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호

“5000억 정도는 사장 맘대로 써라”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㉟]

아랫사람 믿고 맡긴 반도체 리더십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2-07-2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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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美 개발팀 사이 생존 싸움

    • 미국 간 李 회장 폭탄선언

    • 상식에 바탕 둔 직관과 통찰

    • 오너 경영으로 극일에 성공하다

    • 만기친람 대신 위임으로 경영하다



    4메가 개발 방식을 놓고 위로 쌓는 스택(stack)과 밑으로 파들어 가는 트렌치(trench)를 둘러싼 논쟁이 미국 개발팀과 국내 개발팀 사이에서 자존심을 넘어 생존 싸움으로 치달았다. 돌연 이건희 회장은 미국에 있는 삼성 연구소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4메가는 스택 방식으로 한다’고 폭탄 선언을 해버린다. 한미 기술진 간 갈등은 한순간에 정리됐다. 김광호 전 부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저도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아, 스택으로 가야겠구나’라고 판단했습니다만, 그럴 경우 미국 연구소를 어떻게 할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회장님이 미국 연구소로 날아가서 ‘스택으로 간다, 트렌치는 버려라’ 폭탄선언을 해버린 거죠. 한국과 미국 모두 난리가 났습니다. 저 나름대로 뜸을 들여 분위기를 좀 익혀서 하려 했는데 팍 터트린 거죠(웃음). 어떻든 회장님의 빠른 결단으로 내부 갈등과 논쟁을 최소화해 4메가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었습니다.”

    4메가 D램 개발 방식이 스택으로 결정되자, 트렌치 방식으로 개발하던 미국 연구소 팀은 훗날 마케팅, 영업, 정보수집 쪽 업무를 하는 것으로 정리가 된다. 모든 개발과 연구는 한국의 기흥 사업장에서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삼성 반도체 신화를 가능케 한 요소 중에는 앞선 연재에서 언급한 ‘마라톤식 개발방식’이 있다. 한꺼번에 주자를 모두 뛰게 하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짧은 시간에 선진국 기술을 따라잡아 기술 개발과 양산 체제를 동시에 갖추려 한 최고경영자의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1메가, 4메가, 16메가 개발팀을 동시에 운영해 한 팀은 대량 생산 노하우를 개발하고 다른 한 팀은 기본적인 공정 기술을 개발한다. 또 다른 한 팀은 신제품 기본 개념을 세우는 식이다.

    삼성이 실리콘밸리 현지법인과 국내 연구팀을 상대로 동시에 제품개발 경쟁을 시킨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256K램에서 4메가 D램까지 모두 이 방식으로 개발됐다. 두 연구팀은 서로 돕고 정보를 나누기도 했지만 경쟁적으로 신제품을 개발했다.

    이 방식은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개발 초기 단계에서 불확실성을 줄이고 국내 기술진이 효과적으로 미국의 선진기술을 배우는 기회가 됐다. 초기에 연구 및 기술 개발은 미국팀이, 생산은 국내팀이 한다는 전략 아래 움직여 효과를 극대화했다. 그런데 스택과 트렌치 사건 이후 미국팀이 정리되고 국내팀으로 연구개발 및 생산이 일원화된 것이다.

    2011년 7월 29일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서 권오현 당시 디바이스솔루션(DS) 사업총괄 사장(오른쪽)에게서 반도체 사업 현황 및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재용 당시 사장(왼쪽 뒤)도 함께 참관했다. [삼성전자]

    2011년 7월 29일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서 권오현 당시 디바이스솔루션(DS) 사업총괄 사장(오른쪽)에게서 반도체 사업 현황 및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재용 당시 사장(왼쪽 뒤)도 함께 참관했다. [삼성전자]

    운명 가른 결정적 장면

    삼성 반도체 신화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기술적 고비마다 적절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후 삼성은 상반되는 기술 중 하나를 택하면서 최선의 방식을 찾으려 고심했다.

