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꿔야할 것은 삼성이 아니라 삼성인
같은 값이면 소니를 사지 삼성을 사겠나
회장 말 듣다가 회사 망할 수 있다
1993년 3월 22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 들어서는 이건희 회장. 이 회장은 3개월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동아DB]
“삼성전자가 얼마나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이었는지를 알면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초기 공장 건물을 보면 벽돌로 쌓은 본부 동(棟) 단층짜리 하나에 냉장고 공장이 있었고, 오디오나 전자제품 쪽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양철을 동그랗게 말은 퀀셋(Quonset)을 불하 받아 공장을 지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는 지금으로 따지면 ‘벤처기업’이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삼성보다 10년 앞서 창업한 경쟁사인 금성사는 이미 전국의 대리점 망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채용한 삼성전자 직원들은 ‘외인부대’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제품 만들기에만 급급했지 ‘품질’을 고민한다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었지요. 당시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자를 쳐다볼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빴기 때문에 주로 이건희 부회장이 챙겼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삼성전자가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무렵인 1979년 말 2차 오일쇼크가 한국을 강타했다. 적자의 늪에 빠진 삼성전자는 사람도 제때 뽑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불량제품이 양산되는 악순환의 덫에 걸려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로 기억합니다. 이건희 부회장이 남궁석 부장(훗날 정보통신부 장관)만 데리고 수원 칼라TV 공장을 갑자기 방문한 거예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수원역에서 직원들 통근버스를 타고 온 거지요.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서 선 채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끝에 도착한 이 부회장은 공장 내부는 물론 구내식당 화장실까지 샅샅이 둘러봤습니다. 곳곳마다 부품들과 박스들이 먼지와 뒤엉켜 말도 아니었습니다.
화장실 변기는 막혀있고 휴지조차 제대로 없었으니 엉망진창이었지요. 부회장은 직원들을 모아 놓고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질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있겠느냐’며 화를 많이 냈습니다. 그리고는 측근으로 알려졌던 한 임원을 전 직원들 앞에서 불러 일으켜 세우더니 ‘내가 이렇게 하라고 당신을 여기 보냈느냐, 당장 나가라’고 호되게 꾸짖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직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부회장의 호통이 단지 말에 그치는 게 아니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됐죠. 저는 그날 부회장을 처음 보았는데 정말 카리스마가 대단했습니다.”
이후 공장은 천지개벽이 무색할 정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화장실은 ‘신라호텔급’으로 변했고 공장 바닥에는 비닐장판이 깔렸다. 손 전 원장은 회장의 질(質) 중시 경영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이처럼 오랜 시간에 걸친 개혁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바꿔야할 것은 삼성이 아니라 삼성인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한마디로 ‘질(質) 경영 선언’이라고 할 때 주목해야할 대목은 앞서 에피소드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단지 품질개선에 대한 주문이 아니라 정신개조에 대한 주문이었다는 것이다.회장은 제품의 불량은 그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의식의 불량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가 시종일관 변화를 강조했던 것은 ‘삼성제품의 질’이 아니라 ‘삼성인의 질’이었다. 생전 고인의 말이다.
