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 시력’이 ‘야간 시력’보다 절대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하는 책, ‘색맹의 섬’
‘완전한 색맹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보는 세계는 어떨까? 그 사람들은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 자체를 느끼지 못할까? 그들도 우리가 보는 세계 못지않게 강렬하고 활기 넘치는 세계를 갖고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명암과 질감과 움직임과 깊이를 뚜렷이 인지하는 능력이 더욱 발달해 어떤 면에서는 우리 것보다 더 강렬한 세계, 실체가 강조된 세계-우리로서는 위대한 흑백사진 작품 안에 담긴 울림을 통해서 어렴풋이 알아챌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사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사소한 것, 하나마나 한 것에나 한눈을 파는 우리를 도리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올리버 색스 지음 ‘색맹의 섬’, 이마고)
올리버 색스에게 이런 궁금증을 풀 기회가 찾아왔다. 태평양 미크로네시아의 섬 핀지랩. 선천성 전색맹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색맹의 섬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안과의사인 봅과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시각을 연구하는 생리학자이자 전색맹인 크누트가 동행했다.
색맹의 섬 핀지랩
특히 크누트는 일행에게 전색맹의 특징을 사전에 관찰할 기회를 제공했다. 전색맹자는 태양 아래서는 이중삼중으로 선글라스를 끼고도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이거나 찌푸리고, 경련을 일으킨다(안진증). 원뿔세포가 없기 때문에 시력이 정상의 10분의 1밖에 되질 않아 식당의 차림표를 읽으려면 4배율 돋보기를 꺼내 들어야 할 정도다. 대신 새벽과 저녁, 달밤에는 고양이처럼 편안하게 움직일 뿐만 아니라,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는 데 선수다. 이런 타고난 능력을 살려 크누트는 흑백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방문한 핀지랩은 적도 부근, 우리에게도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괌·사이판과 1946년에 원자폭탄 실험이 진행된 비키니 섬 사이의 산호섬으로, 폰페이 섬을 둘러싸고 점점이 박혀 있는 8개의 산호섬 가운데 하나다. 1775년 무렵 핀지랩 거주자는 1000명에 이르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섬을 덮친 태풍으로 인구의 90%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나머지도 대부분 굶주리다 죽어버려 몇 주 만에 생존자는 2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고립된 핀지랩 주민들은 불가피하게 근친교배로 인구를 늘려갔고,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색맹의 급증이다. 태풍 사건 뒤 200년 이상 지나자 섬 인구 700명 가운데 3분의 1이 ‘마스쿤(안 보인다는 의미)’ 보유자로 확인됐고, 57명은 전색맹이다. 다른 지역의 색맹 발생률이 3만분의 1 미만인 데 반해 핀지랩에서는 12분의 1이나 됐다. 이 사실만 봐도 핀지랩은 부인할 수 없는 ‘색맹의 섬’이다.
이런 영향은 1950년대에 핀지랩 주민들이 대거 이주한 인근 폰페이 섬에서도 나타났다. 핀지랩 출신이 모여 사는 만드에서는 지난 40여 년간 다른 마을과 접촉이 거의 없었던 탓에 전색맹 ‘마스쿤’이 핀지랩보다 더 흔하다.
핀지랩을 거쳐 폰페이 섬을 여행한 올리버 일행은 ‘색맹의 섬’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타고난 팔자를 탓하며 조상을 원망하는 원주민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마스쿤? 물론, 환한 곳을 기피하고 시력이 형편없는 마스쿤들은 글자가 코에 닿도록 바짝 다가가지 않으면 책이나 칠판 글씨를 읽을 수 없어 학습 장애가 되기 쉽고, 대낮에는 장님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야외에서 친구들과 뛰어노는 대신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다녀야 하며, 커서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처지에 놓인다. 또 이들이 낳는 자식도 같은 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짝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