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血戰, 전사가 부족하다
반도체 뿌리 약해지는데 큰 나무 자라겠나
전사들에게 싸울 동력 불어넣어야
실리콘밸리 인재 데려오던 시절 끝
기술 중시 이전에 필요한 건 ‘절박감’
이건희 회장의 인재 경영 이야기를 더 해보자.
삼성은 기본적으로 기술회사다. 기술회사를 끌어가는 주축은 당연히 엔지니어다. 그렇다면 이 회장의 엔지니어 인재 경영은 어떤 식으로 작동했을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만난 사람이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이다.
임 전 사장은 삼성전자에서 메모리 개발본부장, 시스템 LSI사업부장, 기술총괄 사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신사업팀장을 역임하며 메모리 반도체 1등을 만든 주역 중 한 사람이다.
현재 삼성전자가 세계 메모리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D램에 이은 플래시 메모리 기술에서 단연 앞서고 있기 때문인데 임 전 사장은 1984년 8월 그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이피(EEP) 롬(Rom) 개발부터 시작해 플래시 메모리 사업을 성공시켰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필자의 책 ‘이건희 반도체 전쟁’에도 자세히 소개돼 있다.
삼성반도체의 신화를 만든 주역 중 한사람인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글로벌 첨단산업에서 부의 신대륙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반도체 메모리의 성취를 이어가려면 엔지니어에 대한 교육과 평가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지호영 기자]
결국 人才 전쟁
임 전 사장은 평소 “반도체 전쟁은 결국 인재 전쟁”이라며 “핵심 엔지니어들에게 글로벌 최고 전문가에 걸맞은 파격적 보상과 사회적 평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과생들의 의대 쏠림 현상을 우려하는 발언을 많이 해왔다. 마침 의대 증원 문제로 시끌벅적한 요즘이라 이걸 먼저 화제로 삼았다. 그에게서는 한숨부터 나왔다.“한국은 반도체산업을 시의적절하게 선택해 선진국 소리를 듣고 있어요. 지금처럼 인재들이 의대로 쏠리면 대한민국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BTS(방탄소년단)도 대단하지만, 국가적으로 보면 수십조 원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은 ‘기술 인재’들입니다. 이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죠. 의사 증원과는 별도로 똑똑한 학생들이 엔지니어를 희망할 수 있도록 사회적 평가와 보상 체계에 대해서도 고민할 때라고 봅니다,”
한국은 반도체 제조 강국으로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데 엔지니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그에 못 미친다는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
“국내 총생산의 20%가 반도체 연관 산업 아닙니까. 코스피 시가총액 1위 2위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이고 코스닥에는 무려 300개 이상 기업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관련 소재, 장비 기업이 포진해 있어요. 모두 나노(초미세)기술 기반 기업이죠. 삼성이나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들이 잘돼야 중소기업도 잘됩니다. 이 중심에 기술 인재들이 있습니다.
삼성은 반도체를 포함해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넓은 나노기술 사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를 비롯해 파운드리, 시스템 반도체(설계), 디스플레이 사업, 삼성SDI 배터리, 삼성전기 소재부품 사업까지 6개 분야를 모두 갖고 있는 세계 유일의 종합 전자회사입니다.
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글로벌 메이저 산업이고 빠르게 성장하는 미래 산업입니다. 분야마다 전문적인 핵심 엔지니어가 필요한데 삼성이 산업 내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면 매년 하이엔드 고급 기술 인재가 수천 명씩 배출돼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10여 년 전부터 인재가 의대로만 쏠리고 엔지니어를 평가해 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생겨서 우수한 기술 인재들이 만들어질 토대가 약해지고 있어요. 뿌리가 약해지는데 큰 나무가 자랄 수 있겠습니까. 반도체, 배터리 계약학과도 만들고 했지만 늦은 감이 있습니다. 대응이 더 빨랐어야 했다고 봅니다.”
기자는 ‘이건희 반도체 전쟁’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를 여러 번 만났는데 뼛 속까지 엔지니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보였다. 목소리 톤도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이날은 대화가 이어질수록 표정은 어두워지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만큼 앞을 내다보면 걱정이 많다는 거였다.
2월 24일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서 열린 TSMC 반도체 제1공장 개소식. 사이토 겐(왼쪽부터) 일본 경제산업상, 모리스 창 TSMC 창업자, 류더인 TSMC 회장, 웨이저자 TSMC 최고경영자(CEO), 요시다 겐이치로 소니 회장,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자동차 회장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
미·중 갈등에 자국 내에서 반도체를 만들겠다는 선진 각국의 공격적 태도 변화로 반도체 시장의 지형이 확 바뀌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의 구마모토 TSMC 공장이 준공식을 했고,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에 들어간다고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엔비디아 주가가 고공행진을 하고 말이죠. 그러다 보니 위기감도 올라가는 것 같아요.“그런 외적 요소는 본질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일할 사람들이 없는데 삼성더러 ‘왜 TSMC를 이기지 못하느냐’고 비난할 일이 아니죠. 한마디로 삼성이라는 구슬을 꿸 인재들이 줄고 있다는 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삼성도 반성할 대목이 있습니다. 엔지니어가 없으면 삼성도, 대한민국도 없다는 것을 국민에게 더 적극적으로 알리고 소통하면서 ‘국민 기업’ 이미지를 심어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봅니다.