    웨이퍼 5인치를 거치지 않고 6인치로 갔고 다시 8인치, 12인치라는 세계 최초 모험을 택했다. 스택과 트렌치 방식 중 결국 스택을 택했다. 아버지 호암이 마련한 반도체라는 초석 위에서 30년 만에 ‘세계 최고의 집’을 지은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 아니면 힘들었을 일이다. 이 회장은 과감한 투자결정이라는 경영감각을 갖췄고 미래 기술추세를 예측하는 시야가 넓었으며 좋은 기술에 대한 안목도 있었다. 이 점에서 탁월한 기술경영자였다고 할 수 있다.

    스택과 트랜치 일화는 직원들이 갑론을박할 때 최고경영자의 빠른 의사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훗날 삼성 반도체의 운명이 갈린 결정적 장면이기도 했다. 진대제 전 사장의 육성이다.

    “후에 반도체 회사들은 4메가를 포함해 모두 스택 방식으로 개발합니다. 이건희 회장의 결정만큼 리더의 판단력과 결단력이 기업의 존망을 가른 극적 분수령으로 작용하는 일은 몇 안 될 겁니다. 도시바와 NEC는 트렌치를 고집하다가 나중에서야 스택으로 전환해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스택을 썼던 히타치에 결국 선두를 빼앗겼으니까요. 반면에 스택을 채택한 후지쯔, 미쓰비시는 살아남았고요.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트렌치를 고수한 미국 IBM, TI, 지멘스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삼성도 이런 운명이 됐을 수 있습니다.”

    당시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반도체업계에 속하지 않았던 다른 삼성 인사들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배종렬 전 삼성물산 사장은 사장단 회의에서 이 회장이 말한 내용을 떠올리면서 본질을 보려 했던 통찰력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4메가를 양산할 때 이건희 회장께서 스택으로 가자고 지시하면서 아주 쉽게 설명하셨어요. ‘지하를 파기보다 쌓아 올리는 게 훨씬 쉬운 거 아니냐’는 거였죠. 이 회장은 모든 사물을 굉장히 단순화해 결론을 내리는 탁월한 머리가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지요. 어떻게 점쟁이도 아니고 그럴 수 있겠어요.”

    이번에는 권오현 전 부회장의 증언이다.

    “삼성 내부에서도 어느 게 더 나은지 단정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결정을 해야 하는데 의견이 양분된 거죠. 그러다 ‘위로 솟은 건물 체크가 쉽겠는가, 지하로 파 들어간 건물 체크가 쉽겠는가?’ 이 한마디로 딱 정리를 한 거죠. 회장님은 기술자적인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다른 직관력과 통찰력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가장 상식선에서 생각하려 노력했던 것도 같고요.

    미래의 확장성 측면으로 따져도 지하에 100층을 파내려 가는 것보다는 위로 100층 올리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스택 방식에도 이런 저런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것저것 다 가지를 치고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천착하신 거죠. 진대제 전 사장 말처럼 결과적으로 트렌치를 선택한 회사들은 다음다음 제너레이션(세대) 때부터 거의 탈락했어요. 64메가까지는 어느 정도 해나갔지만 256메가 갈 땐 거의 다 포기했으니까요. 회장님 판단이 진짜 제대로 된 결정이라는 게 훗날 밝혀진 거죠.”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스택을 택한 결정에 대해 “내 자신도 스택 방식이 맞을 것이라는 감은 있었지만 100% 확신은 못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1999년 11월 18일 서울대학교 강연)고 짧게 언급했다.

