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日王, 일본 우경화 시스템의 축(軸)

‘천황제’는 극우 기득권 방어벽, 정권교체도 허용 않는 ‘유사종교’

  • 글: 장팔현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대 박사(일본사) jan835@hanmail.net

    입력2005-05-24 18:1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독도 영유권 분쟁, 교과서 왜곡, 군비 강화 등 일본의 우경화, 군국주의화가 심상치 않다. 일본을 ‘극우 강경노선’으로 치닫게 하는 가장 강력한 일본 내 시스템이 바로 일본인들이 ‘천황’이라고 부르는 ‘일왕’이다. 일왕제는 일본의 정치, 사회, 언론, 군부를 극단적 국수주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저해하는 국가 시스템이다.
    日王, 일본 우경화 시스템의 축(軸)

    아키히토 일왕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총리직을 수여하고 있다.

    일본은 올해 안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들어가기 위해 미국에 올인하는 일극외교(一極外交)를 펴고 있다. “미국 외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없다”는 것이 현재 일본 외교에 대한 솔직한 평가일지 모른다.

    일본의 국가 시스템 중 가장 특이한 것이 일왕이다. 외국인들은 ‘다테마에(建前·명분, 겉마음)’와 ‘혼네(本音·속내)’를 가진 이중성으로 일본인의 성격을 갈파하는데, 다른 한편에선 ‘상징 일왕제’와 ‘총리’라는 묘한 정치구조를 갖춰놓은 것이 일본의 특성이다. 한국은 헌법에 수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지만 일본은 ‘천황이 있는 곳’을 수도로 규정한다. 금싸라기 같은 도쿄 중심 어마어마한 넓이의 땅을 왕이 사는 궁궐이 독차지하고 있다. 간혹 이곳이 개방되면 수많은 국민이 들어와 방탄유리 속 일왕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만세를 부르는 게 오늘날의 일본이다.

    일왕은 현 시점에서 정치 주체는 아니다. 그러나 ‘군국주의 일본’을 향한 가장 강력한 도구의 기능을 하고 있다. 최근의 한일 갈등으로 일본에 분노하는 한국인은 많지만 일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본을 알기 위해선 일본의 권력구조와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간파해야 하는데, 바로 권력구조와 의식구조의 핵심에 일왕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선 일왕제에 대해 연구한 것이 많지 않다. 이렇다 보니 일본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탐구가 어려운 것이다.

    일왕은 고대의 대왕시대 때 거대한 묘를 만들 만큼 실질적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4세기 전반 남북조 동란기를 맞이하여 무사들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일왕은 실권을 잃었다. 이후 정치는 공경(公卿) 귀족이 자신의 신변보호와 영지확장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뽑은 무사들의 손에 넘어갔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왕은 다시 전면에 등장한 것 같지만, 실은 유신의 일등공신인 사쓰마(薩摩)와 쇼슈(長州) 지방 출신 무사들이 실권을 쥐고 일본 근대화를 이룩했다.

    ‘天皇’과 ‘神道’, 정치의 양대 축



    1889년 2월11일(건국기념일)에 공포된 ‘대일본제국헌법’은 “천황은 국가원수(제1조)이자, 통치권의 총람자(總攬者)”라고 밝혔다. 고대의 대왕시대를 연상시키지만 권력은 사쇼(사쓰마·쇼슈) 출신 무사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공식적으로 일왕과 신하라는 이중 권력구조로 일본 정치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100년이 훨씬 지난 19세기 말엽에 확립된 이러한 이중 권력구조가 단 한번의 흔들림도 없이 2005년 현재의 일본 정치 시스템에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 2005년 현재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한 번도 정권교체가 이뤄진 적이 없는 나라다. 메이지유신 이후 형성된 일본 집권층은 현재 자민당의 뿌리가 됐다.