정치인과 국민도 말로는 ‘삼성 망하면 대한민국 망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기업이나 엔지니어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대접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2022년 삼성반도체의 과거 현재 미래를 호암이나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 측면이 아닌 ‘위대한 폴로어들’에게 초점을 맞춘 책 ‘히든 히어로즈’를 내놓았다. 책에서는 30여 년간 반도체 첨단 전쟁에 참여한 전사들의 ‘전투기’가 생생하게 실렸다. 그도 스스로를 ‘전사’라고 불렀다.
“옛날 제국주의가 식민지들을 쟁탈하던 때처럼 반도체, 바이오, AI, 모빌리티라는 ‘부의 신대륙’을 두고 피 터지게 싸우는 신(新)경제 전쟁 시대입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술 대기업들은 새로운 부(富)를 창출하는 전쟁에 투입된 군대이고 엔지니어들은 전사들입니다.
전사들에게 필요한 건 돈도 돈이지만 업에 대한 자긍심, 소명감이 중요합니다. 대만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이야기하다 보면 의사, 변호사보다 TSMC 엔지니어가 최고입니다. 이러니 대만이 반도체 강국이 되지 않을 수가 없죠.”
사회 전체적으로 ‘기술이 미래’라는 공감대가 필요해 보입니다.
“반도체와 전자산업은 세계시장에서 대한민국이 역사상 유일하게 ‘퍼스트 무버’로서 우뚝 선 산업이고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만든 건데 여기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약하다고 봅니다. 메모리 세계 1등 30년, 비메모리 파운드리 세계 2등, 소재 부품 장비 분야도 이렇게 기반을 다졌다는 건 대단한 거예요.
반도체가 신생 사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호암이 반도체 사업을 선언한 1983년은 PC가 나오고 6년 뒤인데 정말 대단한 신의 한 수였지요. 그때만 해도 세계 2등 국가였던 일본을 오가면서 그들이 메모리 사업을 시작한 걸 보고 우리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타이밍이 정말 기막혔죠. 조금만 더 늦게 들어갔으면 기술 격차로 따라잡지 못했을 겁니다. 초반에는 고전했지만 마침내 1993년 1994년 1995년 엄청난 호황이 오잖아요.
이에 비해 제약, 화학, 정밀기계, 자동차, 비행기 등 2차 산업혁명기에 탄생한 산업은 선진국이 100년 넘게 성을 쌓아 진입장벽이 높았는데 신흥공업국이던 한국이 추격에 들어간 거였죠. 자동차가 성공했지만, 나머지 대부분 분야에서 한국은 여전히 메이저 글로벌 기업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도체산업은 앞으로도 확장할 산업 분야가 많습니다. AI시대 아닙니까. 우리가 잘만 하면 엄청난 부의 신대륙을 쟁취할 기회가 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미국 그래픽처리장치(GPU) 제조사 엔비디아 창업자인 젠슨 황 최고경영자가 지난해 대만 타이베이에서 신제품을 발표하는 모습. 엔비디아는 주가가 고공행진해 시장가치에서 세계 최대 석유 기업인 사우디 아람코를 제치고 세계 3위 기업이 됐다. 엔비디아 앞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애플만이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3월 4일 보도했다. [뉴시스=AP]
반도체업은 철저하게 보톰 업 문화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광적일 정도로 인재, 인재 하던 이유가 있었군요.“삼성의 성취는 이건희 회장이 평소 강조했던 인재 경영의 결과입니다. 삼성은 기술회사고 결국 엔지니어 회사라는 의식이 확고했죠. 반도체업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거죠.”
‘사장보다 연봉 많이 줄 수 있는 천재들을 데려오라’고 한 시대는 삼성이 지금처럼 확고한 1위가 아닌 시절이었는데 영입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궁금해요.
“시대별로 약간 차이가 있어요. 삼성반도체의 시작은 실리콘밸리 재미과학자들입니다. 호암 창업회장이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 NEC 회장에게 ‘엔지니어들을 구해달라’고 하자 자기 회사 고문으로 있으면서 실리콘밸리에 있던 한국인 과학자 이임성 박사를 추천했는데, 이 박사가 주축이 돼 실리콘밸리 한국인 과학자 10여 명을 꾸려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이분들이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미국에서 일하던 젊은 한국인 공학자들이 많이 영입되는데 훗날 리더가 되는 진대제, 황창규, 권오현, 이문용 박사 등이 그들입니다.
국내에서는 김광호·이윤우 회장이 주축이 돼 서울대 공대, 카이스트, 병역특례 인재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기흥공장에서 일하며 자체 공정, 설계 기술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1993년 메모리 1등’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주역이 됩니다.
사실 반도체업은 철저하게 현장이 중요한 ‘보톰 업’ 조직문화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 기업문화는 군대식, 관료 문화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반도체업은 현장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고 효율과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쓸 수밖에 없어요.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잘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현장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중요하니까요.
‘1메가에서 4메가 가라’고 지시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죠. 기술이 100가지가 필요하다면 이걸 구현해 내는 기술자 100명이 필요합니다. 나는 부하 직원들이 ‘열심히 하겠다, 충성을 다하겠다’고 하면 ‘다 필요없다, 일만 잘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게 기술기업의 문화입니다.
