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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온 미친 자아를 드러내시라,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감춰온 미친 자아를 드러내시라,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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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온 미친 자아를 드러내시라,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악보 해석은 연주자의 몫이다. 빈틈없는 연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우).

지난 10여 년간 세상에는 행복담론이 많이 떠돌았다. 삶의 질이 향상돼야 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 추구에 있다…. 행복을 떠올려볼 겨를이 없던 삶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났다는 방증이다. 행복담론은 자꾸만 가지를 뻗어나가 재미 추구, 의미와 가치 추구로 진화한다.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며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 같은 생각에 토를 달 이유는 없다. 불행감은 사람을 이지러지게 만들고 건강에도 좋지 않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시간과 비용과 에너지는 삶을 활력 있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행복인가 하는 대목에서 막연해진다. 재미 추구, 의미와 가치 추구가 행복 자체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순간도, 뭔가 보람을 느끼는 일에 참여해도, 집요하게 ‘남는 부분’이 있다. 그 남는 부분의 영향력이 크다. 극도의 행복감보다 더 강력하게 삶을 쥐고 흔드는 요소인 것도 같다.

나는 그 남는 부분을 텅 빈 우물이라고 표현해본다. 텔레비전 연속극의 단골소재인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이 나에게도 있다면 그것은 텅 빈 우물을 품고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남들은 안 그럴까?) 텅 빈 우물은 떠 마실 물도 없고 얼굴을 비춰볼 수도 없다. 우물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 멍멍한 메아리만 되돌아온다. 텅 빈 우물은 텅 비어서 캄캄한데, 그 캄캄함만큼 분명한 실재감이 느껴진다. 어디를 가고 어떤 곳에 있어도 텅 빈 우물은 사라져주지 않는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텅 빈 우물에 가슴을 담가놓은 채 얼굴과 두 팔 두 다리를 바깥세상에 휘저으며 살아간다. 뭐 이런 것이다.

꽃이 피었다, 꽃은 피었다

클라라 하스킬의 피아노 연주 모음집을 틀어놓고 있다. 하스킬의 연주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금세 산속 옹달샘 물처럼 맑고 청아한 음색이 떠오를 것이다. 대부분 할머닛적 모습으로 사진이 남아 있는 그녀는 몸이 구부러지는 척추장애를 안고도 천상의 순수를 건반 위에 구현했다. 사진은 할머니지만 하스킬은 언제나 소녀풍이다. 조금 전까지 1951년에 녹음된 스카를라티 소나타가 흘러나왔다. 스카를라티의 독주곡들은 호로비츠가 피아노용으로 발굴하다시피 했다. 하프시코드 곡으로 숨어 있던 것을 호로비츠가 피아노 독주회 단골 레퍼토리로 삼으면서 유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차이라니. 고역에서 물방울 튕기는 느낌은 같지만 하스킬의 연주는 호로비츠보다 순하디 순하다. 과잉이 절제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짜릿짜릿하게 다가오는 호로비츠의 초절정인가, 하스킬의 여리고 민감한 느낌인가, 그것은 듣는 사람의 기질이 선택한다.



스카를라티에 이어 흘러나오는 연주가 좀 웃긴다. 파울 자허가 지휘하는 빈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이 흐르는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생판 다른 느낌으로 따로 논다. 하스킬은 언제나처럼 겉치레 없이 간결하고 섬세하게 건반을 매만지고 있다. 반면 지휘자가 자아내는 선율은 뭐랄까, 트로트 가요의 꺾기 같은 신파라고나 할까. 감정을 잔뜩 집어넣어 구성지고 애달픈 느낌을 만들려고 애쓰는 듯 다가온다.

소리의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이 이렇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가령 이것이 ‘꽃은 피었다’로 표현되어보라. 그것은 신파다. ‘꽃이’와 ‘꽃은’ 사이에서 비장한 서사와 느끼한 신파가 갈린다. 엄청난 차이다. 김훈이 설명하고 문학기자 손민호가 주석을 단 이 견해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연주나 노래에서도 바로 이 같은 차이가 흔히 생겨난다. 호흡을 끊어야 할 때 끊지 못하고 좀 더 끌다보면 ‘꽃은 피었다’ 같은 연주가 된다. 문학에서 신파는 철저히 배척받는 반면 클래식 음악에서 신파의 통속적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좋은 연주로 사랑받는 경우가 제법 있다. 어쨌거나 하스킬과 자허는 기질이 다른 사람임이 분명하다. 연주회가 끝나고 나서 하스킬은 새침한 얼굴로 뒤도 안 돌아보고 총총히 가버렸을 것이다. 냉대를 받은 파울 자허가 화를 냈을까?(내 멋대로 해본 상상이다.)

호로비츠는 여든 살 너머 죽기 직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한 정력가였다. 스위스 지휘자 파울 자허는 아내가 엄청난 부호여서 남편을 위한 별도의 오케스트라를 설립해주기까지 했다. 아, 그러고 보니 호로비츠의 부인도 세기의 마에스트로 토스카니니의 딸이다. 자허의 부인 못지않았을지 모른다. 하여간 내 멋대로의 상념을 조금 더 이어보자. 호로비츠나 파울 자허 같은 사람은 쓸데없이 거치적거리는 ‘텅 빈 우물’ 따위는 가슴에 지니지 않고 살았을 것 같다. 호로비츠의 피아노 소리는 바늘구멍만큼도 빈틈이 없고 자허의 선율은 구성지고 슬픈, 그러니까 넘쳐서 부글거리는 기름기 많은 도가니탕이다. 그래서 빈 데가 없다. 그렇다고 그 점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정력가나 도가니탕은 빈 우물의 일원이 아니다. 아마 당사자들도 별로 원치 않을 것이다.

75㎞ 구간에서의 ‘스윽~’

생김새나 기질은 중립적이다. 잘생기고 못생기고는 가능하지만 올바르게 생겼다거나 옳지 않게 생겼다는 윤리적 판단이 외모에 있을 수 없다. 옳은 기질과 옳지 않은 기질을 분별하는 것 역시 편견의 산물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의 생겨먹은 꼴에 자꾸만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 올바르게 생겨먹지 못했다는 자책감. 가슴에는 망망한 텅 빈 우물이 들어차 있는데, 그래서 허덕이는데, 내 행동, 내 삶의 방식은 호로비츠의 과잉을, 파울 자허의 신파를 닮았다. 그거 아시는가? 울고 싶은데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 하늘로 치솟는 기분인데 땅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육신, 정의로움을 주장하는데 사악한 충동이 속에서 이글거리는 마음. 작업실은 그러니까 숨어서 자기를 감출 수 있는 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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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시인,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연재

김갑수의 ‘지구 위의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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