    일본의 근·현대 집권세력은 일왕제를 활용해 국민을 통제하고 권력을 유지했다. 일왕은 실권을 쥔 정치인들에게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명분을 축적해주고 국론통일을 위해 적절히 활용되는 정치도구의 기능을 담당했다. 일본인에게 일왕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제이자 실생활은 물론 잠재의식에까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그 이유는 일왕제가 일본인이 생활종교철학으로 신봉하는 ‘신도(神道·신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신도는 ‘조상숭배사상’이다. 그 유래는 일본 열도에 불교가 전래되기 훨씬 이전에 찾을 수 있다. 538년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가 처음 전래됐으나 때마침 일본 열도에 역병이 유행해 포교는 실패했다. 그러자 신도파는 ‘역병 창궐은 외래신인 석가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폈다. 신도를 믿는 모노노베씨 일족에 의해 불교는 철저히 거부되고 탄압받았다. 552년 다시 백제에서 불교가 전래됐으나 이때도 역병 창궐로 표교가 저지됐다.

    불교 유입을 거부한 모노노베씨 일족은 ‘하느님(천제)’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규슈(九州)에서 동진해온 천손족이자 태양신을 믿는 집단이었다. 모노노베씨 일족이 무너지고 일본에 불교가 퍼진 때는 587년이다. 성덕태자가 모노노베 모리야(物部守屋)를 멸하고부터다. 이후 일본 열도에서는 불교와 신도가 융합된 싱크러티즘(syncretism·혼교주의)이 널리 퍼져 사찰 안에 조상을 모시는 ‘신사(神社·진자)’가 있거나 신사 안에 사찰이 있는 기묘한 형태를 이뤘다.

    조상을 숭배하는 신도의 사상은 신사의 건축으로 이어졌다. 일반 국민은 신사를 중심으로 종교의식을 거행했다. 일왕가는 조상신을 모시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세워 신궁에서 사제의 역할을 함으로써 국민적 단결을 꾀했다.

    일본은 이처럼 일왕과 신도라는 두 축이 국가체제로 형성된 것이다. 일본인에게 숙명과도 같은 일왕제와 신도는 정신적 안정과 단결심을 심어주는 순기능도 하고 있다. 두 제도는 평상시 공기의 존재처럼 느껴지다가도 국가위기 상황에는 구국의 중심점으로 부상하곤 했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일본 공격이 폭풍우 때문에 실패한 바 있다. 일본에서 이 사건은 가미카제(神風·신이 불게 해준 태풍)의 덕택이라 하여 신도와 일왕제를 더욱 신봉하는 계기가 됐다.

    “그럼 너희 조상은 아이누냐?”

    일왕제는 일본판 ‘중화사상’이다. 이는 일왕제가 근본 적으로 중세식 배타적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기 57년 중국 ‘한서지리지’는 “왜인은 백여 국으로 갈라져, 일부 나라에서는 전한의 낙랑에 조공해왔다”고 서술했다. 고대 중국은 주변국을 멸시하는 ‘춘추필법’에 따라 일본을 ‘왜’로 기록했다.

    일본에서 ‘천황(天皇·덴노)’이란 호칭이 사용된 시기는 아무리 빨라야 6세기 이후다. 최근 일본학계에선 천무조(재위 672~686) 또는 지통조(690~697) 때부터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후자는 일본이라는 국가의식이 나타나 ‘고사기’(712)나 ‘일본서기’(680~720)가 씌어진 시절로 천황 칭호도 비슷한 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이른바 일본판 한 화이(華夷)질서 사상이 나타났다. 당시 야마토 정권은 자신들이 있는 지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천하관(天下觀)을 가졌다.

    그러나 일본이 화이질서 사상을 갖고 ‘일본서기’를 쓰면서 일본 역사는 신빙성이 떨어졌고 일왕의 계보조차 불신받게 됐다. 자승자박의 역사 서술은 연대 끌어올리기에서 시작됐다. 초대 일왕인 신무(神武)의 즉위년은 기원전으로 대폭 올라가게 됐다. 어차피 실재하지 않은 신화상의 왕이지만 기원전 660년이면 일본 역사에서는 조몬 시대에 해당한다.