특히 엔지니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들이 활발하게 의견을 펼치면 귀 기울여 듣고 실행한 김광호·이윤우 두 분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삼성의 오늘은 없었다고 봅니다.
저도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현장에 있었는데 이 회장의 메시지는 반도체 현장에서 이미 실천하고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해 메모리 1등을 하자 자신감을 갖고 일과 현장 중심인 반도체 기업문화를 가전을 비롯해 전사적으로 퍼뜨리려고 했던 것이 바로 신경영 선언이었다고 봅니다.”
반도체업을 조직문화적 관점에서 보니 신선하네요.
“한국 사회에 기존에 없던 산업이었던 만큼 미국식 첨단기술 기업에 있던 조직문화가 넘어와 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사회가 기술 전문가 사회로 넘어가는 매우 상징적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단적인 예로 저희는 설 추석 때 부하 직원들이 상사 집에 찾아오면 혼을 냈어요. 다른 계열사나 공무원 사회는 그때만 해도 일반적이었죠. 윗사람 눈치 보지 말고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기탄없이 이야기를 하라는 거였죠.
당시에 인텔이나 IBM 같은 미국 회사 칩 구매 팀이 한국에 오면 저희 기술진과 무슨 메모리가 필요한지, 납기는 언제인지 등을 상의하는데 보통 일본 회사들 돌고 한국에 왔습니다. 이 사람들 하는 이야기가 한국에 오면 릴랙스가 되고 소통이 된다는 거예요. 일본만 해도 위계질서가 뚜렷하다 보니 회의 때 팀장만 이야기하고 다들 입을 닫고 있다면서 말이죠.
복잡하고 어려운 산업일수록 현장 기술자, 전문가의 목소리가 중요합니다. 오너는 감독, 임원은 코치, 기술자는 선수들이죠. 감독과 코치는 선수들이 잘 뛰게 방향을 설정해 주고 경영 리소스를 잘 배분하고 평가와 보상을 잘하는 게 다죠.”
1993년 신경영 어록을 보면 ‘일본인 고문’ 활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데 이건 주로 가전 사업에 해당한 거였군요.
“일본 기술자들은 반도체에서도 1980년대 비밀리에 모셔온 분들도 있지만 조직 내에서 중심 인력으로 일하는 건 아니고 메모리(반도체 사업) 할 때 고문이나 컨설팅 인력으로 영입했습니다. 이후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일본 자체가 뒤처져서 별 도움이 안됐습니다. 더는 일본으로부터 배울 게 없어진 거죠. 디지털 정보혁명은 미국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미국의 재미 공학자를 주로 영입했습니다.”
회장의 독려는 뛰어난 인사정책
그는 외부 인재 영입에 가속도가 붙은 시기를 “2000년 이후”라고 기억했다.이건희 회장이 천재급 외부 인재 영입을 강조했던 시기죠?
“반도체도 메모리를 넘어 비메모리 분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야 했고, 전자산업 전체를 디지털 전환에 대비하기 위해 취약한 기술 부문을 빠르게 보완할 필요성이 큰 시기였죠.
실리콘밸리 재미 한인 과학자들을 시스템, 소프트웨어 분야 중심으로 1년에 몇 십 명씩 데려왔습니다. 저도 많이 접촉했는데 유학 가서 자리 잡은 사람들이나 IBM 같은 미국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만났어요.
회장이 하도 사장들에게 인재 데려오라고 닦달(?)을 해서 그때 저를 포함한 사장들의 중요한 일이 스카우트였습니다. 인재 영입은 사장만 나선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조직 내 반발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너가 강조하고 힘을 실어주니 영입된 사람들이 기를 펼 수 있었죠. 그런 점에서 회장의 독려는 뛰어난 인사정책이었습니다.
미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거죠. 거슬러 가보면 1990년대 후반부터 디지털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회장은 삼성의 자체 인력만 갖고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거 같아요. 스마트폰이 2007년에 탄생했으니까 결과적으로 미리 준비한 셈입니다. 애플이 아이폰을 만들며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고 삼성은 MS 옴니아 폰, 노키아 심비안 폰 등을 오락가락하는 시행착오 끝에 구글 안드로이드폰으로 살아남지 않습니까. 2000년대 초반 외부 인재를 적극적으로 수혈해 디지털 기술 역량을 올려간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든 그 시기 사장들이 데려온 사람들이 한 100명은 될 겁니다. 한국에는 없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영입돼 오면서 삼성이 디지털 리딩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데려오는 과정은 어땠나요.
“출장 갈 때마다 소개를 받아 만났습니다. 40대에서 50대로 미국에서 10년 이상 일하던 사람이 많았는데 사실 미국 회사에 있다 보면 위로 올라가는 데 한계가 많다는 걸 느끼게 되죠. 또 삼성이 글로벌 무대에서 막 떠오르는 기업이어서 힘도 있고 미래도 보이는 데다 연봉도 맞춰주고 임원급 자리에 집, 아이들 학교까지 다 알아봐 주니까 매력이 컸죠.
