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3>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부분 그림. <그림 4> ‘조선 복식을 입은 남자’의 복원 그림.
루벤스 소묘의 주인공을 조선인으로 보는 또 다른 증거는 ‘조선 철릭’이다. 곽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복식사학자 석주선 선생의 견해를 인용한다. 하지만 이 옷은 깃이 넓고 동정이 없어 조선 철릭이라기보다는 같은 시기 예수회 선교사 니콜라스 트리고나 마테오 리치가 입던 중국 철릭에 가까워 보인다. 목깃에 달린 얇은 동정이 조선 철릭의 특징인데, 소묘 속 동양인이 입은 철릭에는 동정이 없다. 만약 관모와 복식이 조선인의 것이 아니라면 이를 근거로 소묘 주인공을 조선인으로 보는 주장은 근거를 잃게 된다.
또 하나. 루벤스의 소묘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애당초 루벤스가 완성한 소묘 작품은 현재 상태보다 조금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무슨 이유에선지 가장자리를 잘라내고 크기가 줄었는데, 그 증거는 작품의 가장자리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소묘의 가장자리에는 상하좌우에 테두리 선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테두리 선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테두리 선을 넘어 종이 끝까지 소묘 선들이 진행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 하단부도 똑같이 잘려나갔다. 좌우는 절단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소묘의 주인공이 쓴 관모는 각이 진 방건 형태가 아니라 높이가 훨씬 더 올라가는 원통형이며, 빈 제단화의 동양인이 머리에 쓴 관모와 동일한 형태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에 터 잡아 복원하면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그림 3, 4). 곽 교수는 소묘 작품의 상하단 디테일을 흘려보거나 놓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자신의 ‘방건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시했을 수도 있다.
방건과 조선 철릭이 조선인이라는 주장의 근거라면 루벤스 소묘의 모델은 조선인이 될 수 없다. 조선인이 어쩌다 이국의 복식을 입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같은 논리로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사람이 그랬을 가능성도 똑같이 존재하기에 이런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그림 5> 국립중앙박물관 걸개그림.
그림의 주인공이 조선인이 아니라면 그가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도 없다. 하지만 곽 교수의 주장대로 1607~08년 루벤스가 로마에서 조선인 안토니오를 만나 모델이 돼달라고 요청하고 소묘 작업을 했다는 추리가 성립하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돼야 할까.
루벤스에게 1607~08년은 로마 키에사 누오바 교회의 발리첼라 제단화 수령 거부, 교회 주제단부 장식 프로그램의 전면적 수정과 재작업, 또한 건강과 재정 문제로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장차 10년쯤 뒤에 안트베르펜 예수회 교회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제단화 주문에 대비해 △예수회 선교활동을 벌이던 인도, 중국, 일본을 대표할 인물상을 모색하고 △유럽에서 모델을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중국인은 제쳐놓고 △예수회 선교와도 상관없고 외교관계도 없어 유럽 전체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조선인을 굳이 수소문해서 안토니오를 찾아낸 뒤 △그에게 혹시 동양의 고관대작이나 외교 관료, 고위 성직자가 걸칠 만한 의관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고 △의관을 정제해 초상 소묘의 모델로 서줄 것을 요청하고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도 상당한 모델료를 지불했다.
또한 안토니오는 왜구에게 납치돼 노예로 팔린 뒤 파란만장한 역경과 거친 역사의 파고를 넘나들면서도 자신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황금색 비단 철릭과 사치스러운 이국풍 가죽 신발, 높은 관모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플랑드르 화가의 모델을 설 때 요긴하게 활용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럴 수 있었을까. 곽 교수의 추리는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이 수차례 중첩됨으로써 논리의 개연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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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루벤스의 동양인 모델은 1617년경 안트베르펜 또는 인근 도시를 방문한 예수회 선교 관련 인물이거나 외교사절의 일원이 아닐까. 복식사 연구와 문헌 연구가 더 축적되면 언젠가 실마리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한다. 루벤스의 동양인 모델이 400년을 건너뛰어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에 대문짝보다 더 큼직하게 걸린 자신의 초상을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다(그림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