    조몬인은 일본 열도의 원주민으로 아이누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일본인에게 “신무가 기원전 660년에 즉위했으니 너희 조상은 아이누냐?” 하고 묻는다면 십중 팔구 ‘심히 무례하다’고 느낀다. 이처럼 일본인이 기록한 일본의 일왕사는 모순투성이다. 일본 역사학자인 후지무라 신이치가 구석기시대 유물을 날조해 일본 역사를 끌어올린 행위에 일본 우익과 언론이 일조한 것은 이와 일맥상통하는 일이다.

    일본에선 또한 “일본 천황가는 기원전 660년부터 2005년 현재까지 한 핏줄”이라는 ‘만세일계’가 통용된다. 상당수 일본인이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일본의 극우인사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만세일계 사상은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백제 역사를 보아도 혈통이 몇 번 바뀌었다는 정황이 나타난다. 즉 백제 고이왕과 비유왕, 문주왕, 삼근왕에 대해선 더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만세일계 사상은 고구려, 백제, 일본의 부여족 계통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사안이다.

    와세다대의 미즈노 유 교수는 ‘3왕조 교체설’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1대부터 9대까지는 가상인물에 지나지 않으며 10대 숭신이 실제로는 1대조 왕조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2대조 왕조는 인덕이며, 3대조 왕조가 계체라고 주장한다. 계체에서 현 일왕(125대)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제1대 신무(神武)에서 제14대 중애(仲哀)까지를 실재하지 않은 ‘신화시대의 왕’으로 본다. 14대 이후의 왕들이 단일 혈통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반대 증거가 많이 있다. 이 문제는 일본 우익인사들의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천황이 우주를 지배한다”

    임진왜란 때의 일왕제,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왕제, 그리고 현재의 일왕제에 근본적 성격 변화가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일왕제는 실권자의 권력을 정당화해주는 도구로 활용됐다는 점, 주변국 침략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는 점, 일왕제에선 실질적 정권 교체는 없다는 점, 일왕제에선 특정 정파가 권력을 독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를 구체적으로 분석해보자.

    日王, 일본 우경화 시스템의 축(軸)

    일왕 일가가 도쿄시내 왕궁에서 군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중세 일왕가와 유력 무사는 정치권력을 잡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도요토미, 도쿠가와 막부의 득세로 이어졌다. 미천한 신분이던 기노시타는 일본을 통일한 뒤 일왕을 움직여 새로운 성 하시바, 도요토미를 하사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도요토미는 최고 관직인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올랐다. 신분 콤플렉스가 있던 그는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일왕제를 이용했다. 즉 왕정복고를 꾀해 일왕의 권위를 한껏 드높인 뒤 일왕의 권위로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도요토미에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역시 왕의 권위를 빌렸다.

    이런 전통은 메이지유신에도 이어졌다. 권력을 쥔 사쓰마(현 규슈 가고시마현)와 쇼슈(현 야마구치현) 지방 무사들은 유신의 명분을 찾기 위해 메이지왕을 앞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 군부도 전쟁의 명분을 일왕에게서 찾았다. ‘황국신민화’ 사상이 대표적이다. 패전 후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이 축출되기는커녕 계속하여 일본의 정치·경제·언론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 역시 일왕제에서 그 명분을 구한 것이다. 이들은 기득권층인 자신들과 일반 국민을 잇는 동아줄로 일왕제를 활용한 것이다.

    일왕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왕 쇼와는 미군에 의해 ‘신격(神格)을 부정당하고 인격(人格)으로서의 왕임’을 선언해야 했다. 이로써 일본 왕은 상징적 왕으로 자리잡게 됐다. 그러나 일왕제는 일본이 팽창정책을 추진할 때 그 중심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현재 일본을 움직이는 우익인사들이 ‘헌법 개정을 통해 일왕을 명실상부한 국가 원수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일왕제는 일본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됐을 뿐만 아니라 해외 팽창의 이론적 근거로도 작용했다. ‘우주의 중심은 일왕’이라는 일왕제와 신도 사상이 해외 침략의 명분으로 적극 활용된 것이다. 일왕제는 정치, 외교, 종교에 모두 적용되는 일종의 원시적 형태의 제정(祭政)일치 시스템이다. 또한 일본은 일왕제 사상을 통해 자신의 힘을 실제보다 과장하는 경향을 갖게 됐다.

