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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흰 그늘의 길’

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흰 그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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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김지하는 ‘민족자주통일연맹’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남북학생회담 환영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조동일과 함께 판문점 남북학생회담의 ‘민족예술과 민족미학 회담’분야 남측 학생대표로 선정되어 이를 준비한다. 남북학생회담 개최 일주일을 앞두고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이 회담은 좌절되고, 김지하는 2학기 복학 때까지 목포 부둣가를 떠돈다.

김지하가 “우주로 사라지는 흰 운명의 길”을 본 것은 4월혁명 직후였다. 그는 “선배들의 퇴학 처분과 문교 당국의 위선에 심기가 뒤틀려” 등록을 포기하고 서울과 원주, 대학가를 떠돈다. 그 즈음 수원농대에서 연극 공연을 마치고 술을 마시다가 한밤중 창밖에 홀연히 펼쳐진 그 하얀 길을 목격한 것이다.

창밖에 홀연히 펼쳐진 하얀 길

“거기 양쪽 두 개의 소실점 밖으로 사라지는 길고 긴, 달빛 비치는 흰 신작로가 똑바로 누워 있었다. 가로수와 먼 곳 숲들은 모두 검고 길만이 새하다. 만월은 저 높은 하늘을 가로질러 운행하고 눈부신 구름들이 달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행길은 한없이 소실점 바깥으로 달려가 지평선 너머의 저 아득한 한밤의 흰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에 왠지 내 운명이 걸려 있는 듯했다.”

흰 길의 끝없는 현전! 예민하고 영감으로 가득찬 젊은 대학생은 신비한 빙의 상태에서 이 길에 홀려 몇 시간이고 걷다가 여명이 돋아올 무렵 퍼뜩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이 체험은 그의 운명 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몇 번이고 상황을 바꿔가며 나타난다. 민청학련 사건 때, 여러 번에 걸친 투옥과 감방에서의 백일참선 때, 김지하는 정신과 의사의 권위를 빌려 이것이 감각적 착란이나 시각의 분열 현상이 아니라 종교적 환상이라고 분류한다.



1979년 10·26 직후 김지하는 감옥에서 박정희가 죽었다는 뉴스를 듣는다. 그의 머릿속에 세 마디의 말이 떠올랐다고 한다.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가리다.” 김지하는 자기가 박정희를 결코 ‘용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누구나 언젠가 이승의 몸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생의 ‘무상함’을 깨달았다고 적는다.



김지하의 회고적 문체가 언제나 놀라운 황홀함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글들은 잘게 쪼개져서 각각 독립된 단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 파편화된 단상들에는 각각의 제목이 달려 있다. 제목은 기억의 구획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겠다. 때로는 모호한 사변(思辨)이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흰빛의 상징성’을 설명하는 대목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진다. “‘흰 그늘’은 그 현대적 전개과정에서 동이적 상상력의 알심이기에 나아가 농경정착적인 생명의 에콜로지이며, 대륙과 해양 그리고 세계의 남과 북이 교류·교차하고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서로 교합(交合)하는 새로운 후천세계(後天世界)의 구체적 창조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날렵한 요즘 글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장엄한 문체임에는 틀림없다.

신동아 200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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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석주 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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