이분들이 와서 팀장, 상무, 전무, 센터장을 맡았습니다. 제가 영입한 20여 명 중에도 임원급이 10명, 부장급이 10명 정도였는데 뒤에 사장까지 승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임 전 사장은 “지금은 삼성도 기술 선진 기업이어서 그렇게 무더기로 데려올 인재가 별로 없다”며 “취약점을 보완하거나 신사업에 필요한 인재에 대한 더 정교한 영입 전략이 필요한 시기”라고 했다.
“미국이 잘하는 소프트웨어나 시스템 설계 같은 건 한국이 이기기 어렵지만 첨단 제조에서 우리가 지금 세계 최고 아닙니까. 동유럽, 동남아, 서남아시아 국가에도 자체 산업은 없지만 머리 좋은 이공계 인재가 많아요. 개발도상국 인재들에게 한국에서 일하면 최고 기술자가 될 기회가 있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나라 사람들에게 비자를 주어서 한국어를 익히게 하고 한국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확고한 기반을 구축한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첨단 소재 등의 나노기술 산업과 또 다른 한 축인 휴대폰, 자동차, 방위산업 등의 지능형 시스템 산업을 키워나갈 기반이 충분히 구축돼 있습니다.
인터넷과 콘텐츠 플랫폼이나 한류를 이끄는 엔터테인먼트 산업도 제3섹터로 자리 잡았고요. 여기에 필요한 국내외 최고의 기술 인재들이 일하는 기술 허브 국가가 되는 게 우리가 세워야 할 목표입니다. 제대로 하면 실현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삼성도 정부도 사람 키우는 일에 절실하게 나서야 한다”고 했다.
“정치도 혼란스럽고 연구개발(R&D) 예산도 줄고 이공계는 방치되고 있어요. 엔지니어라는 직업을 안정화해야 해요. 전공 분야도 이것저것 마구 시키지 말고 국가 차원에서 산업과 인재 육성과 관련한 큰 그림을 그려서 미래의 ‘필연적이고도 대세가 되는 산업’에 집중적으로 쓰일 재목들을 키워야 합니다.
엔지니어에겐 본인이 택한 전공이 쓰일 수 있는 산업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가장 큰 리스크죠. 대학들은 이 리스크가 최소화되도록 전공분야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반도체같이 ‘필연적인’ 성장이 예상되는 대세 산업에 종사하면 엔지니어도 실패 확률이 현저히 낮아집니다. 또 다른 문제는 명문 공대를 졸업한 우수한 대학생들이 글로벌 수준의 회사에 들어가면 학교에서 배운 수준과 너무 큰 차이가 납니다. 적응하기 위해 또 다른 기간이 필요한 거죠. 그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대학원 교육도 강화해야 합니다.”
신임 사장 5명에게 회장이 전한 진심
대화는 인재 이야기에서 최근의 반도체 전쟁 상황으로 넘어갔다. 우선 그에게 길게 물었다.미국이 중국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기 위해 공급망 전쟁에 나설 때만 해도 ‘삼성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또 다른 기회’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요즘 펼쳐지는 양상은 일본과 대만이 삼성을 압박하고, 미국도 인텔이 자체 칩을 만들겠다고 하는 등 위기감이 일고 있어요. 삼성이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그가 컵에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길게 답을 이어갔다.
“삼성의 기술력은 탄탄합니다. 반도체 기술이란 게 워낙 진입장벽도 높고 전문적이어서 추격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 대목에서 저는 지난 일을 돌이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공포와 두려움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고 했다.
“삼성이 글로벌 업체들을 추월하고 경쟁할 수 있는 체제가 된 건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습니다. 1993년에 메모리 1등 하고, 이후 3년간 최대 호황을 누렸지만 1996년부터 3년간은 굉장히 무서운 시절을 살았습니다.
잘나가던 일본의 세계적 메모리 기업들이 퍽퍽 쓰러지는 걸 바라보는 오너나 저희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세계 1위였던 핀란드 노키아 무너질 때에도 우리 역시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팽배했어요.
이건희 회장 입장에서 보면 하나하나가 너무 힘들었을 겁니다. 국내에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정치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오죽했으면 ‘정치가 3류’라는 말을 대중 앞에서 했겠습니까. 한시도, 한순간도 속 편하지 못했을 겁니다. IMF 경제위기까지 겹쳐 올인했던 자동차 사업도 망하고 말이죠.
그러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게 세상이 디지털로 바뀌기 시작하는 2000년대 들어서였습니다. IMF에서 벗어나 경제도 회복되고 세계 메모리 대전에서 세계 1등이 굳어졌고, LCD·디스플레이도 선두권에 섰죠. 완제품 분야에서는 휴대폰 애니콜이 급성장해 안정적 이익을 내기 시작했고, 디지털 평판 TV도 세계시장에서 약진했습니다. 어렵고 힘들던 때 첨단기술의 미래를 내다보고 진두지휘하던 회장의 디지털 전환 리더십, 1993년 신경영 메시지의 핵심인 ‘기술 중시’가 그야말로 결실을 본 거죠.”
