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호

이선경의 讀書, 督書, 毒書

내가 먼저 권하는 술

  • 이선경 | 문학평론가 doskyee@daum.net

    입력2017-03-07 11: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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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新) 술 권하는 사회

    우리는 여전히 술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고, 함께 취해야만 유지되는 음주 공동체 문화가 더 이상 노골적으로는 강요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곁에는 언젠가부터 불금이라면 0칼로리인 치맥의 유혹과 퇴근길 힐링인 혼술의 당당함이 들어서더니, ‘책맥’이라는 새로운 독서 혹은 음주 형태까지 등장했다. 책을 보면서도 맥주를 마시는 애주가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맥주를 마실 때조차 책을 놓지 못하는 책벌레라고 해야 할지. 술을 권하는 방식은 그 유형과 이유에서 나날이 더 정교해지고 세련돼지고 있다.

    독서와 음주의 컬래버레이션까지 등장한 신(新) 술 권하는 사회에서, 책은 술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술로부터 출발한 책이나, 책에 등장하는 술이나, 독자의 음주 욕구를 자극하는 물리적 컬래버레이션은 많다. 그러나 술과 책이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는 드문데, 그것은 취한 이후까지 책임지는 책이 많지 않아서다.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가 새로운 음주 문화 시대에 각광받는 것은, 무슨 술을 어떻게 마시냐보다는 취한 이후의 추함을 통해서야 드러나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선 주정뱅이라는 말부터 생각해보자. 이 책에 수록된 어떤 단편소설의 제목도 아닌, 심지어는 소설 속에서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 주정뱅이라는 단어는 이 책 속 음주인들을 싸잡아 규정하는 말이다. 사실 음주인을 양과 빈도와 자제력의 강도에 따라 양호에서 불량의 단계로 구분한다면 ‘애주가–술꾼 혹은 주당–알코올중독자’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음주 계급에 ‘주정뱅이’는 포함되기 힘들다. 술을 마신다고 누구나 주정을 부리지는 않으며, 주정이란 음주하는 자세와 태도의 문제라기보다 음주 후의 결과나 여파에 가깝기 때문이다.



    # 음주인의 주정(酒酊)법

    우선 ‘애주가’들은 주로 혼자 마신다. 그들에게는 술 그 자체의 맛 혹은 술이 만들어내는 어떤 분위기가 가장 중요하다. 사실 이 소설집에서 애주가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는데, ‘이모’의 주인공 이모는 거의 유일하게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 속에서 애주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루에 평균 5000원을 쓰는 미니멀한 삶을 추구하다가 매주 일요일 저녁 딱 한 번만 소주 한 병을 약간의 사치스러운 안주와 즐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결과적으로는 주정뱅이다. 인생에 단 한 번이기는 하지만 대학 시절 취중진담으로 고백해온 동기 남학생의 손바닥을 우아하고도 무참하게 담뱃불로 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유일무이의 폭력적 주정 경험이 그의 60년 삶을 견디게 해준 원동력이 된다. 평생 미혼으로 살면서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희생을 강요당한 피해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인에게 가해자가 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요일 저녁마다 경건한 의식처럼 행해지는 그녀의 주정은 그 오래된 과거를 두고두고 곱씹는 것이다. 퇴근길에 혼술 없이는 귀가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주정뱅이들도 어쩌면 조용하고도 잔인한 방식으로 혼자만의 의식을 치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술꾼’은 대개 여럿이 어울려 마신다. 왁자지껄 모여서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양을 겨룬다. ‘삼인행’은 이혼을 앞둔 규, 주란 부부와 그들의 친구인 훈의 기묘한 삼각 알코올 로드트립이다. 그들의 음주는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다. 총 다섯 끼를 먹을 수 있는 1박 2일의 여행에서 매 끼니에 어울리는 술과 음식의 종류가 대중적 구미에 맞춰 치밀하게 짜여 있다. 예를 들면 야식으로는 지역 명물 수제버거에 맥주가, 다음 날 모닝커피에는 위스키가, 돌아가는 길에 들르는 유명인의 서명이 즐비한 황태해장국집에서는 소주가 말이다. 그렇다면 이 주당들이 모여서 어떤 주정을 부리는가. 당연히 이들은 대작을 하며 싸운다. 처리되지 않는 민원에 대해, 상대방의 생활 습관에 대해,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제3자의 태도에 대해. 타인에 대해 근거 없는 규칙이나 기대나 환상을 만들어놓고, 그 집착이 깨질 때 마음껏 주정을 부린다. 특히나 이 소설의 규를 비롯해 소설집 곳곳에는 음주 시 환각과 환청 증상이 동반되는 주정뱅이들이 매우 빈번히 등장한다. 명백함에 애써 눈 돌리며, 없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만들어낸다. 혼술 열풍에 휩쓸리는 무리가 각자의 삶에서 무언가를 외면하며 그 에너지를 음주에 쏟아부을 때, 각자의 방식으로 주정이 시작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독자’들의 주정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또는 교묘히 속일 줄 안다.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소설 ‘봄밤’에는 술 한 방울 못 마시는, 류머티즘을 앓는 남자와 술 없이는 못 사는 알코올중독자 여자의 지독한 러브스토리가 펼쳐진다. 더는 잃을 것 없는 두 사람이 한 요양병원에 머물며 사랑이라는 맹목 혹은 명목으로 서로를 극한의 상황으로 내몬다. 여자는 주기적으로 요양원을 탈출해 편의점의 값싼 술과 안주로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취하며, 남자는 그녀를 용인하며 또 안심시키기 위해 고통스러운 진통주사를 맞으며 견딘다. 전직 국어교사인 여자는 김수영의 시 ‘봄밤’을 고래고래 읊어가며 스스로 절제하고 있다고, 알코올 덕분에 유쾌한 생명감을 얻었다고, 자신과 남자를 속인다. 술을 안 마시는 남자도 술에 취한 여자도 자기기만이라는 주정을 부린다. 그래서 어쩌면 사랑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애절한 관계도 사실은 스스로를 간신히 속이며 만든 주정일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삶을 더 아슬아슬하게 만든다.