    일본 이긴 이유, 오너십

    삼성전자 반도체가 일본을 이긴 이유에 대해 전직 삼성맨들은 자칫 기업이 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투자를 과감하고 지속적으로 이어간 오너십을 꼽는다. 사진은 이건희 회장이 2011년 9월 22일 세계 최대 규모 메모리 반도체 생산라인인 경기 화성시 16라인 가동식에 참석해 직원들을 격려하는 모습. [삼성전자]

    삼성전자 반도체가 일본을 이긴 이유에 대해 전직 삼성맨들은 자칫 기업이 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투자를 과감하고 지속적으로 이어간 오너십을 꼽는다. 사진은 이건희 회장이 2011년 9월 22일 세계 최대 규모 메모리 반도체 생산라인인 경기 화성시 16라인 가동식에 참석해 직원들을 격려하는 모습. [삼성전자]

    스택과 트렌치 에피소드를 곱씹다 보면 한국 기업사에서 오너십(ownership)의 작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삼성의 오너 경영은 반도체업계에서 일본을 따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게 전직 최고경영자들의 한결같은 전언이다. 김광호 전 부회장 말이다.

    “이병철 회장 때부터 공장 더 지어라, 웨이퍼 6인치로 하라 등 파격적 결정은 일본 회사들 입장에선 상상을 못 하죠. 일본 회사들은 오너십 구조가 아니라 은행, 증권사가 회사 지분을 나눠 갖고 있기 때문에 올해 번 이익 범위 안에서 내년 투자를 합니다. 투자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우리는 호암이 ‘공장 지어’ 하면 적자고 뭐고 와장창 짓고, 이건희 회장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이 그걸 쫓아올 수가 없었던 거죠. 삼성은 ‘라인 하나 새로 짓겠습니다’ 구두 보고하면 끝이었습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데도 말이죠.

    일본 사람들이 그런 걸 보면서 정말 놀라워했습니다. 자기들은 사내(社內)에서 합의가 됐더라도 투자자를 먼저 설득해야 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회사 채무가 늘어나는 일이기에 투자자에게 설명해야 했고요. 그런 면에서 일본 기업들은 운신의 폭이 굉장히 제한된 의사결정 구조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재벌 시스템이 나라 경제에 여러 가지 폐해도 많이 발생시켰지만,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내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는 걸 꼭 평가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이윤우 전 부회장도 “일본이 왜 한국과의 반도체 전쟁에서 졌느냐를 가만히 따져보면 오너 경영과 전문 경영인의 차이였다고 본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집단적 의사결정입니다. 조무과, 상무회를 거쳐야 하고 사장들도 재임 기간 동안 안전운행을 해 다음 자리인 회장으로 가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리스크 테이킹’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죠. 한마디로 절대적인 의사 결정자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반도체같이 변화가 따르고 스피드와 집중 투자가 필요한 분야에서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세계 1등을 하던 일본이었지만 1985년 중반부터 2000년으로 가면서 1~3 제너레이션 정도 늦어지니까 완전히 뒤처지게 됩니다.”

    엇박자 낸 일본 업체

    권오현 전 회장은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고 호황과 불황 사이의 진폭이 말도 못하게 큰 반도체 사업에서 사이클에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밀고 나갔던 이건희 회장의 집념과 의지가 일본을 이긴 동력”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메모리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고점이 오면 곧 떨어지고, 또 고점이 왔다가 다시 떨어지는 등 ‘사이클 비즈니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성이 1994년, 1995년만 해도 조 단위 이익을 내면서 단군 이래 최대 흑자라는 반도체 최고 호황기를 맞았지만 1996년 경기가 급격히 꺾이면서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때까지 좋지 않았죠.

    업체 입장에선 고점이 오면 과잉 투자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또 얼마 안 있어 공급과잉이 돼 값이 떨어져 불황이 찾아오고 값이 떨어지니까 투자를 못하고 이러다 몇 년 지나면 반도체 값이 다시 올라가고. 그렇게 반복적인 비즈니스가 계속 이어진 겁니다. 1980년대,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후반까지 시장 상황이 계속 그랬다고 보면 돼요.

    이 과정에서 일본 기업들이 밀린 이유는 투자 타이밍을 잘못 잡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삼성은 회장님의 확고한 신념 그리고 커미트먼트(commitment)로 불황에도 계속 투자했습니다. 불황 때 투자하면 장비 값도 싸고 좋은 조건이 여럿 있습니다. 부지런히 건물을 지어 양산 준비가 끝났을 때 호황이 오는 거죠.

