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개치마 여인과 앳된 양반의 애틋함
윗부분 볼록한 ‘월하정인’의 달, 월식 주장도
가부장제 위선, 에로티시즘…과감한 도전
신숙주 동생 11대손, 본명은 가권(可權)
미스터리한 혜원의 비밀…소설·영화로 재탄생
보물 제1973호 신윤복의 ‘미인도’. [문화재청 홈페이지]
美人圖와 月下情人의 매력
아담한 얼굴에 작은 아래턱, 좁고 긴 코에 다소곳한 콧날, 약간 통통한 뺨과 작은 입, 흐릿한 실눈썹에 쌍꺼풀 없이 가는 눈, 가녀린 어깨선과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치마, 치마 밑으로 살짝 내민 왼쪽 버선발….신윤복의 미인도(18세기 말~19세기 초)는 보는 이를 설레게 한다. 신윤복은 화면에 이렇게 적었다. ‘盤礡胸中萬化春 筆端能與物傳神(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여물전신)’. 그 뜻을 풀어보면 이렇다. ‘가슴속 깊은 곳에 서려 있는 춘정, 붓끝으로 능히 그 마음 전하도다.’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과 아련함이 묻어나는 눈빛. 이 여인의 눈은 작고 쌍꺼풀이 없다. 요즘엔 쌍꺼풀 있는 큰 눈을 좋아하지만, 조선시대엔 쌍꺼풀 없는 작은 눈을 미인의 눈으로 여겼다. 머리엔 큼지막하게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이런 머리를 트레머리라고 한다. 일종의 장식용 가발이다. 조선 후기엔 부녀자들 사이에서 이 트레머리가 크게 유행했는데 그 사치가 너무 심해 영조는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여인의 저고리는 짧고 치마는 배추포기처럼 부풀어 있다. 여인은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채 옷고름에 달아놓은 삼작노리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노리개는 한복 저고리의 고름이나 치마의 허리에 다는 장신구를 말한다. 장신구를 다는 술이 하나면 단작노리개, 술이 세 개면 삼작노리개라고 한다.
그림 속 여인은 누구일까. 전문가들은 일단 기생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기생이든 아니든 그 우아함과 품격은 대단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미인으로 생각했는지, 당시 여인들의 패션은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국보 제135호 신윤복의 ‘월하정인’. [문화재청 홈페이지]
초승달인 듯 어스름 달빛 아래 담 모퉁이에 숨어 한 쌍의 남녀가 밀애를 나누고 있다. 쓰개치마를 쓴 젊은 여인과 초롱을 들고 허리춤을 뒤적이는 총각. 총각은 수염도 나지 않은 앳된 양반이다. 밀회를 즐기기 위해 의관을 정제했는데 어딘가 서툴러 보인다. 어색하고 쑥스러워하는 표정에서 그의 연정이 더 애틋하기만 하다. 여인은 총각보다는 다소 여유가 있어 보인다. 여인이 입은 저고리는 삼회장이다. 소매 끝동, 깃, 고름을 자주색으로 꾸민 삼회장 저고리. 고급스러운데다 멋스러움이 여간 아니다.
남녀의 얼굴엔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애틋한 정이 넘쳐흐른다. 뽀얀 얼굴에 붉은색 입술, 옥색 치마와 흰색 속바지, 자주색 신발과 저고리 소매 끝 등 옥색, 흰색, 자주색이 어우러지면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여기에 여인의 속바지와 신발 코의 곡선 또한 관능미를 자극한다. 신윤복은 여기에 한 편의 시를 적어 넣었다.
‘달은 기울어 삼경(밤 11시∼새벽 1시)인데/ 두 사람의 속마음이야 두 사람만 알 뿐’(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아닐 수 없다.
화면은 은근하면서도 에로틱하다.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조선시대 그림 가운데 이보다 더 매력적인 작품이 또 어디 있을까. 달밤에 밀애를 나누는 남녀의 정념(情念)이 은근하면서도 농염하다. 조선시대 통행금지에 대한 긴장과 정적, 그 이면에 꿈틀거리는 인간의 욕망이 기막힌 대비를 이룬다.
또한 신윤복은 감추기와 훔쳐보기를 절묘하게 살려냈다. 그림 속 담장은 일자(一字)가 아니라 꺾여 있다. 그림에 담 모퉁이를 등장시켰고, 두 남녀는 꺾여 있는 곳 모퉁이 한쪽에 있다. 모퉁이 반대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두 남녀가 남의 눈을 피해 숨어 있다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까. 신윤복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을 택했다. 부감의 시선은, 두 남녀의 은밀한 행동을 위에서 훔쳐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신윤복은 이 그림을 통해 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 사람들 특히 양반과 기생의 유희와 연애를 가감 없이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해 냈다.