    일본 성덕태자는 607년 중국 수양제에게 국서를 보냈다. 국서에서 성덕태자는 “해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서신을 보낸다”고 썼는데, 이에 괄괄한 성격의 수양제가 격노했다고 중국 ‘수서’의 ‘왜국전’이 전한다. 그 국서는 당시 왜국 국력으로서는 얼토당토않은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일본판 중화주의 사상은 근세에 이르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직접적 군사 행동으로 나타나 임진왜란이 촉발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明)을 정벌해 일왕은 북경에 살게 하고, 자신은 영파(상하이 부근)에 살 것이며 인도까지 정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은 ‘천황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팔굉일우(八紘一宇)’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일왕을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아닌, 우주의 지배자로까지 신격화하는 것이 단지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진 또 다른 사례가 바로 태평양전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왕제 사상에 의해 조선과 명의 실질적 국력을 얕잡아 봤듯, 일본 제국주의도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모험을 강행한 것이다.

    일왕·수상·의원 세습 시스템

    일왕제는 기독교나 이슬람 같은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일왕제와 긴밀히 연관된 신도사상에 의해 일종의 기독교 교회와 비슷한 성격의 신사가 전국 곳곳에 세워져 종교의식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 한 예다. 그러나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보편적 인류애를 담고 있는 반면 일왕제는 특정민족의 번영만을 절대선으로 삼고 타민족, 타종교, 타사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 종교’에 가깝다.

    일왕제의 극단적 자기 민족애에서 가미카제 특공대도 나올 수 있었다. ‘팔굉일우’ 사상이 현시된 것이 바로 ‘내선일체(內鮮一體)’나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이다. 이웃 국가에 대한 침략에 대해 윤리·도덕적으로 무감각한 것도 일왕제와 신도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신도에는 홍익인간 사상이나 인류평화·박애주의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일본민족 중심의 이기심만 들어 있을 뿐이다. 최근의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는 대신 교과서를 왜곡하고 독도 영유권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일본인의 의식 깊이 자리잡고 있는 ‘선민의식’, 즉 신도사상에 바탕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왕제는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기득권층에겐 더없는 축복이다. 내각의 총리와 대신(장관), 의회를 일왕제 수호에 앞장서온 극우 자민당 세력이 계속 장악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의 대다수 유력 언론사도 일왕과 그를 추종하는 극우보수세력에 의해 설립됐고 성장했다. 따라서 언론은 태생적으로 일왕제를 적극 옹호하는 위치에 있으며, 언론사의 소유·경영권 역시 극우세력이 거의 장악하고 있다. 언론은 일왕제 이념을 국민에게 강력히 설파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일왕제에 뿌리를 둔 극우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또한 일본의 상당수 대기업은 20세기 중반 일왕과 극우보수세력의 지원 아래 고도성장한 군수산업체, 식민지 착취 기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왕제 시스템에 의해 성장한 일본 정치·관료집단, 언론과 재계는 일왕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동시에 일본의 우경화를 촉진한다.

    이 같은 이유로 일본에선 권력과 부를 몇몇 소수 가문이 세습하는 시스템이 확고히 자리잡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외할아버지는 장관을 역임한 고이즈미 마타지로라는 인물이다. 그는 우익협객(야쿠자) 출신으로 그의 등에는 커다란 문신이 있어 ‘문신장관’이라 했다. 그의 사위이자 양아들인 고이즈미 준야는 기시 노부스케 총리 시절 방위청장관을 지내며, 한국과 만주 재지배를 위한 ‘미쓰야 계획’을 입안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의 아들이 바로 게이오대학 출신의 고이즈미 현 총리다.