“버젓이 불량품을 내놓고도 미안한 마음이 없는 양심불량, 삼성 이름이 들어간 불량품을 보고도 분한 마음이 들지 않는 도덕적 불감증, 일하는 사람 뒷다리 잡는 풍토와 집단 이기주의 등 정신문화의 불량이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다. 질 좋은 물건을 만들려면 회사 조직도, 삼성조직 전체도 질로 가야하고, 여러분 개개인의 인생도 질을 추구해야 한다. 자녀 교육도 질로 가야 이 나라가 질적인 일류가 되며 질적인 삶의 개념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삶의 질이 바뀌어야 제품의 질이 바뀐다는 그의 말은 매우 본질적이다. 생전의 그가 기업의 목적을 단지 이윤추구에만 두지 않았다는 사상가적 측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건희 회장은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무려 세 챕터에 걸쳐 ‘질 경영’에 대한 철학을 설파한다. 우선 그가 왜 질 경영 선언을 하게 됐는지 밝힌 배경은 이렇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업들은 없어서 못 팔정도로 물건 만들기에 바빴다. 삼성 역시 무슨 물건이든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가 설탕이나 옷감 같은 품목은 선금을 받고 파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그때는 불량품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좀 하자가 있어도 소비자나 생산자 모두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고성장 시대가 저성장 시대로 바뀌고 시장개방으로 세계적인 무한경쟁 시대가 열리면서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생산자 위주 시장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고객의 요구가 아무리 까다롭더라도 생산자는 이를 수용해야 생존이 기능한 소비자 위주 시장이 된 것이다.
문제는,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불량 불감증을 파악하지 못하고, 양적 사고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내가 신경영 모토를 ‘질 경영’ 으로 정한 것은, 이처럼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여러 폐해를 일소하기 위해서다.’
같은 값이면 소니를 사지 삼성을 사겠나
2011년 삼성그룹 신년하례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하지만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아무리 리더가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도 수많은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는 결국 구성원들의 생각 바꾸기에 대한 실패 때문 아니던가. 이것은 기업이라고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삼성 역시 직원들이 처음부터 회장 말에 모두 수긍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대부분이 의구심을 가졌다는 것이 전직 삼성맨들의 일치된 증언들이다. 원대연 전 제일모직 사장 말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양(量) 경영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많이 만들어 수출하면 각종 혜택이 주어졌고 은행에서도 돈을 마음대로 빌려주었으니까요. 손해가 나서 적자가 나도 장부상으로 매출만 높으면 은행 차입이 얼마든지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하루아침에 다 버리고 질 경영으로 가라고 하니 다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현명관 전 비서실장 말은 더 구체적이다.
“서울로 귀국한 뒤 녹초가 된 임원들은 신경영 실천을 위한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다들 어떻게 하면 회장의 생각을 현장에서 잘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골몰했지만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는 섭섭함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매일 매일 전투를 치르듯 뼈 빠지게 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여태까지 했던 건 다 잘못됐으니 확 바꾸라는 말이 좋게 들릴 리가 없었지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감도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자칫 기존 고객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컸습니다. 아무리 품질을 높인다 해도 일본 제품보다 싼 게 삼성의 경쟁력이었는데 잘해봐야 일본산과 비슷해지는 것 아닌가, 설사 품질개선에 성공한다 해도 물건이 팔리는 것과는 또 다른 별개 문제 아닌가, 같은 질에 같은 가격이면 소니를 사지 왜 삼성 것을 사겠나, 이런 생각들이 많았지요.
잘못하다가는 개혁이고 뭐고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일인데 이 모든 것을 가장 잘 알 만한 회장이란 사람이 선봉에 서서 그렇게 하자고 하니 참 난감한 노릇이었습니다. 기업 운명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이상적 가치만 내세우는 장미빛 낙관이란 것이 잠꼬대와 다를 바 없는 거 아닙니까. 회장의 명령은 임원진들에게는 어쩌면 거의 도박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사장들은 고민이 많았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흔히 기업이란 것이 오너가 개혁을 주문하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유 중 하나가 오너와 월급쟁이들이 생각하는 ‘시간’의 차이가 크다고 본다. 최근에 국내 10대 재벌에 드는 한 임원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너는 10년 뒤, 20년 뒤를 내다보라고 하지만 임원들에게 남은 시간은 길어봐야 3, 4년이다. 당장 성과를 내는 게 급하지 내가 회사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10년 뒤 20년 뒤를 생각하며 거창한 계획을 세우라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1993년 신경영 선언과 맞닥뜨렸던 삼성의 계열사 사장들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모든 걸 바꾸자는 회장 말이 맞긴 맞지만 당장 그걸 따랐다가 실적이 떨어지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해줄 것인가 하는 걱정과 우려는 월급쟁이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급기야 사장단들은 이건희 회장에게 공개적인 ‘항명’을 하게 된다.