    일본은 그런 결정을 주저주저 하다가 항상 호황 근처에서 투자를 했어요. 호황일 때는 제품이 필요하니까 당장 생산하는 게 중요한데 건물 짓고 장비 들여오고 셋업 하다가 생산을 시작할 때 쯤 되면 불황이 오는 거예요. 한마디로 계속 엇박자를 낸 거죠.

    말은 쉽지만 강력한 리더십이 없으면 불황에 투자하는 선택은 못하는 겁니다. 실패하면 책임은 누가 집니까. 임기가 있는 전문경영인 처지에서는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공장을 짓자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량 생산으로 승부하다

    2000년 12월 촬영한 삼성전자 기흥반도체공장 전경. [동아DB]

    2000년 12월 촬영한 삼성전자 기흥반도체공장 전경. [동아DB]

    2000년부터 2010년까지 글로벌 반도체업계에서는 매년 평균 한 개꼴로 D램 제조업체가 부도나거나 인수합병 돼 사라졌다. 2012년에는 일본 엘피다가 시장에서 사라짐으로써 ‘D램 대전’에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흔히 삼성이 싸구려 원가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말하지만, 단순히 그런 차원으로 치부돼서는 안 된다. 기술에는 반드시 첨단만 있는 게 아니다. 철저히 소비자 위치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정인성은 책 ‘반도체 제국의 미래’에서 그 대목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그의 글을 인용한다.

    “삼성전자는 D램 시장의 본질, 나아가서는 반도체 시장의 본질을 매우 빠르게 간파했다. 그것은 컴퓨터라는 기기가 개인이 함부로 구매할 수 없었던 첨단기기에서 개인용 전자기기로 변화함에 따라 시장에서 완제품 수명이 빠르게 짧아지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삼성은 이 방향에 맞추어 제품의 수명과 품질을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정도로 맞추고 나머지 자원을 원가 경쟁력 확보에 사용하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를 통해 구매자들이 원치 않는 레벨의 고성능 제품을 제공하는 대신, 낮은 가격으로 핵심 부품을 공급해준 것이다.

    이 간단한 원칙은 ‘시장 지배’가 매해 수십억의 원가 경쟁력을 추가로 가질 수 있게 됨을 보여주었다. 시장 리더는 이를 이용해 경쟁자를 압살하거나 이미 레드 오션이 된 시장에서 혼자 블루 오션을 만끽할 수 있다는 잔인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조금 늦게 파악한 일본 경쟁 회사들은 시장 퇴출이라는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들은 흐름을 바꾸고자 수차례 노력했지만 삼성전자는 실수하지 않고 언제나 가장 앞서 원가를 떨어뜨릴 수 있는 기술을 도입했다.

    이는 단순히 원가 싸움에서 상대를 압살하며 승리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첨단 기술이라는 것이 무조건 고성능, 고신뢰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첨단기술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언제나 사용자가 존재한다. 사용자들이 원하는 수준의 물건을 가장 빠르게 가장 저렴하게 제공하는 인적 물적 기반이야말로 진정한 첨단 기술임을 삼성은 보여준 것이다.”


    “5000억 원 정도는 맘대로 써보라”

    ‘책임은 내가 진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저질러보라’고 말하는 리더. 팔로워들이 가장 함께 일하고 싶은 리더가 아닐까. 유능한 리더는 아랫사람에게 위임을 잘하는 리더라고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건희 회장과 지근거리에서 일한 전직 최고경영자들은 사람을 쉽게 쓰지 않되 한번 쓴 사람은 믿고 맡긴다는 이 회장의 위임 리더십이 밑의 사람을 일하게 만든 동력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권오현 전 회장 말이다.