신윤복이 여자였다?
신윤복은 이렇게 월하정인, 미인도 같은 그림을 그렸다. 월하정인은 국보 135호 신윤복 풍속도화첩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하나. 이 화첩엔 단오풍정(端午風情), 상춘야흥(賞春野興), 춘색만원(春色滿園), 홍루대주(紅樓待酒) 등 우리 눈에 익숙한 풍속화 30점이 들어 있다. 주로 남녀(양반과 기생)의 연애와 유흥 문화를 그린 것들이다. 미인도는 보물 1973호로 지정돼 있으며 모두 서울 성북구 소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신윤복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758년경 태어나 1813년 이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과 그가 남긴 그림뿐이다. 신윤복의 자(字)는 입보(笠父)고 호는 혜원이다. 입보는 ‘갓을 쓴 사내’라는 뜻이고, 혜원은 ‘난초가 있는 정원’이라는 뜻이다. 이원복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연구 결과, 신윤복의 본명은 가권(可權)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윤복은 예명(藝名)일지도 모른다.
신윤복은 고령 신씨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의 11대손이다. 신말주는 단종에 대한 충성심과 곧은 절개 덕분에 조선시대부터 명망이 높은 인물이다. 신윤복은 명문가의 후손이었고,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화원(畫員)이었다. 화원은 왕실 직속으로 또는 도화서(圖畫署)에서 그림을 그리던 직업 화가를 말한다.
신윤복에 대한 정보는 이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오히려 소설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 같다. 2007년, 2008년 김홍도와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한 팩션 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바람의 화원’이나 ‘색, 샤라쿠(色, 寫樂)’ 같은 소설이었다. ‘바람의 화원’은 같은 이름의 TV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신윤복을 소재로 한 영화(‘미인도’)도 개봉했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과 드라마, 영화가 대부분 신윤복을 여자로 설정했다는 사실이다.
미인도를 향한 긴 행렬
2008년 10월 ‘미인도’를 보기 위해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 [동아DB]
또한 “신윤복이 애초 화원이었지만 너무 에로틱한 그림을 그려 화원의 품위와 위신을 추락시켰다는 이유로 도화서에서 추방됐다”고 보는 이도 있다. 모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추정이 아닐 수 없다. 정보 부족의 빈 공간을 채우고 싶어 하는 상상력의 산물인 셈이다.
어쨌든 2008년 영화 ‘미인도’가 개봉하면서 관심은 크게 늘어났다. 당시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기획전에 미인도가 출품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간송미술관 입구엔 관람객들이 몰려 수백m씩 길게 줄을 서기도 했다. 새롭게 등장한 간송미술관 전시 관람 풍경이었다.
신윤복과 미인도를 향한 사람들의 긴 행렬. 물론, 신윤복이 여자였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실 신윤복이 남자라는 건, 그의 자(字)인 ‘입보’에서 이미 드러났다. ‘갓 쓴 사내’라는 뜻이니 당연히 남자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미인도가 여자 신윤복의 자화상일 수 있다는 얘기에 솔깃한다. 누군가는 지나치다고 말하겠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보는 이, 듣는 이를 즐겁게 한다. 나아가 사람들에게 미인도를 직접 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소설가의 상상력과 대중문화가 신윤복의 미인도를 다시 보게 한 것이다.
미술사가의 달 vs 천문학자의 달
월하정인에는 달이 등장한다. 몸통은 모두 사라진 채 윗부분만 볼록하게 살짝 남아 있는 달. 초승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미술사 전공자들은 이를 초승달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윗부분만 볼록하게 남았으니, 월하정인 속의 달은 마치 여인의 아름다운 눈썹 같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신윤복이 이토록 고품격 그림을 남겼으니 거기 그려 넣은 달 또한 문학적 낭만적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미술사 전문가들 사이에선 신윤복의 달을 은유적 문학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일반적이다.그런데 2011년 7월 흥미로운 뉴스가 나왔다. 천문학자 이태형 당시 충남대 겸임교수가 월하정인의 달의 실체와 그림 제작 시기를 밝혀냈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견해를 요약해 보자.
