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력의 계통조류(系統潮流, 전력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송전되는 것)가 한반도의 남북을 종단하는 모습으로 형성됐고 한반도의 중심지점 수급시설인 수색(水色)변전소(광복 때까지는 경성변전소라 불렸음)는 크게 각광받았다. 특히 광복 후 남과 북이 갈리자 수색변전소는 이북의 전력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태평양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목적으로 모든 발송전회사를 국유화하는 동시에 조선전업(朝鮮電業)주식회사에 모두 흡수·통합했다. 이에 전력산업 구조는 하나의 발송전회사와 네 개의 배전회사(京電, 南電, 西電, 北電)로 단순화됐고 수색변전소는 조선전업의 산하 사업소가 됐다.
1945년 5월 전기기술자 현인겸(玄麟謙)은 조선전업 경성전업부 수색변전소 산하 남천개폐소(변전소간의 거리가 멀 때 중간에 설치하는 송전사업소)의 변전기기 책임자였고 직위는 일본인 소장 스기모토(杉本) 다음이었다. 그는 불령선인(不逞鮮人) 학생독서사건에 연루돼 평양고보를 중퇴한 후 경성전기학교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전기검정 3급, 2급을 차례로 따냈으며 조선인 직원으로는 드물게 정사원 자격을 획득했고 평양변전소를 거쳐 1941년 남천개폐소에 배치됐다.
수색변전소에서 파견근무 시작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던 시점이었다. 한반도 상공에 B29 전폭기가 비행운(飛行雲)의 긴 꼬리를 드리우며 자주 나타나 미국이 승세를 잡고 있음을 과시했다. 일본은 ‘귀축미영격멸(鬼畜米英擊滅)’의 구호 아래 최후 승리는 일본의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조선인에게는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조선인들은 비행운을 비룡(飛龍)의 출현이라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일제의 압정은 더욱 가혹해져갔다. 애써 농사지은 것을 모두 공출로 바쳐야 했고 놋쇠 제품이면 숟가락, 밥그릇까지 걷어갔다. 탄알을 만든다는 이유였다. 농어촌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선 식량증산이라는 구호 아래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 운동장을 전부 파헤쳐 고구마를 심어 가꾸게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일정량 이상의 관솔을 채집해 바치게 했고 그 실적을 학교 성적에 반영했다. 비행기에 쓸 기름을 짜낸다는 것이었다. 징용으로, 징병으로, 정신대로 젊은 남녀는 물론이고 중년까지 끌어갔다.
1945년 5월, 현인겸은 상급 사업소인 수색변전소 소장 아라시마(荒島)의 부름을 받았다. 소장은 “앞으로 약 반년 동안 수색변전소에서 파견근무를 한다. 숙식은 변전소가 제공한다”고 말했다. 현인겸은 가족을 남천에 남겨둔 채 대충 일용품만 싸들고 수색변전소에 부임했다. 서울 바로 옆에 있는 수색변전소는 평소 동경하던 곳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라시마는 교양 있는 일본인으로 남천에 들르면 꼭 현인겸을 따로 불러 격려하곤 했다. 수색으로 출근한 첫날도 아라시마는 현인겸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구로다케군(玄武君·玄武는 현씨의 창씨성, 군은 부하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 자네는 호남아야. 앞으로 맡은 일도 잘해낼 거라고 믿네.”
현인겸은 보통사람보다 키가 크고 잘생긴 헌헌장부였다. 인종적으로 땅딸막한 일본인들은 현인겸을 보면 부러움을 나타내며 호감을 가졌다.
현인겸이 수색변전소에서 맡은 일은 ‘주변압기(Main Transformer) 소개 프로젝트’로 수색변전소 뒷산에 굴(터널)을 파서 주변압기를 그 안으로 옮기는 이동 시설을 만드는 공사였다. 일반적으로 큰 변전소에는 주변압기가 여러 대 설치돼 있는데, 만일 주변압기가 손상을 입게 되면 이를 통해서 송출되는 전력이 끊어진다. 또 주변압기 등 중요 수급기기가 손상될 경우 다른 연관시설에도 즉시 파급될 뿐 아니라 계통조류를 무시한 역조류 현상을 일으켜 순식간에 광범위한 지역이 단전되는, 이른바 광범위 계통트립(Trip) 현상이 일어난다. 그만큼 주변압기 보호는 중요하다. 그래서 일제는 한반도의 중심 전력수급시설인 수색변전소 주변압기 보호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일제는 공습경보가 울리면 수색의 주변압기를 즉시 터널 안으로 옮기고 그 안에는 송전연결시설까지 해놓음으로써 전기공급이 끊기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중한 무게의 주변압기 밑에 회전체를 달고 궤도 위에 올려놓아 끌거나 밀어서 터널 안으로 대피시켜야 했다. 전황이 다급한 만큼 단시간 내에 완공해야 할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었다. 일제는 일본 본토가 거의 초토화되자 한반도를 결전장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중심지인 서울이 폭격당할 경우 지하 발전시설을 건설할 시간이 없으므로 차선책으로 수색변전소의 터널화를 서둘렀던 것이다.
총감독 현인겸은 프로젝트의 목적을 알고 씁쓸했지만 일제의 녹을 먹고사는 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전기설비의 안전시설은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일제는 공사투입 인원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동원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에 항거하다 체포된 많은 애국지사가 복역하고 있었다. 공사현장을 감시하는 사람들 역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동원했는데, 이들은 장총을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