회장 말 듣다가 회사 망할 수 있다
삼성맨들 사이에서 신경영 선언과 관련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스푼 사건’이다. 이 에피소드에는 회장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당시 임원진들의 현실적인 고민과 남들이 뭐라고 하든 뚫고 나가겠다는 회장의 고독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 말을 들어보자.
“회장이 프랑크푸르트 첫날 특강을 마치고 새벽에 사장단 10여 명을 방으로 불렀어요. 사장단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면서 말이죠. 회장은 ‘내가 그렇게 질(質)로 가라고 해도 세탁기 같은 양(量)떼기 짓을 하고 있는가, 이래 갖고는 그룹 망한다’는 말을 재차 반복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이수빈 비서실장이 ‘죄송합니다’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뗀 뒤 ‘그런데 회장님, 양이 받쳐줘야 질이 올라가는 거 아닐까요. 아직은 양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말하는 거에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실장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쨍그렁’ 소리가 났습니다. 회장이 커피잔 받침대에 올려져있던 티스푼을 냅다 내려놓은 거였습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참아가며 뒤에서 꾸벅꾸벅 듣고 있던 사람들이 그 소리에 놀라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당시 회의는 그대로 녹음되고 있었는데 바로 이튿날 프랑크푸르트에 모인 임직원들에게도 그대로 공개된다. 녹음을 들었던 박근희 전 삼성생명 부회장도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이수빈 실장은 ‘우리 그룹은 거의 제조업인데 양이 전제되지 않는 질이란 게 무슨 이야기인가? 비서실장이 회장께 직접 말씀을 좀 드렸으면 좋겠다’는 사장단 의견을 대신 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티스푼 하나 내려놓은 것 갖고 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가 할 수도 있겠지만,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던 회장이었기에 그런 행동은 정말 드물게 과격한(?)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당신의 메시지를 단호하게 전달하겠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이참에 ‘사장단 군기’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으리라 보여 집니다. 당시는 회장으로 취임한 지 5년째였는데도 주변에 선대 회장과 같이 일했던 사장들이 훨씬 많았거든요.”
무엇보다 회장이 화를 낸 상대가 당시 삼성 내 2인자이자 회장의 최측근으로 통하던 이수빈 비서실장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고 한다. 다시 황영기의 말이다.
“이 실장은 서른여덟 살인가부터 제일모직 사장을 했고 인품이나 능력이 매우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회장이 졸업한 고등학교(서울사대부고) 4년 선배이기도 했으니 더욱 각별했지요. 선대 회장이 가장 총애했던 사람 중 하나였고 이건희 회장도 가장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회장 처지에서는 이 실장이야말로 삼성에서 제일 똑똑하고 경험이 많은 분이니까 당신 뜻을 제일 잘 알아듣고 ‘잘 알겠습니다. 제가 잘 추스려서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 말하리라 기대했는데 뜻밖에 반대 의견을 내니 ‘아니, 그렇게 똑똑한 이수빈이도 내 말뜻을 못 알아듣는구나’하는 생각에 실망이 컸으리라 짐작됩니다.”
이 ‘스푼 사건’이후 결국 이수빈 실장은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고 현명관 비서실장 체제로 바뀐다. 현재 삼성고문으로 있는 이 전 실장은 지난해 10월 2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건희 회장 추도사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사장단 회의를 하실 때 제가 사장단의 의중을 모아 ‘질도 중요하지만 양도 중요합니다’라고 했다가 혼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라고 적기도 했다. 이 전 실장이 추도사에서까지 당시 에피소드를 언급한 것은 그 일이 당사자에게나 삼성맨들 사이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를 새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