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가 하락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러시아 경제 전체와 러시아 지도층의 자신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에 배럴당 140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는 12월이 되자 배럴당 35달러선으로 폭락했다(현재는 배럴당 40달러 수준). 루블화 가치는 달러 대비 25% 이상 하락했으며(대다수 러시아 국민이 루블화를 받자마자 달러로 환전한다), 유로화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하락세를 기록했다. 물가상승률은 점차 높아져 유가가 배럴당 30달러 이하로 하락할 경우 15~2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늦여름 6000억달러에 달했던 외환보유고 역시 루블화 방어를 위한 러시아 중앙은행의 노력에도 1600억달러 이상 줄어든 상태다.
여기에 그루지야 전비(戰費)까지 더해져 러시아의 잉여예산은 급격하게 고갈되고 있다. 러시아 경제는 일부 주요 부문의 생산이 20~30% 감소하면서 지난해 12월 공식적인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러시아의 국부이자 에너지 초강대국의 위상을 상징하는 거대 국영기업 가즈프롬조차 정부의 구제금융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러시아 국민 역시 물가상승과 은행의 유동성 위기, 저축액 감소에 따라 심화되는 생활고를 겪고 있다.
한풀 꺾인 러시아
난공불락이던 푸틴 총리의 위상도 시험대에 올랐다. 자동차 수입관세 인상 문제로 불거진 극동러시아 지역의 시위(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가 값싼 일본산 수입자동차에 의존하고 있다)가 폭동으로 번지면서,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발성에 그칠지, 아니면 전국적인 폭동으로 이어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오바마 행정부가 지난 몇 년의 오만한 러시아가 아니라 자신감이 한풀 꺾인 러시아를 상대하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군비통제 협정이나 미사일방어, 이란·북한 및 기타 긴급 현안과 관련한 전략적 협정을 조인할 능력이 없는 무력한 정부를 상대해야 하는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양국의 상호 비난은 지난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이어졌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개최된 세계정책회의에서 ‘일방적인’ ‘무책임한’ ‘이기적인’과 같은 용어를 써가며 세계경제위기뿐 아니라 그루지야 전쟁, 중동사태, 코소보 독립 문제까지 미국에 책임을 돌리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반시간가량 지속된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연설은 2007년 2월 뮌헨에서 있었던 푸틴 전 대통령과 게이츠 미 국방장관의 맹렬했던 상호비난을 상기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정상들 간에 오고 간 마지막 설전이 됐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워싱턴 G20정상회담에서 행사를 주관한 미국의 노고를 칭송하고, 베네수엘라 방문시에는 후고 차베스 대통령의 대미(對美) 비판에 동조하지 않았다.
3주 후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외무장관회의에서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의 회원국 행동계획(MAP) 승인이 거부됐을 때도 러시아는 미국을 칭찬했다. 이는 두 국가가 영영 회원국 지위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은 일부 NATO 회원국(프랑스와 독일)의 반대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NATO 외무장관들은 동유럽에 미사일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데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다.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 문제는 미·러 분쟁의 핵심 사안인 까닭에 여전히 긴장요인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