“그림에 나오는 달은 위로 볼록한 모양이다. 밤에는 태양이 떠 있지 않아 달의 볼록한 면이 위를 향할 수 없다. 달이 지구 그림자에 의해 가려지는 월식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림 속 월식은 부분월식이다. 지구 그림자가 달 아랫부분만 가리고 지나가는 부분월식이다. (…) 신윤복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활동했다. 그 100년 동안 일어난 월식 가운데 서울에서 관측 가능한 부분월식을 조사한 결과, 1784년 8월 30일과 1793년 8월 21일 두 차례 그림과 같은 부분월식이 있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 등 당시 기록을 확인해 보니 1784년에는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서울에 비가 내렸다. 따라서 이때는 월식을 관측할 수 없었다. 1793년 8월 21일에는 오후까지 비가 오다 그쳤기에 월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결국 신윤복은 1793년 8월 21일 밤 11시 50분경 부분 월식을 보고 이 작품을 그린 것이다.”
천문학자의 시각은 완전히 달랐다. 미술사가에겐 그 달이 초승달이거나 문학적 은유였지만, 천문학자에겐 부분월식 중인 달이었다. 월식 시점이 1793년 8월 21일 밤 11시 50분경이라고 하니, 신윤복이 그림에 적어 넣은 ‘밤은 깊어 삼경인데’라는 구절과 잘 어울린다. 천문학자는 신윤복에 관한 미술사가들의 생각을 통렬하게 뒤집어 버렸다. 당시 신문과 방송은 이 소식을 모두 주요 뉴스로 다루었고, 호사가들 사이에선 커다란 화제가 됐다.
물론 궁금증이 남는다. 1793년 8월 21일 밤 11시 50분, 신윤복이 한양에서 이 달을 보았다는 말인데, 과연 그 증거가 있는 것일까. 반론이 터져 나왔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 알 수는 없지만, 천문학자의 주장이 흥미진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신윤복의 그림은 천문학자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천문학자의 탐구는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호기심이 호기심을 낳았고 논란이 논란을 증폭시키면서 우리는 점점 더 신윤복 그림에 빠져들었다.
금기에 대한 도전
그럼, 소설가, 영화감독, 천문학자는 왜 이렇게 신윤복과 그의 그림에 몰입하는 것일까. 그건 신윤복의 인물화, 풍속화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조선시대 그림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작품이었다. 신윤복 그림에는 여성이 등장한다. 신윤복은 조선시대 여성을 화폭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시킨 첫 화가였다. 신윤복 이전에도 간혹 풍속화에 여인이 등장했지만 대개 노동하는 여성이었다. 신윤복은 달랐다.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라, 욕망과 낭만의 주체로서 여성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욕망과 에로티시즘을 상징하는 기생을 등장시킨 것이 그런 맥락이다.신윤복은 수묵(水墨) 단색 중심의 그림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색을 넣었다. 조선시대에 이처럼 아름답고 화사하게 색을 구사한 화가는 없다. 색채 감각에 있어 신윤복은 단연 독보적이다. 신윤복은 색을 다시 발견한 화가였다. 또한 신윤복은 조선시대 패션의 모든 것을 그림으로 남겼다. 신윤복은 그림을 그리면서 사람들의 옷차림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각별히 신경을 썼다. 놀라울 정도로 패션의 디테일을 잘 살렸다.
신윤복은 왜 이렇게 기생과 여성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일까. 왜 대담하게 에로틱한 그림을 그린 것일까. 관련 기록이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이에 대해 무어라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추론은 가능하다. 첫째, 신윤복의 개인적 취향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사회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일부러 기생과 양반의 유흥을 그렸을 수도 있다. 남성과 양반 중심 가부장제의 위선을 그림으로 폭로하고 비판하려 한 건 아닐까.
신윤복은 여성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이끌어냈고, 욕망과 에로티시즘을 감추지 않았고, 색과 패션을 그림으로 구현했다. 신윤복의 미술은 시종 파격과 실험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시대의 금기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늘 새롭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
조선시대 화가로서의 신윤복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었다. 그렇기에 탐구할 거리가 많고 우리의 호기심을 끝없이 자극한다. 그런데 신윤복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다. 우리 시대의 상상력이 작동하기에 제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신윤복을 여성으로 상상해 보기도 하고, 그림 속 달이 초승달인지 월식인지 탐구해 보기도 한다. 소설가든 영화감독이든 천문학자든 상관없다. 누구나 신윤복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다.신윤복의 그림은 다양한 상상력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천문학자와 미술사가의 견해가 부딪쳐도 좋다. 소설가와 영화감독의 상상력이 너무 멀리 가도 괜찮다. 그 덕분에 신윤복의 그림은 또 다른 스토리를 얻게 된다. 그 충돌과 간극은 외려 신윤복 작품이 명작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셈이다.
명작은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탐구하게 만든다. 기존의 생각을 의심하도록 한다. 그래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명작은 쉼 없이 소란을 일으킨다. 그 소란은 다양한 생각을 배양하는 토양이 된다. 신윤복의 그림은 이렇게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손 안의 박물관’‘한국의 국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