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는 스스로 체득한 건강의 지혜로 조선 최장수 왕이 됐다.
비록 여든이 넘도록 장수했지만, 영조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약을 달고 산 ‘국민 약골’이었다. 조금만 찬 음식을 먹어도 배탈이 났고 소화불량에 시달렸으며 복통 때문에 소변을 보기 어려워하던 소년이었다.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그렇던 그가 83세라는 천수를 누렸다는 건 미스터리에 가깝다. 대체 그의 건강 비결은 무엇일까. 건강 체질을 타고난 걸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가꾸고 양육한 걸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밝혀가는 과정이 바로 ‘왕의 한의학’을 연재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실천으로 옮긴 건강 지혜
영조의 장수와 건강 비결을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자기의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몸의 어떤 부분에 어떤 약점이 있는지 파악해 이를 염두에 두고 과부하가 걸리진 않는지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24시간 변화를 관찰하면서 신체의 약점을 알고 과부하의 경계치를 관찰하는 데는 자기 자신이 최고 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영조는 평생 복통과 소화불량 등 냉기에 민감해했다. 자신이 냉증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한평생 차가운 자리에 앉지 않고 찬 음식을 멀리하는 등 온기 보존에 신경 쓴 것은 철저한 자기 관찰의 결과다.
둘째, 자신을 냉정하게 주시하면 병이 자기 몸에서 가까이 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잘 알고 무엇을 할 것인지 방법론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영조는 ‘인삼 마니아’였다. 여러 번 처방을 실험한 후 인삼을 대량으로 넣은 건공탕을 상복해 건강을 유지했다.
현대는 건강지식 홍수 시대다. 많은 사람이 신체 관리를 위한 전문지식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팔랑귀가 된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의 심오함이다. 건강 지식이 자신의 신체 상황과 맞아야 하는데도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처럼 맹신하는 데서 문제가 불거진다.
예를 들면 우유나 인삼의 경우가 그렇다. 우유가 보급되자 과학적 분석을 통해 모유보다 더 풍부한 영양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한때 모유보다 우유를 선호했지만, 나중에 모유 성분 가운데 면역 효소나 기분을 좋게 하는 성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우유 우위설이 자취를 감췄다. 인체의 심오함을 단편적 지식의 틀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증한 예다. 인삼도 마찬가지다. 체질에 맞지 않으면 열이 나거나 혈압을 높이는 등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신의 체질 특성과 견줘보고 관찰해서 무엇이 몸에 맞고 맞지 않는지 진실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셋째, 건강의 지혜를 실천하는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모자란 듯 음식을 먹으면서 새롭지는 않으나 지혜로운 지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작은 노력으로 크게 건강을 얻고자 게으름을 부린다. 하지만 영조는 술을 거의 먹지 않고 아무리 바빠도 밥을 제때 챙겨 먹으면서 자신만의 노력으로 건강의 지혜를 체득했다.
대다수 왕이 선대 왕을 여읜 슬픔에, 혹은 힘겨운 장례절차 와중에 건강을 잃어버린 반면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 사건 앞에서도 곡기를 끊거나 반찬 수를 줄이는 감선(減膳)을 하지 않았다. 삶을 이어가기 위한 에너지 보급과 권력투쟁을 철저하게 구분짓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국가적 위기상황이나 신하들과의 갈등 때 반찬 수를 줄이거나 단식투쟁을 했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투쟁의 근본 목표에 부합한 것에만 충실했을 뿐 투쟁 그 자체에 매몰되진 않았던 영리한 왕이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왕이 되기까지의 행보가 여간 험난하지 않았다. 그의 출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설이 나돌았다.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었다. 많은 야사(野史)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추정하면서 영조를 바라본다.
못 말리는 ‘인삼 마니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영조의 체질은 특이한 데가 있다. 그는 83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인삼이 든 처방을 애용했다. 심지어는 말년 10년 동안 복용한 인삼이 100근이나 될 정도였다. 그의 풍성한 수염은 아버지 숙종의 풍모와 전혀 달랐고 오히려 숙빈 최씨에 가까웠다. 이것도 그가 김춘택의 아들로 의심받는 한 이유가 됐다.
성격도 아버지 숙종이나 이복형 경종, 아들 사도세자, 손자 정조와 전혀 달랐고 질병의 양상도 이들과 달랐다. 조선시대 왕들은 무장인 이성계의 혈통을 이어받아 대개 불꽃같은 성질을 보이거나 화병을 앓았다. 심지어 화가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종기를 앓다 죽는 경우가 많았다. 숙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 14년 7월 16일 기록엔 “이때에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어지지 않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번뇌가 심하다”고 쓰여 있다. 극도의 화병을 호소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