    이 위태로운 주정뱅이들이 정말 위험한 순간은 술기운이 점점 떨어지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깨어날 때다. 그 숙취의 시간에 어떤 출구를 마련할 것인가. ‘봄밤’에서 인용되는 김수영의 동명의 시에서는 지독한 금단증상에서 벗어나려 서두르지 말라고, 당황하지 말라고,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고 위로한다. 시인은 과음으로 인해 재앙과 불행과 격투라는 주정이 찾아온 것에 후회로 절제를 다짐한다.



    # 주정과 숙취를 두려워 말라

    그러나 1000년 전 이규보는 60년 전의 김수영보다 솔직하고 급진적이다. ‘봄 술이나 한잔하세’에는 일상적인 소재에 대한 이규보의 생각들이 발췌돼 있고,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술책 혹은 책술하는 고려시대 문인의 면모가 나타나 있다. 이규보의 숙취 해소법이 일관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러한 비일관성이 어쩌면 우리의 숙취 해소에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과격한 주정을 하고도 조금의 반성이나 후회도 하지 않았다. ‘미치지 않았다(狂辨)’에는 자신이 술에 취해 나체나 봉두난발을 하지도 않았으며 심신미약 상태도 아니었기에, 미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뜻은 올바른 자”였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나이가 지긋해지고 관직에 나아간 후에도 주정은 계속되고, 한번은 임금과의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등 주사를 심하게 부린다. 그러나 이 일로 벼슬자리가 위태로워지자 통렬한 공식 반성문으로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上崔相國書)’) 하지만 인생의 말미에 이르러 그는 다시 주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술을 마신다. 책의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한 편지글 ‘봄 술이나 한잔하세(與全履之手書)’에는 기억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는 이규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어울려 놀던 많은 친구가 이제 세상에 몇 남지 않았음에 대한 비애도 담겨 있는데. 봄기운을 빌려 술로 애상을 달래고자 친구를 회유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주정과 숙취에 오히려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 세상이 내게 술을 권하게 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세상에 술을 권하는 것.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세상이 권하는 술에 당당하고 뻔뻔하게 취해주자.

    봄밤이 온다. 봄 술이나 한잔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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