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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조선 침(鍼)의 자존심 허임

400년 만에 부활한 보사법, 알레르기비염·이명에 특효

잊힌 조선 침(鍼)의 자존심 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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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조선 침(鍼)의 자존심 허임

드라마 ‘허준’의 한 장면.

선조 때인 임진왜란 초기에 궁중에 들어와 광해군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이나 임금의 총애를 받은 그의 침구 비법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기록에 따르면 허임은 침을 놓는 기법에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선조 37년의 실록을 보면 ‘(임금이) 편두통을 앓았을 때 허준은 병을 진단하고 남영은 혈자리를 잡고 허임은 침을 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대목은 그가 침기술의 대가였음을 방증한다. 침구학은 경혈을 연구 정리하는 경혈고증학파, 침을 찌르고 자락해 피를 뽑는 자락방혈파, 침을 놓는 기법을 중시하는 수법파 등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있는데 허임이 바로 이 수법파에 속한다.

이 수법파 기술의 결정판이 바로 보사법. 그의 보사법은 비법으로 인정돼 허임 보사법으로 따로 분류될 정도다. 그는 자신의 저서 ‘침구경험방’의 서문에 자신의 침법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혔는데, 여기엔 상당한 자긍심이 녹아 있다.

“불민한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병을 고치려 의학에 몸담은 뒤로…환자를 치료하는데 진료의 요점과 질병의 변화 과정, 보사법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허임 보사법의 원리

1748년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간 의사 조숭수는 조선침구의 특징을 묻는 일본 의원 가와무라 코에게 침구보사를 이같이 설명한다.



“침을 잘 놓는 자는 보사의 방법에 능통하다. 조선에는 허임이 가장 침을 잘 놓았고 김중백이 이를 이어받았다.”(상한의문답)

허임 보사법의 수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만약 침을 5푼 깊이로 찌른다면 2푼을 찌르고 멈추었다 다시 2푼을 찌르고 나머지 1푼을 찌르면서 환자에게 숨을 들이마시게 한다. 이를 보법이라 하는데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과 같이 몸에 기를 팽팽하게 채워 넣는 것에서 유래했다. 사법은 이와 반대로 풍선에서 공기를 빼는 것처럼 자침한다. 특히 그는 이때 “오른손으로 침을 놓는다면 왼손을 놀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즉, 오른손이 침을 놓으면 왼손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뜻.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혈(穴)의 특성부터 이해해야 한다. 혈은 피부로 덮인 일종의 구멍으로,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혈의 구멍을 열려면 피부를 문질러서 내면의 기가 활발히 움직이게 해야 한다. 이때 피부 안에 블랙홀처럼 구멍이 생기면서 기의 흐름이 더욱 활발해지는데, 허임은 바로 그때 자침을 해야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왼손으로는 침 놓을 자리를 열심히 문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침도 앞에서 설명했듯 세 번을 나누어서 2푼, 2푼, 1푼으로 찌르는데, 이는 상중하의 뜻으로 천지인(天地人)을 뜻한다. 혈자리에 침을 놓는 것은 기를 의사의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이 기본 목표. 이때 기는 하늘과 땅이 마주쳐서 생기는 기후의 변화를 의미한다. 태양으로 대표되는 하늘의 변화를 시간으로 규정하고 사방팔방의 공간인 땅의 변화를 합해 계량화한 것이 바로 혈자리가 된다. 바람, 더위, 추위, 습기 등 기후변화처럼 혈자리는 하늘과 땅의 만남을 통해 몸을 데우고 식히며 팽팽하게 만들거나 수축하는 변화의 중심축이 된다.

“침법은 손으로 익혀라”

그의 침법은 이렇듯 단순하지만 본질을 읽어내고 임상이라는 실전에 적용한 비법이었다. 필자도 임상에서 이 침법을 응용해봤는데 알레르기 비염과 이명에 특히 좋은 치료 효과를 보였다. 알레르기 비염은 신체가 외부물질에 대해 예민해져 꽃가루나 온도변화를 적(敵)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생긴다. 따라서 콧물로 씻어내고 재채기로 밀어내고 가려움으로 긁어내려 한다. 외부에 대한 팽팽한 긴장감이 예민함의 원인이기 때문에 이때는 풍선에 바람 빼듯 허임의 사법을 실시하면 좋은 치료효과를 볼 수 있다. 이명도 귀 안의 신경세포인 유모세포의 흥분을 진정하는 치료를 통해 좋은 효과가 있음을 실증했다.

관념적인 학문보다는 실질을 중시한 의사답게 그의 저서 서문은 기술의 습득을 유난히 강조한다.

“침구기법을 마음만으로 얻으려 하지 말고 손으로 익혀라(得之於心 應之於手). 비법은 주어도 교묘한 재주는 줄 수 없다.”

잊힌 조선 침(鍼)의 자존심 허임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現 갑산한의원 원장.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 이사, 한의학 박사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그런데 왜 이런 절세의 침법이 그의 사후 한동안 맥이 끊겨 사라졌던 것일까. 그것은 유학과 오행사상 등 관념과 교조주의 철학에 사로잡힌 조선의 지배구조가 일세를 풍미한 그의 치료법마저 삼켜버린 때문이다. 문헌을 끌어 모아 짜깁기하는 데만 급급했던 조선 후기의 침구법 서적과 달리 그가 남긴 ‘침구경험방’은 간결한 내용에 실용성이 돋보인다. 하지만 끝내 그는 시대의 이단아로 눈을 감았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을 울린 조선침구학의 자존심은 정작 자신의 조국 조선에선 바람처럼 잊혔다.

신동아 200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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