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력 수출품목 철강석(60년대)-섬유(70년대)-반도체(90년대)
- 30년간 서울지역 땅값 폭등? 물가상승 수준과 비슷
- 100대 기업 7개, 10대그룹 2개만 존속
- 1970년 이후 임금상승률, 물가상승률의 8배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달걀과 서울 시내버스 요금
건국 60년의 경제는 한마디로 ‘한강의 기적’으로 요약된다. 어느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는 경이적인 고도성장 기록은 한국민의 저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압축성장의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단적인 예다.
지난 60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 규모는 746배 성장했다. 6·25 전쟁이 끝난 해이자 통계작성 시점인 1953년 473억원(13억달러)에 불과하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007년에 901조1886억원(9699억달러)으로 커졌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바탕으로 급성장을 거듭한 한국 경제는 1997년 구조개혁기를 거치면서 성장률이 상대적으로 둔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제규모는 2006년 GDP 기준으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스페인, 캐나다, 인도, 브라질, 러시아에 이어 세계 13위 수준이다. 2004년엔 세계 11위였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 역시 1953년 67달러, 1963년 100달러 수준에 머물렀으나 산업화를 거치면서 1977년에 1000달러, 1995년에 1만달러, 2007년엔 선진국 진입 기준이라 할 수 있는 2만달러를 넘어섰다.
국제수지를 살펴보면 1950년 이후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까지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1998년 404억달러라는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한 이후로는 2007년까지 흑자행진을 지속하고 있다. 이에 따라 외환보유액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올해 6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은 약 2500억달러로 1960년 말의 1억6000만달러에 비해 약 1562배,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말의 204억달러에 비해서도 약 12배가 늘어났다.
경제규모가 급성장한 만큼 물가도 가파르게 뛰었다. 한국은행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건국 이후 60년간(1948~2008년 6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만배 이상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건국 직후 20여 년(1948~65년) 동안 정부수립, 전시(戰時)자금 및 경제개발자금 조달을 위한 통화 증발, 재정지출 확대 등의 영향으로 약 4000배(연평균 50%)나 급등했다. 물가는 유가 등 국제원자재 가격이 안정된 1986년경부터 안정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도 기술혁명, 세계화, 중앙은행의 독립성 강화 등의 정책에 힘입어 안정세를 유지해왔다.
단위 | 1953 | 1960 | 1970 | 1980 | 1990 | 2000 | 2007 | |
국내총생산(GDP) | 억달러 | 13 | 20 | 81 | 638 | 2637 | 5118 | 9699 |
1인당 국민총소득(GNI) | 달러 | 67 | 79 | 254 | 1645 | 6147 | 10841 | 20045 |
경제성장률 | % | 5.6 | 1.2 | 8.8 | -1.5 | 9.2 | 8.5 | 5.0 |
단위 | 1953 | 1960 | 1970 | 1980 | 1990 | 2000 | 2007 | |
농림어업 | % | 47.3 | 36.8 | 29.2 | 16.2 | 8.9 | 4.9 | 3.0 |
광공업 | 〃 | 10.1 | 15.9 | 19.6 | 26.4 | 28.1 | 29.8 | 28.3 |
전기·가스·수도업 및 건설업 | 〃 | 2.6 | 4.1 | 6.5 | 10.2 | 13.4 | 11.0 | 8.9 |
서비스업 | 〃 | 40.0 | 43.2 | 44.7 | 47.3 | 49.5 | 54.4 | 57.6 |
건국 당시의 물가와 현재를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발견된다. 1948년엔 달걀 1개 값이면 서울에서 버스를 5.5회 탈 수 있었다. 당시 달걀 1개의 가격은 24.8원(圓)으로 서울 시내버스 요금 4.5원(圓)의 5.5배. 그런데 2008년(6월 평균)에는 거꾸로 달걀을 5.5개 모아야 시내버스를 한 번 탈 수 있다. 달걀 한 개 값이 평균 163원,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 900원(현금 1000원)으로 역전된 것이다. 달걀은 60년 전에 비해 6572배(두 차례 화폐개혁으로 당시 1000圓이 지금의 1원과 같다)가 올랐지만, 서울시내 버스비는 달걀 상승분보다 3배 이상 더 올라 20만배가 됐다.
리터당 휘발유 가격은 1975년 168.07원에서 2000원 안팎으로 약 12배 상승했다. 사람들이 흔히 급등했다고 생각하는 서울지역 땅값은 의외로 1975년 이후 30년간 여타 필수품과 비슷한 수준(30배)의 상승에 머물렀다.
한국은 6·25전쟁의 폐허(왼쪽 사진) 속에서 60년 만에 세계 13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경제발전은 산업구조를 바꾸어놓았다. 농림어업의 비중이 크게 하락하고, 광공업과 서비스업은 꾸준히 상승해 선진국형 산업구조로 바뀌었다. 1953년에는 전체 산업에서 농림어업의 부가가치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47.3%나 됐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농림어업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 2007년에는 3.0%에 그쳤다. 반면 광공업 비중은 1953년엔 10.1%에 불과했으나 2007년엔 28.3%로 3배 가까이 올랐다. 특히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광공업 비중이 전체의 31.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서비스업의 비중도 계속 상승했다. 특히 1980년대부터 정보화 등에 따른 경제의 서비스화가 가속화되면서 상승 속도가 빨라졌다. 서비스업 비중은 1992년 절반을 넘어서기 시작해 2007년에는 57.6%에 달했다.
