연구소 기초기술, 자동화, 캐드(CAD), 캠(CAM), 품질 불량률이야기에서부터 일본, 일본인 고문(顧問) 이야기 등등을 듣다 보면 아주 일관되고 치밀했다. 이 회장이 삼성을 바꾸려고 했던 것이 1981년부터였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회장으로서는 무려 10년여를 기다려야 했던 거다.”
고정웅 하쿠호도제일 대표이사 사장은 이병철 회장에서 이건희 회장으로 승계가 이뤄지던 시기에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박 전 대표처럼 이 회장의 부회장 시절과 회장 취임 초기를 기억하고 있는 그는 “회장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않을 정도로 회사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공부했다”며 이렇게 전한다.
“어떨 땐 일주일씩 밤을 새운 뒤 쉴 새 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당신의 비전을 설명했다.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있는 나 같은 비서들에겐 고역이기도 했다.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다 바꿔보라’는 말도 신경영 선언 2년 전부터 본인의 철학과 관련한 이야기를 밤새워 할 때 말했던 것이었고, 특히 직전 1년에는 집중적으로 말했던 내용이었다. 사람 앞에 나서길 싫어하고 연설에 약하다던 분이 몇 개월 동안 단 한 번의 막힘도 없이 ‘비전’을 웅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그전부터 ‘수천 번’의 리허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유튜브도 없었고 온라인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여서 회장의 메시지를 국내로 전달하고 그룹 전체에 전파하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 어록들은 서울에 팩스로도 보내지고 테이프에도 모두 녹화됐다. 6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에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현지에 모인 사장단과의 마라톤 회의내용을 모든 임직원들이 시청하도록 하게 했다고 한다.
삼성은 전혀 준비가 안됐다
박근희 전 삼성생명 부회장(CJ대한통운 부회장)은 프랑크푸르트, 런던,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를 거치며 회장의 강연을 모두 들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이 처음 회장에 취임할 때처럼 ‘막 회장직에 오르셔서 현실성이 없는 말씀을 하신다’고 치부하거나 ‘저러시다가 마시겠지’라고 넘길 상황이 아니라는 걸 점차 깨닫게 됐다면서 이렇게 회고한다.“아, ‘이제 완벽하게 그룹을 바꾸려 하시는구나’, ‘이건 뭐 그냥 이렇게 하다 말 일이 아니겠구나’ 생각이 들면서 한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비서실뿐만 아니라 각 관계자들이 회장님 말씀하시는 걸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걸 누가 해야 하나? 어마어마한 개혁 드라이브를 거시는 건데, 우리 조직과 마음가짐이 과연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변화를 맞닥뜨려야 하는 두려움도 담겼다.
“솔직히 말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만약 회장님 말씀을 우리가 수용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또 한 켠으로는 말씀 내용이 워낙 새로운 것들이 많아 앞으로 그룹에 대혼란이 와서 망하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비서실 팀장이나 당시 사장들도 나처럼 똑같이 생각했을 꺼다. 한마디로 ‘큰일 났구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