그는 2000년 말에 이건희 회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해 말 사장단 인사에서 5명의 신임 사장 중 네 명이 엔지니어 출신이 되는 이례적 인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떠나 시스템반도체 사장으로 옮긴 때였는데 CFO(경영지원총괄) 최도석 사장을 제외하고 통신 이기태, LCD 이상완, 메모리 황창규, 저 포함해 네 사람이 모두 엔지니어 출신이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신임 사장들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다섯 명을 미국 휴스턴으로 불렀습니다. 윤종용 부회장 인솔로 전용기를 타고 갔어요. 입사 이후 처음으로 회장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했나요.
“‘고맙다, 수고했다’ 이러시는데 얼마나 따뜻하고 인간적 애정이 느껴지는 말이었는지 가슴속 깊이 감동이 일었습니다. 우리들 노고를 진정으로 알아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이건희 회장은 ‘이제야 회사가 제자리를 잡았다, 삼성전자는 세 번 망할 뻔한 회사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저는 회장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지쳤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정말 가슴이 찡했습니다. 힘도 없고 기술도 없던 시절에 전쟁터에 투입돼 맨땅에서 헤딩하던 선배들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회장은 그때 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회사는 겨우 한숨 돌렸지만 암세포가 몸을 갉아먹고 있었죠. 당시 회사가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계속 어려웠다면 회장 목숨이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다행히 그때 세계 1위 자리를 굳히면서 10년 넘게 더 사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 호암도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거 아닙니까. 1983년에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한다고 선언하고 바로 이듬해부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계속 돈을 쏟아부어야 했고, 일본 기업들은 호시탐탐 덤핑 치면서 치고 올라가는데 내부를 돌아보면 사람도 없고 실력도 없으니 빨리 따라잡을 수도 없고….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온 에너지를 다 불사르다 돌아가신 거라고 봅니다.”
‘기술 중시’는 위기의식과 함께해야
임 전 사장은 “지금 우리에게 그런 절박감이 있는가” 되물었다.“저는 ‘초격차 삼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불편합니다. 내가 지금 제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삼성이 메모리 1등은 맞지만 반도체 전체 1등은 아니지 않습니까. 파운드리도, 시스템 반도체도 아직 뒤지고 있습니다. 다시 위기의식으로 똘똘 뭉쳐야 합니다.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이라는 기술 중시는 위기의식과 함께해야 합니다. 저도 회사 다닐 때에는 이건희 회장이 위기, 위기를 말할 때 정말 싫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위기의식’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모티프였습니다.”
요즘 삼성전자 반도체 엔지니어들을 만나보면 걱정을 많이 들어요. 당장 지난해 엄청난 적자로 보너스가 없어진 것에 대한 놀람과 당혹감이 있었어요. 최근 메모리 시장의 불황이 늘 있어온 수급 과정의 사이클일지, 자체 수요가 줄어드는 것인지 하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세요.
“제가 아무래도 현직이 아니다 보니 과거 경험과 연구를 통해 얻은 걸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저도 책을 쓰면서 보니 정보통신혁명이란 게 정말 묘한 분기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게 뭐죠.
“1947년에 반도체가 발명된 이후 20여 년간 수많은 발명과 기술혁신이 이뤄지죠. 그러다 1968년 실리콘 게이트 모스(MOS) 기술이 나와서 반도체 고집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엽니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1970년대 반도체가 빠르게 고성능, 고집적화하고 1977년 스티브 잡스의 애플2가 출시되면서 PC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이건희 회장이 사재를 털어서 대한민국 최초 반도체 회사인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게 1974년인데 비록 D램은 아니더라도 이때 경험이 훗날 기술 추격에 큰 도움이 됐다는 걸 감안하면 삼성도 미국에 절대 뒤지지 않는 시점에 사업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1980년대 이후 윈도 OS(운영체계) 기반 PC가 등장해 PC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는 걸 눈여겨본 호암이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건희 회장이 박차를 가했죠. 신경영을 선언하기 직전 해인 1992년에 PC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본격적인 디지털 정보혁명이 시작됩니다. PC가 나온 지 꼭 15년 만이죠.
그러곤 꼭 15년 뒤인 2007년 스마트폰이 나오고 다시 꼭 15년 뒤인 2022년 챗GPT로 대표되는 AI혁명이 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15년마다 반도체 성능이 분야별로 205배에서 1000배가 올라가는 상황이 오는 거죠.
그런 역사를 되짚어 본다면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지금 모바일 단말기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합니다. 지난 15년간 메모리 반도체의 가장 큰 수요처는 스마트폰이었습니다. 한국이 잘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스마트폰 교체 사이클이 길어지면서 시장도 둔화하고 있습니다.”
임 전 사장은 “모바일 단말기의 정체는 PC 수요가 1990년대 후반에 성장을 멈춘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며 말을 이었다.
“1992년 인터넷이 깔리면서 1994년, 1995년에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발했고 삼성을 비롯해 각국 D램 기업들이 큰돈을 벌잖아요. 너도 나도 공장 짓고 공격 경영을 했죠. 그러다 1996년에 칩 공급 과잉이 PC 수요 둔화와 겹치면서 3년간 메모리 산업 대공황이 왔고, 12개였던 글로벌 D램 기업이 5개만 살아남는 대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그 대지진을 거치는 동안 삼성이 세계 1위로 도약하고 일본 기업들은 D램 사업에서 아예 철수하는 상황이 오지요.”