1948년 155만t 수준이던 미곡(쌀) 생산량은 이후 종자개량, 농경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꾸준히 증가, 1988년 최고치(605만t)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산업화에 밀려 더 발전하지 못하고 매년 500만t 내외의 생산량을 보이고 있는데,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다. 2007년 생산량은 450만t.
반면 철강 생산량은 공업화를 위한 기간산업 육성책에 힘입어 197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거듭했다. 2007년엔 1946년의 800t에 비해 약 7만배 늘어난 5480만t을 기록했다. 이는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5위 수준. 1955년 최초로 7대가 만들어진 자동차는 2007년 408만6308대를 생산, 약 59만배의 증가세를 보였다. 우리나라 자동차 생산능력 역시 미국, 일본, 독일, 중국에 이어 세계 5위 수준이다. 현재 세계 1위의 선박건조량을 자랑하는 조선산업도 1948년엔 8000CGT 수준에 불과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조선산업.
1970년대에는 섬유, 가발, 합판 등 경공업 제품이 전체 수출액의 70%를 차지했다. 특히 섬유는 단일품목으로 3억달러 이상을 수출하는 효자 품목이었다. 가발도 수출 3위를 차지했다.
현재는 전기전자제품, 석유화학제품, 반도체, 승용차 등 중화학공업 제품이 수출의 90%를 차지한다. 반도체는 1992년 수출 1위 품목(68억달러)으로 올라선 뒤 줄곧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 ‘포니 신화’를 연 지 20년 만인 1995년에 연간 100만대 수출을 돌파했다.
수출 상대국도 미국과 일본 위주에서 벗어나 다변화했다. 전체 수출액 중 미국과 일본의 비중은 1970년 75.4%에서 25%대로 낮아진 반면, 대(對)중국 수출 비중은 20%대로 미국(16.9%), 일본(8.5%)을 앞질렀다.
삼성경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1955년 국내 100대 기업 가운데 50년이 흐른 2005년에도 순위에 들어 있는 기업(상호변경 포함)은 CJ, LG화학, 현대해상, 한진중공업, 대림산업, 한화, 한국전력 7개에 불과하다. 1964년 당시의 10대그룹 중 지금도 10대그룹에 드는 기업은 삼성과 LG뿐이다. 변화하고 혁신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총인구는 2007년 말 현재 4845만6000명으로 1948년 2000만명에 비해 약 2.5배 증가했다. 특히 총인구의 21.5%인 약 1040만명이 서울에 살고 있다. 총인구의 8.5%에 불과하던 1948년(170만8000명)에 비하면 6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인천·경기를 포함할 경우 수도권 인구 비중은 48%에 달해 시간이 갈수록 수도권 인구집중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반면 농가인구는 1949년에 총인구의 74.4%였으나 2005년엔 총인구의 6.9%인 334만명 정도로 줄었다.
국토 총면적은 2006년 기준 9만9678㎢로 1948년 당시의 면적(9만4229㎢)에 비해 5449㎢ 확대됐다. 지속적인 간척사업의 결과다. 국토개발의 심장이라 할 도로 포장도 괄목할 만한 성장세가 이어졌다. 도로 총길이는 2007년 10만3000㎞로, 1944년(2만5550㎞)보다 4배가 길어졌다.
개인마다 휴대전화, 집집마다 초고속인터넷
주택건설촉진정책의 결과로 2007년 말 현재 전국 총 주택수는 1379만가구에 달한다. 1962년(362만가구)에 비해 약 3.8배 늘어난 수치다. 주택보급률은 인구증가 및 핵가족화에 따른 가구수 증가로 1962년 82.4%에서 1987년 69.2%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 2000년 100%를 넘어서 2007년 말에는 108%를 기록했다. 하지만 서울시의 주택보급률은 2006년 현재 96%로 여전히 100%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산업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경제활동인구도 증가하고, 근로자의 월평균수입도 늘어났다. 2007년 경제활동인구는 1963년에 비해 2.8배 늘어난 약 2421만명으로, 총인구의 49.9%를 차지했다. 1963년은 총인구의 30%만이 경제활동인구였다. 임금 역시 2007년 도시근로자가족의 월평균소득은 367만5000원으로 1970년에 비해 126배가 올랐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가 약 16배 상승했으니, 임금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을 8배가량 웃돈 셈이다.
소득수준의 향상은 다른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1955년 200만원에 불과하던 생명보험의 수입보험료가 2007년에는 82조원대가 됐다. 또한 주식거래량도 1956년 4억원 규모에서 1977년 1조원, 1993년 100조원을 넘어선 데 이어 2007년에는 1362조원으로 천문학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국민의 삶의 질이 윤택해졌음은 자동차 총 보유대수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48년 1만4703대였던 자동차가 2008년 5월 현재 1667만대로 1100배 이상 증가했다. 1955년 3만2000명에 불과하던 전화 가입자 수는 2300만명을 넘어서 가구당 1대를 넘어선 지 오래다. 또한 1987년 1만명 수준이던 이동전화 가입자가 2008년 5월 현재 4473만8000명으로 늘어났고, 초고속인터넷 가입률도 2000년 전체 가구의 49.8%에서 2007년엔 79.8%로 증가했다.
세계적인 교육열을 보여주듯 대학생 및 대학원생의 증가도 눈에 띈다. 1952년 3만명에서 2007년에는 211만명으로 66배 증가했다.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어선 지 오래다. 복지의 척도인 의료기관수는 2007년 6월 현재 5만2245개로, 1962년의 6247개보다 8.36배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