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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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의 성단에 도착한 파동은 곧바로 개체성을 버리고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고단했던 그의 마지막 여정은 그렇게 의미 있게 마감됐지만 대신 새로운 추격자가 된 으름스는 광활한 우주를 떠돌아야 했다.으름스는 행성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한 이탈자에겐 관용을 베풀었다. 문제는 성간 이동을 하며 생태계를 교란하거나 섭동파로 발전 가능한 시공 균열을 일으키는 자들이었다. 자비 없는 신생 추격자는 그런 자를 가차 없이 소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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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
인과 황을 주재료로 세워진 호아 문명의 건축물은 마치 미로처럼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마침내 행성 지하 전체를 정교하게 연결한 상태였다. 행성을 순시하던 으름스는 지하문명 남반구의 한 도시에서 아주 특이한 호아와 마주쳤다. 석화된 마그마를 다시 용융시켜 다양한 기자재 틀로 제조하는 기능공이었던 그 호아는 불을 다루다 실수로 파동을 사용했다. 이를 우연히 감지한 으름스는 여러 단계 육화를 거쳐 상대에게 접근해 갔다.
단숨에 해당 호아를 소멸시키려던 으름스는 망설였다. 호아의 울림대에서 발신되는 고주파 진동을 이탈자의 파동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으름스는 상대 주변에 머물며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느 날, 으름스는 상대가 오히려 자신을 관찰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호아의 음료인 가스화된 탄소를 권하며 상대에게 다가간 으름스가 물었다.
“지열이 높아지고 있는데 힘들지 않은가?”
으름스를 향해 더듬이를 곤두세운 상대는 가스를 흡입한 뒤로도 아주 오랫동안 답이 없었다. 침착하고 무심했다. 으름스는 상대가 이탈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쾌락주의자인 그들은 행성 역사에 스며들기보단 개입하기 일쑤였는데 일단 육화한 이상 결코 관찰자로만 머물진 않았다. 행성 지하 귀퉁이에서 풀무질로 한 생을 보낼 이탈자는 없었다. 으름스가 다시 물었다.
“심심하지 않은가? 그렇게 불만 다루며 사는 거?”
더듬이를 떨어 신경 쓰지 말라는 표시를 한 상대는 다시 용융기 앞에 앉았다. 뒤돌아선 으름스가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려고 숙주를 막 벗어나려는 순간 상대가 슬쩍 한마디했다.
“용융기술자라 우습게 보진 말라고! 삶은 다양한 거야.”
상대 말을 심상히 여긴 으름스는 살며시 파동으로 전환해 도시를 벗어났다. 그렇게 북반구를 향해 가던 도중 그는 문득 의혹에 휩싸였다. 시각이 퇴화한 호아 종족에겐 ‘보다’라는 동사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으름스는 차원 이동을 감행해 행성의 미래를 열람했다. 이탈자가 특정됐을 때만 허용된 조사 방식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행성 남반구가 문제였다. 으름스가 순시하던 시공 좌표로부터 35차례 공전 주기가 끝난 미래에 대폭발이 발생했다. 상대가 이탈자라면 대폭발로 사라질 도시의 최후를 감상하고 있던 셈이었다. 전형에서 벗어난 특이한 행동 패턴이었지만 이탈자가 분명했다. 으름스는 곧바로 대폭발 직전 문제의 도시로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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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중심부로부터 솟구치는 마그마 탓에 지열은 더욱 높아져 있었고 비극을 예감한 일부 호아족은 이주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상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태연하게 풀무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육화한 상태로 다가선 으름스가 파동을 가속하며 물었다.“왜 도주하지 않나? 지난번 내가 육화에서 벗어날 때 추격을 눈치챘을 텐데?”
비스듬히 몸을 돌린 상대가 천천히 대답했다.
“가스 선물했을 때 얘기야? 흥! 난 네가 날 관찰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어. 추격자치곤 흥미로워 조금 놀아준 거야.”
상대를 소멸시킬 기세로 가속을 증강하던 으름스가 다시 물었다.
“도주하지 않은 건 자멸하기 위해서인가?”
상대가 음역대 최고 높이로 웃은 뒤 느긋하게 대답했다.
“자멸? 내가 왜? 너 같은 애송이 추격자한테? 어차피 속도에서 넌 날 못 따라와. 조금 멈추고 얘기나 하지?”
으름스가 파동 공격을 망설이자 상대가 두껍게 각질화된 피부를 더듬이로 긁으며 말했다.
“앉아봐. 이것도 운명 아냐? 앞으로 계속 날 추격할 텐데 뭘 서둘러? 아비를 꼭 닮았군!”
가속을 멈춘 으름스가 상대 앞에 앉으며 물었다.
“아비?”
“그래 아비. 네 파동을 감지하자마자 바로 알았어.”
“뭘 알았나?”
“익숙한 파동이었어. 그 녀석 참 집요하게 날 쫓았거든. 속도가 많이 느려졌던데…, 혹시 못 만났어? 은퇴했겠지?”
으름스는 상대 더듬이가 좌우로 흐느적대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말을 잃었다.
“만났어? 만났는데 몰라본 거야? 멍청하긴! 들어봐. 네 아비는 운이 없었어. 하필 전성기인 날 쫓았거든. 그래도 즐거웠어. 그 독특한 파동 궤적은 잊지 못하지. 그게 너한테도 있어! 아직 차원 이동 초보지? 이건 정말 재밌는 우연이야!”
들떠 있는 상대가 온몸에서 탄소 가스를 뿜으며 계속 속삭였다.
“삶은 즐거운 거야. 우리가 육체로 존재했던 때를 잊지 마. 우리도 몸에서 출발해 진화했다고! 행성에 해 끼치지 않으며 얼마든지 놀 수 있어. 아비처럼 살진 마. 아, 물론 실컷 전생윤회하다 마지막엔 네 손에 사라지겠어. 끝까지 포기하지 마. 난 운명의 추격자를 만났고 절대 쉽게 잡히진 않아. 명심해! 아쉽지만 난 먼저 떠날 테니 바로 추격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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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남반구의 반 이상이 초토화됐다. 대기권에 머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추격자 으름스는 비욱과 자신이 만든 자손들을 떠올렸다. 유전적으론 호쿄묘사의 씨앗이었지만 그들을 있게 한 장본인은 바로 그였다.파동 특성을 통해 기억 저편 육체로 존재했던 시절의 혈연 계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으름스도 알고 있었다. 다만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 육체를 벗어나 영생을 얻은 순간 이전 기억은 무의미했고 육체로 인해 맺어진 관계 역시 그러했다. 무한한 영적 삶에 가족이라는 기원은 불필요했다.
으름스는 이탈자가 마지막에 했던, 언젠가 자신을 제거할 운명의 추격자를 만난 것 같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 운명이 아버지가 준 운명이기도 하겠다고 느낀 그는 가만히 속삭여보았다.
“아빠.”
윤채근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