    고이즈미 총리는 기시 총리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를 비서실 부실장으로 기용했다가 자민당 간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할아버지 시절부터 한솥밥을 먹으면서 긴밀히 얽혀 있는 특별한 관계다. 이처럼 일본 정계는 일왕가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까지 대를 이어 정치를 세습하고 있다. 이렇게 대를 이은 국회의원의 비율이 3분의 1에 이른다. 메이지유신부터 현재까지 같은 집안에서 계속 정치를 하는 것이니, 할아버지의 침략주의 사상이 손자 대에 이르러 바뀔 리 만무하다.

    언론계에도 사쿠라이 요시코, 이자와 모토히코(井澤元彦·작가) 같은 우익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이자와는 일본의 극우단체인 ‘새역모(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주축 인물이다. 그는 1954년 아이치현 나고야시 출신으로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TBS 보도국 기자를 역임했으며 ‘역설의 일본사’, ‘NO라 말할 수 있는 교과서’를 쓴 작가다. 2005년 3월 한국의 한 출판사가 일본 극우인물인 이자와 모토히코의 작품인 ‘무사(武士)’(7권 시리즈)를 번역 출판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무사’ 시리즈의 한 대목인 ‘쾌도난마의 결단’이란 부분에서 ‘쾌도난마의 대상’이 어디인지는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극우와 일왕 견제할 세력 ‘전멸’

    이 밖에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도쿄기독교대 교수), 다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다쿠쇼쿠대 교수), 고모리 요시히사(古森義久·산케이신문 워싱턴 주재 특별위원 겸 논설위원),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새역모 부회장), 야기 슈지(八木秀次·다카사키경제대 조교수), 와타나베 쇼이치(渡邊昇一·조치대 교수) 등 각 분야 요소요소에서 우익인사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는 1950~60년대의 잉태기를 거쳐 1970~80년대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으로 구체화됐다가 이제 햇빛을 보고 있다. 세계 유일 강대국 미국과의 동맹강화 등 국제환경도 일본 우익에 유리하다. 일본 우익은 각 방면에 포진한 우익인사들만 가지고도 자가발전이 가능한 단계까지 올라섰다. 자위대의 한 간부가 ‘헌법 초안’을 만들어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을 보면, 마치 메이지유신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이제는 정계, 학계, 언론계, 경제계는 물론 군에서마저 우익 바람은 멈출 수 없는 태풍이 되었다.

    일본의 정치구조는 일왕과 내각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비상시에는 일왕이 심정적 중심으로 급부상, 일본 국민을 통합하는 구심점의 기능을 발휘한다. 국민은 신도이고 천황은 신이면서 사제가 된다. 마치 중세 유럽의 십자군과 교황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우경화하고 있는 일본에서 정치인들이 헌법을 고쳐서라도 천황을 또다시 국가원수로 삼으려 하는 것은 천황제의 이러한 성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공산당의 몰락, 공명당의 부상

    일본에서 사민당과 공산당 등 일왕제와 극우보수를 견제할 정치세력은 이제 힘을 잃었다. 한국에선 한일간 양심적 시민단체의 연대에 기대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일본에서 시민단체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한국 시민단체들의 진보성, 개방주의, 막강한 영향력과는 비할 바가 못된다.

    이는 다수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본 국민성에서 기인한다. ‘이지메(다수에 의한 집단 따돌림)의 공포’와 ‘무관심’이 결국 우경화 사회를 방치하고 있는 꼴이다. 일본 내에선 우경화를 막을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진단이다.

    특히 공산당의 몰락은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공산당이 일왕제와 대척점에 놓였다는 점에서 일본의 정치는 일왕제 일변도로 흐를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다. 일본 공산당의 기원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국민성인 이지메를 적절히 활용했다. 농민과 상공인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그들보다 더 못한 천민부락을 만든 것이다.

    이런 천민부락은 근세에까지 잔존했는데 부락민의 수가 300만명에 이른다. 현재도 이들은 일본 내에서 취직이나 결혼에서 많은 차별을 받는다. 바로 이들 300만 천민이 공산당의 지지층이었다.