죽도록 얻어맞다 KO를 시키다
그 시절을 버틴 비결이 뭐였나요.“한마디로 제품 다양화였습니다. 당시 기업 대부분은 PC용 제품 5가지 정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삼성만 유일하게 서버, 그래픽, 램버스 등 폭넓은 응용 분야를 커버하는 20여 개 제품을 매년 개발하고 생산했습니다. 말이 쉽지, 돈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반대도 많았어요. 공장에서도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반발이 컸고요.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미래 투자를 열심히 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걸 보여준 대표적 사례죠.”
1990년대 말 D램 대 공황기에 일본 기업들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삼성이 싱글 톱으로 우뚝 서게 된 과정은 필자의 책 ‘이건희 반도체 전쟁’에도 기술돼 있다. 당시 비(非)D램 개발 총괄을 맡고 있었던 임 전 사장은 메모리본부 설계 부문 책임자가 된다. 시장조사, 제품 설계, 디자인, 제품으로서의 승인 과정 등 메모리 전체를 설계하고 사업화하는 기술 활동을 총괄하게 된 것이다. 임 전 사장 말이다.
“당시 삼성반도체는 D램 사업에서는 1992년 이후 양적으로 세계 1위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었고, 차세대 D램 개발에서도 64M 시제품에서 선진 기업들을 따라잡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반도체를 시작한 지 10년도 채 안 됐을 때였으니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성공을 이룬 거죠.
여기에다 PC 수요가 급격히 늘면서 1993년, 1994년에 무려 10조 원이라는 큰돈을 벌게 됩니다. 그때를 기점으로 메모리가 어느 정도 안정기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산량이나 공정 기술은 선두권이었지만 12개(일본 5개, 한국 3개, 대만 2개, 미국, 독일 각 1개) D램 기업이 피 튀기는 전투를 치르는 상황에서 제품과 고객 기반이 충분히 안정된 상황이 아니었던 삼성으로서는 극심한 가격경쟁이 일어날 때마다 외풍에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PC 성능이 갈수록 첨단으로 가면서 D램도 점점 고도화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중저가 제품이 아닌 ‘서버(server)’나 ‘스토리지(storage)’ 같은 대형 시스템에 들어갈 D램 개발이 필요했습니다. 게임이나 그래픽에 필요한 것도 개발해야 했고요.
1995년까지만 해도 PC 주기억장치에 사용되는 주력 D램은 ‘싱크로너스(Synchronous) D램’ 즉 SD램이었습니다. 10년 이상 메모리의 대명사로 통했는데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고 안정적인 것이 특징이었지만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죠. 이것만으로는 PC의 빠른 고성능화를 따라잡기가 힘들었습니다. 고품질의 차세대 칩 개발이 요구되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DDR램, 램버스 D램 등입니다.
여기에 그래픽 게임 시장이 요구하는 고속 입출력 D램까지 가짓수가 5가지 내외에서 20여 가지로 급증했습니다.
엔지니어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니 설계 프로세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혁신만이 살길이었습니다. 단위 회로를 표준화, 블록화하고 전체 설계 과정을 체크 리스트로 만들어 매뉴얼화해서 설계 기간을 줄이고 에러도 줄였습니다. 상품기획팀도 신설해서 고객 수요를 미리 파악하고 필요한 제품을 적기에 개발하는 능력도 키워갔습니다.”
사내에서 걱정이 많았던 이런 제품 다양화는 1996년부터 시작된 D램 불황기에 빛을 발한다.
1999년이 되자 시장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삼성은 명실공히 세계시장의 확고한 리더로 자리 잡게 된다.
1999년 256MD램 세계 최초 양산을 알리는 삼성전자 경영진. 맨 오른쪽이 임형규 당시 부사장이다. [임형규 사장]
“PC에 들어가는 D램 값은 10분의 1로 떨어졌어도 서버나 그래픽, 게임용 D램은 3분의 1, 4분의 1 정도로 하락 폭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PC 의존도를 줄이는 다양한 제품 개발을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지 못한 기업들은 다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장을 돌려봐야 원가도 챙길 수가 없으니 세울 수밖에 없는 거죠. 적자는 쌓이고 시설은 노후화되고 고객은 떠나는 악순환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특히 일본의 5대 반도체업체가 하나둘 공장 가동을 멈추면서 결국 NEC가 주도하는 엘피다로 통합돼 버립니다.
한국도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합쳐져 하이닉스반도체가 된 것이 이때입니다. 독일 인피니언, 미국 마이크론, 그리고 소규모 대만 대기업들이 살아남았지만 체력이 크게 손상된 상태였지요.”
스마트폰 정체가 가져올 새로운 신기술은
지금 격변기가 PC 침체기와 비슷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삼성은 PC 수요가 정체되는 대격변기의 승자였지만 2007년 스마트폰이 등장해 D램의 새로운 대형 수요를 창출할 때까지 PC사업에서 큰 성장은 어려웠습니다. 새로운 D램 수요를 가져온 휴대폰, PDA, 게임기 등이 있었지만 PC 수요 자체가 둔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둔화를 겨우 메우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앞으로 스마트폰 성장이 둔화되는 수년간이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될 것 같아요. PC를 대체한 새로운 단말기였던 스마트폰이 나오기까지 6,7년 정체 상황 말이죠.