    “회장님은 굉장히 위임을 많이 하셨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으니까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만기친람) 안 하시고 미래지향적인 큰 그림을 그려주셨다는 점에서 정말 지금 시대에 필요한 경영자상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경영자들이 제일 힘들어 하는 게 오너로부터 위임을 받았느냐 혹은 내가 (아랫사람들에게) 위임을 잘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도 경영을 해봤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위임이 쉽진 않습니다. 경영자가 되면 불안하고 간섭도 많이 하게 됩니다.

    옆에서 일일이 독대하면서 배운 건 아니지만 회장님의 경영스타일을 보고 또 말씀하는 걸 들으면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회장님은 진정으로 ‘맡기면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이셨어요. 제가 보기엔 현대에 가장 맞는 경영자의 모범, 규범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김광호 전 부회장은 이런 에피소드를 전했다.

    “8인치 웨이퍼를 도입할 때였어요. 공장을 짓고 설비를 다 갖다 놓고 하면 너무 늦어서 파일럿(시험) 라인을 만들어본 적이 있어요. 장비 회사들한테 얘기해 장비를 전부 다 갖다 놓고 시험 생산을 해보는 거죠. 회사들은 여기서 성공하면 실제 양산 라인에 설비들을 들여놓을 수 있으니 정말 열심히 달려들어 합니다.

    문제는 돈입니다. 파일럿 라인 하나 만드는데 700억 원에서 800억 원 정도가 들었어요. 그런데 이걸 저 혼자 결정해서 했습니다. 보고 드리고 말 것도 없었어요. 다 맡겨 주셨으니까요. 웨이퍼 인치를 키우는 건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산화막을 입혀 평평하게 만드는 과정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거든요. 두께 편차가 있게 되면 프로세스 진행할 때 동일 조건이 안 되기 때문에 바로 불량이 나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장비업체들이 겁을 많이 내죠. 설비 자체도 커져야하고요.

    12인치 때도 그런 문제점이 대두됐습니다. 그래서 미국, 일본 선진업체들도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우리는 파일롯 라인을 해서 미리 다 시험하고 맞춰본 뒤에 양산 발주를 냈습니다. 파일롯 라인은 미리 샘플을 만들어보고 오차를 최대한 줄여 훗날 양산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미리 차단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비용을 절약하는 일이었지만 라인을 만드는 것 자체는 돈을 그냥 날려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들어가는 돈만 생각한다면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죠. 그런데 회장님은 제 판단에 맡기셨어요. ‘5000억 원은 맘대로 써라’ 하시면서 말이죠.”

    “金 부회장, 가져가”

    그는 LCD(액정표시장치) 부서를 반도체 사업부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일화도 전했다. 다시 김 전 부회장 말이다.

    “일본에서 회장님과 도시바 반도체 담당 부사장, 저 이렇게 넷이서 오쿠라 호텔에서 저녁을 먹는데 LCD 비즈니스 얘기가 나왔습니다. LCD 사업은 그때 전자가 아니라 삼성전관, 오늘날 삼성SDI가 조금씩 하고 있었는데 도시바 부사장이 대뜸 ‘LCD라는 게 D램하고 똑같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기능은 디스플레이지만 공정이 반도체랑 비슷하다는 거죠.

    무슨 말인고 하니 ‘셀 어레이(Cell Array)’라고 셀을 좌우로 좌표를 찍어 만나게 하면 불이 켜지고 그렇게 해서 빛이 나는 게 LCD인데, 메모리도 결국 메모리 셀을 좌우로 연결해가는 거라 똑같다는 거였죠. LCD는 결국 반도체에서 맡아 해야지 효율이 좋다는 거예요.

    이 말을 들은 회장님이 그 자리에서 ‘김 부회장, 가져가’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서울로 돌아와 ‘회장님 지시 사항’이라고 말하고 속전속결로 진행했습니다. 삼성전관이 발칵 뒤집혔지만 비싼 값에 제대로 쳐줬습니다. LCD가 반도체 사업부 안에서 키워지기 시작한 데는 그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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