    천민층을 기반으로 생성된 좌파와 공산당은 일왕제에 대항해왔다. 메이지유신 후 자유민권 운동 때 각 당에서 모의 헌법 초안을 만든 일이 있다. 1881년 9월 성립된 자유당 계열의 릿시샤(立志社)는 초안에서 인민주권과 저항권을 넣었으며, 군주권의 축소를 주장했다. 이쓰카이치 가쿠게이 고단카이(五日市學藝講談會)에서도 인민의 권리를 중시하며 군민공치(君民共治·군주와 백성이 함께 통치)와 삼권분립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즉각 탄압에 직면했다. 일본 정부는 1910년에 사회주의자들이 일왕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전국에서 수백명을 검거했고 이중 고도쿠 슈즈이(幸德秋水) 등 12명은 대역죄라는 죄명으로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공산당도 이제는 일왕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2003년 6월 자위대와 일왕제를 인정하는 당 강령 개정안을 제출했으며, 2004년 1월17일 제23회 당 대회를 열어 1961년 이후 43년 만에 이를 통과시켰다. 투표에서 1006명의 대의원 가운데 단 1명만이 천황제 인정에 반대표를 던졌을 뿐이다. 이로써 일본 공산당은 껍데기만 남게 됐다. 이는 일본인 특유의 ‘눈치보기’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공산당은 이미 우경화한 국민에게서 집단 린치를 당할 것 같은 위기를 느낀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의 이러한 대변신에도 불구하고 사민당과 공산당의 지지율은 형편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공산당은 지지율 1~3%대에서 방황 중이다. 총 722명의 일본 국회의원 가운데 중도 세력인 공산당과 사민당 의원은 29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693명의 의원 대부분은 일왕제를 신성시하는 극우보수로 분류된다.

    신도와 일왕제가 현재의 일본 정치 권력구조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바로 공명당이다. 현재의 일본 정치에서 자민당과 함께 여당의 한 축을 이루는 공명당은 1253년 승려 일연(日蓮)이 “오직 법화경만이 진정한 가르침이다”라고 설파한 데서 유래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들어 신도들이 1279년 일련종을 세웠는데 이 종파는 ‘남무묘법법화경(南無妙法法華經)만 외우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속칭 ‘남묘호렝게쿄(창가교육학회)’의 전신이다. 1946년 제2대 회장에 취임한 도다(戶田城聖)씨가 창가교육학회를 ‘창가학회(創價學會)’로 개칭해 현실 정치에 뛰어든 것이 바로 현재의 공명당이 탄생한 배경이다.

    여왕 즉위해도 ‘상황 불변’

    공명당(창가학회)은 2003년 중의원 선거에서 34명, 2004년 7월 참의원선거에서 24명의 의원을 당선시켜 총 58석을 갖고 현재 자민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하고 있다. 2003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공명당의 지지가 없었다면 자민당 의원 42명은 낙선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공명당의 위치는 여당의 생사여탈권을 쥔 상태다.

    일왕제에 불안요소가 있다고 최근 한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대를 이을 남성 후계자가 없어 일왕제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내용이다. 많은 일본인은 이 점을 자신의 일처럼 걱정한다. 일본에서 벌인 여러 여론조사에선 80% 이상이 여성도 천황이 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에 찬성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도 “과거엔 여성 천황도 있었다”면서 여성의 천황 즉위를 지지했다.

    현재 나루히토 왕세자를 비롯한 일왕가는 딸만 셋을 두고 있을 뿐 아들이 없다. 그런 까닭에 왕세자 사후는 여왕의 즉위를 허용하거나 양자를 들이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호소다 히로유키 관방장관은 지난해 말 “여성의 즉위 허용은 향후 검토할 만한 문제지만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한다”면서 “여론을 계속해서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발표했다.

    과거 일본에는 8명의 여왕이 있었다. 추고(推古), 황극(皇極·다시 제명(齊明)천황으로 즉위), 지통(持統), 원명(元明), 원정(元正), 효겸(孝謙·다시 칭덕(稱德)천황으로 즉위), 명정(明正), 후앵정(後櫻町)이 그들이다. 그러나 1762년 즉위해 9년 뒤인 1770년 조카인 고모모조노(後桃園)에게 왕위를 물려준 마지막 여왕 고사쿠라마치(後櫻町·117대) 이후 여왕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황실전범(皇室典範)’은 남성만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고 있다.