현재 전 세계 톱 D램 기업이 3개로 줄어든 상황에서 당장은 과거 PC의 몰락이 부른 D램 산업 대개편 같은 큰 변화는 없으리라 예상되지만 각 기업 간 위상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질문이 생각나는데 우선, 스마트폰을 잇는 다음 단말기는 뭐가 될까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웃음). 이번에 삼성갤럭시가 통역 기능에 선보인 서버를 아예 칩에 심는 ‘온 디바이스’ 칩이나 VR(가상현실), 자율주행자동차 등이 새로운 메모리칩 수요를 만들고 있지요. 하지만 당장은 폭발적인 D램 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과거 D램에서 대박을 친 플래시 메모리가 그랬듯이 HBM(High Bandwidth Memory·고대역폭메모리) 같은 새로운 메모리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서 이 정체기를 넘어야 합니다.
챗GPT가 촉발한 AI 클라우드 인프라 수요는 향후 수년간 크게 성장할 겁니다.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하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이 칩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회사가 바로 엔비디아입니다. 이 시장에 얼마나 빠르게 참여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TSMC, 인텔과 경쟁해야 하는 쉽지 않은 사업입니다만 파이가 커지는 만큼 삼성에도 기회가 있다고 봅니다.”
HBM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삼성보다 기술이 한 수 아래인 하이닉스가 앞선 건 삼성으로서는 뼈아픈 일이라고 보입니다.
“하이닉스가 지난 10여 년간 설계 능력을 올리고 고객 중심 경영을 한 성과입니다. 삼성의 경우 전선(戰線)이 넓어서 충분한 인재 투입을 못 했을 가능성도 있고요. 앞으로 두 기업의 치열한 경쟁은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산업을 더 강하게 할 겁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입니다. 시장과 고객에게 필요한 높은 품질의 제품을 앞서서 공급하는 삼성의 역량은 그대로 있다고 봅니다. 공정 기술과 생산성에서 앞서나가는 것이 뒷받침돼야겠지만 새로운 응용에 대한 제품 기술개발만이 미래 생존에 가장 중요합니다. D램 대공황 때 교훈을 참고 삼아 힘들어도 미래의 기회 산업에는 충분히 투자해야 합니다.”
2월 21일 인텔은 2027년 ‘꿈의 공정’으로 불리는 1.4나노 초미세 공정에서 칩을 생산하겠다고 밝혀 시장에 충격을 주었다.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 클라라의 인텔 본사. [동아DB]
“미국 정부는 첨단 반도체의 설계뿐 아니라 제조까지 반도체 기술에 대한 독점적 위상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인텔을 앞세우고 TSMC와 삼성에 보조금까지 주어가며 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자국 내에 세우게 하는 건 더 완전한 기술 파워를 갖겠다는 거죠. 설계는 물론 자국 내에서 첨단 반도체를 만들면 안보에서부터 공급망까지 모든 게 편해지지요.
실제로 미국에는 엔비디아, AMD, 인텔, 퀄컴 등 설계 최강 기업뿐 아니라 제조에 필수 장비를 공급하는 AMT·LAM·KLA도 있고, 시놉시스·케이던스 등 세계 최고 EDA(반도체 설계 필수 소프트웨어) 기업이 포진해 있습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효과적으로 늦추고 있을 정도로 세계 반도체 산업을 콘트롤하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요.
하지만 첨단 반도체 제조는 지난 40여 년의 경쟁 결과 한국과 대만이 승자였습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우선 엔지니어가 부족하고 인건비 등이 높기 때문에 원가가 최소 30% 비쌉니다. 저는 미국이 자체 안보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만 국내에서 할 것으로 봅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도 20%를 이야기했잖아요.
1980년대 말 반(反)덤핑 이슈 때 미국이 자국 내에서 생산한 반도체만 쓸 수 있다고 해서 한국과 일본 기업들이 메모리 공장을 잇따라 미국에 지은 적이 있어요. 삼성 오스틴 공장이 그겁니다. 이후 어떻게 됐나요? 정치적 이슈가 사라지자 다 철수했죠. 오스틴 공장은 파운드리 공장으로 바뀌었고요. 미국이 한국과 대만을 중국처럼 적대시하는 상황이 오지 않는 한 시장은 품질과 가격을 따라 움직입니다. 결국은 경쟁력입니다.”
기술업 본질 깊이 생각할 때
중국의 미래는 어떻게 보세요.“2003년에 중국 스촨성 성도과학기술대를 가본 적이 있는데 한 해 입학정원이 1만 명이라고 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현재 중국이 배출하는 엔지니어들은 G7, 한국, 대만을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게다가 최상위 인재들이 엔지니어가 됩니다.
그들이 지난 20여 년간 기술을 축적해 왔기 때문에 중국 제조업은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도체 장비같이 기술 축적이 장기간 필요한 산업에서는 아직 뒤져 있지만 신재생, 전기차, 배터리 등 신산업에서는 앞서가고 있습니다.
