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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마라, 핫소스…‘매운맛 문화권’의 확장과 타락

고추, 마라, 핫소스…‘매운맛 문화권’의 확장과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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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아메리카를 떠나다

고추, 마라, 핫소스…‘매운맛 문화권’의 확장과 타락

도쿄의 한 이자가야에서 판매하는‘죽음의 매운맛 세트’메뉴.

앞서 만난 다카야마라는 일본인 친구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괴로운 표정까지 지으며 매운 모우코탄멘을 먹는 모양을 보고, 나는 혹시 최근 5년 사이에 일본에서 유행하는 매운맛의 비밀이 일본의 으스스한 겨울에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알다시피 일본의 주택에는 온돌이 없다. 대부분 냉난방 겸용 에어컨이 있다고는 해도 하루 종일 켜두기에는 전기요금이 비싸다. 결국 다다미방에서 전기담요 한 장을 상 위에 덮은 고타쓰로 한기를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예전에 지어진 집은 방한 시설도 별로다. 으스스한 겨울 날씨를 견디는 방법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온천욕이 거의 유일하다.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 매운맛이 갑자기 유행한다는 언론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이 한국 김치로 인해 생긴 결과라고 예단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직접 일본에 가서 탐문하고 다니면서 그건 잘못된 생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매운맛’ 하면 반드시 한국 음식만을 떠올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 음식이 단지 매운맛의 하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매운맛 음식만을 소개하는 수십 권의 책자에는 한국 음식을 비롯해 중국의 쓰촨(四川) 음식, 태국 음식, 멕시코 음식, 심지어 인도 음식까지 들어 있다.

최근 일본어에 새로 생긴 말이 ‘피리피리(ぴりぴり)’다. 즉 ‘얼얼하다’는 뜻인데, 매운맛 음식을 먹고 나서 느끼는 몸의 반응을 가리킬 때 쓴다. 매운 음식을 주로 판매하는 식당은 아예 메뉴판에 빨간 고추로 매운 정도를 표시해두곤 한다. 보통 다섯 개의 고추를 붙여 매운 정도를 5단계로 나눈다. 한국 음식에는 보통 3~5개의 고추가 표시돼 있다. 이렇듯 일본인의 매운맛은 일정 부분 고추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지만, 반드시 한국 음식에 들어 있는 고추만이 매운맛의 제공처인 것은 아니다.

주지하듯 고추의 원산지는 아메리카 대륙이다. 15세기 말 서유럽 사람들이 이 대륙에 왔다가 돌아가는 배에 고추를 실었다. 무역선을 따라 고추는 아프리카의 가나 만에 도착하고,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때 고추를 후추와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유럽인들은 ‘빨간 후추(red pepper)’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고추는 담배나 코코아, 토마토만큼 유럽 전역에서 환영받지는 못했다. 후추에 비해 너무 매우면서도 분말로 만들기 어려운 단점 때문에 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의 자리를 얻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다만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는 관상용으로 정원에 고추를 심기도 했다. 열매가 열리고 색깔이 변해가는 모습이 아름다웠으니까.



무역선을 타고 남아시아에 도착한 고추는 인도 북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식용 대상이 됐다. 다시 동남아시아를 그냥 지나쳐 중국의 닝보(寧波)에 온 고추는 새로운 작물로서 어느 정도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고추의 맛은 매운맛에 익숙지 않았던 지금의 창강(長江) 하구 지역 주민들에게 별 인기를 얻지 못했다. 창강은 내륙의 충칭(重慶)까지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 교통로를 따라서 고추도 이동했고, 마침내 환영을 받은 첫 번째 도착지가 바로 우한(武漢)이었다. 고추는 강물로 인해 늘 습윤한 분지 지역인 우한에서부터 서쪽으로 점을 찍어가면서 정착지를 만들어갔다. 그것이 충칭을 넘어 청두(成都), 윈난(雲南)과 구이저우(貴州)를 거쳐서 광시(廣西)까지 전해졌다.

‘水吉公의 高麗胡椒’

한편 닝보를 떠난 포르투갈 무역선은 1543년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에 고추를 내려놓는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별로 인기를 누리지 못한 고추는 곧장 배를 다시 타고 쓰시마지마(對馬島)로 간다. 거기서도 정착에 실패한 고추는 쓰시마의 사신들 배에 실려 지금의 부산 동래에 도착한다. 이미 마늘이나 산초(山椒) 같은 매운맛을 즐기고 있던 조선 사람들은 고추를 그냥 두지 않았다. 재배해 알코올 도수 40도가 넘는 소주에 타 마시다가 죽은 사람도 생겼고, 관상용으로 심는 사람도 생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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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민속학 duruju@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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