    역사 속 여왕은 왕통을 이을 왕자가 없을 때 대를 이어주기 위한 과도기적 존재였다. 현재도 같은 목적에서 여왕 즉위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남성 후손이 생기지 않거나 여왕이 즉위한다고 해서 현재의 일왕제가 약화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일본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언제든 많 왕자가 태어난다면 일왕제가 다시 복원될 것은 불문가지다.

    日王이 한국 대통령보다 상위 개념?

    일왕제는 단지 일본 내부 문제가 아니라 주변국에 큰 영향을 주는 사안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일왕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일왕에 대한 호칭 문제는 한국에서도 몇 차례 논란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천황’이라고 불렀고, 김영삼 대통령은 ‘천황 폐하’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황제’라는 뜻의 ‘His Majesty Emperor of Japan’으로 부르기도 했다. 반면 한국의 일부 언론은 ‘일왕’또는 ‘일본 국왕’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천황’과 ‘일왕’을 혼용하는 경우도 많다.

    대체로 호칭은 상대국이 원하는 대로 불러주는 것이 국제적 관례이지만 일왕의 경우엔 사정이 다르다. 이 문제는 일왕과 한국 사이의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사안이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1868년 조선에 사절을 보내 조선과 맺었던 외교·통상 관계의 수정을 요구했다. 일본은 종전과 다르게 일본의 천황이 조선의 왕보다 상위임을 주장했고 조선은 이 요구를 거절했다. 이러한 일본의 ‘천황 우위 사상’은 현재도 일본 우익인사들의 대한관(對韓觀)을 형성하고 있다. 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인 구로다 가쓰히로씨도 ‘국제 관례’라며 천황 호칭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여기엔 천황이 한국 대통령보다 상위 개념이라는 메이지유신 시절의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한국 대통령은 일본 총리와 동급이고 일본 수상은 천황의 신하라는 논리다.

    ‘일왕(日王)’으로 불러야 할 이유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때 ‘천황의 신민’으로 전락했고 일왕 사상의 본체인 신사에 참배를 강요받은 경험이 있다. 한국인에게 ‘천황’이라는 호칭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다. 천황은 한민족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 했던 잔인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본체다.

    천황에서 ‘천(天)’은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천황은 ‘일본의 황제’가 아니라 ‘전세계의 황제’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은 이 호칭 자체를 주변국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내포하는 용도로 악용해왔다.

    한국의 역대 왕조는 일본 천황의 호칭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조선 왕조가 ‘일본국왕(日本國王)’이라는 호칭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통신사는 ‘소위 황제’라는 비하의 뜻으로 ‘위황(僞皇)’으로 불렀다. ‘천(天)’이라는 호칭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한국 언론이나 정부는 일본 천황을 ‘일왕(日王)’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일본 천황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전근대적이고 배타적이며 호전적인 사상이 세계2위 경제대국의 1억이 넘는 인구를 아직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사적인 미스터리다. 태평양전쟁의 전범(戰犯) 가문이 1억 신도의 교주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유사 종교 형태를 띤 이 위험한 사상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 각국은 ‘천황’이라는 호칭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상대국이 원하는 대로 호칭해주는 국제관례는 사실 일본이 앞장서서 어기고 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번번이 한국을 ‘조센한도(朝鮮半島)’로 호칭한다. TV 일기예보 등에서 광범위하게 ‘조센한도’라는 말이 사용된다. 남북한 전체의 한국인을 총칭할 때도 일본인은 ‘간고쿠징(韓國人)’보다 ‘조센징(朝鮮人)’이라는 호칭을 선호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는 국교도 없는 일본이 인구 수나 경제·문화 교류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과 관계가 깊으면서 ‘간고쿠(한국)’ 대신 ‘조센한도’를, ‘간고쿠징’ 대신 ‘조센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한국과의 국제관례상 맞지 않는 일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