중국은 존재 자체가 위협입니다. 공산당이라는 정치체제 이전에 인구 14억 명과 거대한 국토만으로도 G7의 견제는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너무 크고 위협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불편하지요. 서구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점점 더 중국에 대한 기술과 시장 장벽을 높여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도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장기 안목으로 기초기술 자립을 추진하고 있고, 브릭스도 확대하고, 아프리카에 투자하는 등 시장 확충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미·중 경쟁체제는 길게 갈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미국 중심의 공급망 체제 아래 우리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반도체의 경우엔 대만과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상대적 경쟁력이 중요하고요.”
2023년 12월 28일 저녁 구마모토현 TSMC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 광경. 1년 365일 매일 24시간 공사로 5년 공기를 20개월로 단축했다. [동아DB]
“대만은 한국과 같은 시기에 신흥공업국으로 성장해 반도체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했습니다. 삼성이 1983년 메모리 반도체에 진출했는데 대만은 1987년에 TSMC를 공기업으로 창립했습니다.
삼성이 일본을 넘어 메모리 세계 1위에 오른 1990년대에 TSMC는 파운드리 산업을 개척하고 리딩 기업이 됐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는 PC가 반도체산업의 가장 큰 수요처였는데 이 PC의 CPU를 인텔이 장악했지요. 설계하고 제조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파운드리 시장이 크지 않았죠.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디지털 기술혁명으로 통신, 컨슈머에서 다양한 반도체 수요가 탄생하고 제조기술 난도도 높아지고 투자 규모도 커지면서 설계 회사가 제조까지 하기가 어려워졌어요. 제조를 담당하는 파운드리 산업이 이때부터 급성장했고, TSMC가 단연 이 분야 선두가 됐지요.
TSMC가 크는 과정에서 대만계 미국인들이 주도하는 미국 내 팹리스(제조는 안 하고 설계만 하는 회사)들의 성장도 도움이 됐습니다. 엔비디아, 마블, 브로드컴, 최근 AMD까지 미국 팹리스 기업에 대만계 고위 임원이 많다는 걸 주목해 봐야 합니다.
이건 한국과 대만의 전자산업 성장 과정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은 1980년대부터 가전에서 전자산업이 시작돼 휴대폰, TV등으로 발전해 일본과 오랫동안 경쟁해 온 반면 대만 전자산업은 PC 마더보드(기본 회로와 부품을 담고 있는 기판)에서 시작해 미국 컴퓨팅 산업계와 오랫동안 동반 발전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만계 우수 인력이 미국 반도체 기업으로 건너가 오늘날 여러 기업의 리딩 그룹이 된 겁니다.
과거 대만은 한국과 같이 다변화 돼 있지 않고 반도체에 대한 집중력이 너무 강한 것이 약점으로 보였는데 AI시대에 들어서는 반대로 이게 큰 강점이 되고 있습니다. TSMC의 경쟁력은 오랫동안 구축돼 왔을 뿐만 아니라 대만 정부와 사회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지요.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의 최강국인 것과 동시에 스마트폰, TV 등 전자산업, 여기에 자동차도 갖고 있기 때문에 온 디바이스 AI 시대를 주도할 역량이 있습니다. 파운드리 산업도 이들과 함께 동반성장할 수도 있고요. 결국 모든 건 경쟁력이고, 이는 거듭 말하지만 얼마나 우수한 기술 인재를 키울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신세대 때문에 새로운 리더십이 나와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모든 걸 일의 본질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봐요. 기술 경쟁의 본질은 시대를 불문하고 똑같아요. 구성원 하나하나가 일을 잘하게 모티베이션을 주는 게 중요하죠. 무작정 일을 더 하라는 게 아니라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중요한 역할을 주면 없던 힘도 생깁니다. 유능한 사람들에게 역할을 주고 보상을 주어야지 일하기 싫다는 사람까지 다 끌고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세계 최고 기업들이 각축하는 첨단산업에서 오합지졸로는 안 됩니다. 실력으로 경쟁하게 해야죠. 그게 기술업의 특성이자 숙명입니다. 기술업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첨단산업의 첨병들을 응원해야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한켠에서 위기의식을 불어넣고 다른 한켠에선 보상을 해줬습니다. 잘한 놈(?)들은 확실하게 챙겨주라고 했어요. 전쟁에서 이기면 전리품을 확실히 챙겨준 거죠. 그래서 저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은 의사보다 더 많이 벌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상 체계도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10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만 임원, 사장 될 때까지 20년 30년은 못 기다립니다. 상위 10% 20% 정상급 엔지니어들한테도 그 능력과 기여에 걸맞은 보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인사가 무지무지하게 중요합니다. 옛날엔 승진이라는 형태로 한 계단 올라가면 봉급이 두 배씩 뛰게 보상을 승진과 연동했습니다. 승진하면 연봉도 올라가는 식으로요. 하지만 지금은 승진만 갖고는 올라가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자리’란 것이 적으니까요. 직위가 높은 사람이 많은 역할을 하는 건 맞지만 너무 상층부에만 몰아주는 경향이 있어요.
지금은 ‘자리’나 ‘승진’이라는 단순한 보상 체계만 갖고는 어렵습니다. 기술적 능력, 문제 해결 능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보상 시스템을 매우 정교하게 짜야 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건희 회장 시대와는 너무 다릅니다. 지금까지 해온 걸 잘 지키면서 새롭게 확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