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야스쿠니 마찰이 빚은 ‘제4차 중일전쟁’

협력의 이익보다 갈등의 이익이 더 크다?

  • 갈상돈 고려대 박사과정·정치학 galdonie@naver.com

    입력2006-02-02 1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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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강행과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거부로 촉발된 중일 갈등은 우발적이라기보다 예정된 것이었다. 일본 국가주의와 중국 중화민족주의의 대충돌. 강력한 경제·군사대국을 꿈꾸는 일본과 경제성장을 발판 삼아 ‘준비된 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은 당분간 협력보다는 갈등 기조를 유지하며 자국의 이익을 챙길 것이다.
    야스쿠니 마찰이 빚은 ‘제4차 중일전쟁’
    야스쿠니 마찰이 빚은 ‘제4차 중일전쟁’
    악화된 중일관계가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이웨이’를 선언하며 등을 돌린 지 벌써 1년이 다 돼간다. 중국은 뒤돌아서서 칼을 갈고 있고, 일본은 ‘네까짓 게 어쩔 건데’ 식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두 나라 관계는 1972년 국교정상화 이래 최악이라고도 하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68년 만의 준(準)전쟁상태라고도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현재의 중일관계를 두고 1895년 청일전쟁과 1931년의 만주사변, 그리고 1937년의 중일전쟁을 잇는 ‘제4차 중일전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이런 다소 극단적인 말들도 두 나라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긍이 가는 면이 없지 않다. 현재 중국과 일본은 정상회담을 하지 않고 있다. 매년 양국 정상이 회담을 열던 APEC 정상회담도 지난해(11월 부산회담)엔 불발로 끝났고, 12월의 ASEAN+3(한·중·일) 정상회담과 그 직후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처음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도 중일 정상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모두 중국측의 거부로 그렇게 됐다.

    이런 현상은 지난해 10월17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참배 이후 계속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가 중일관계 악화를 불러온 핵심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2001년 10월 상하이 정상회담 이후 ‘비공식 절교’에 들어가면서, 자국에서가 아닌 제3국 국제회의에서 ‘기회가 되면 얼굴이나 보자’는 식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만남’으로 정상회담의 명맥을 이어왔다. 그렇게 명맥을 유지해 온 회담조차 마침내 완전히 문을 닫으리란 전망은, 2005년 5월 일본을 방문 중이던 우이 중국 부총리가 고이즈미 총리와 하기로 한 회담을 갑자기 취소하고 귀국해버렸을 때 처음 제기됐다. 우이 부총리의 회담취소 결정은, 그의 방일(訪日) 직전 고이즈미 총리가 중의원에서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다른 나라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언제 갈지는 적절히 판단하겠다”는 등 신사 참배를 기정사실화한 데 대한 중국 정부의 항의 표시였다.

    “A급 전범들을 분리하라”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관련해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총리대신으로서 자기 나라의 시설에서 평화를 기원하고 전몰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을 비판하는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들 다하는 전몰자 추도가 무슨 문제냐’는 항변이다.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 중국은 1985년 나카소네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처음 참배했을 때부터 “야스쿠니신사에 합사(合祀)돼 있는 A급 전범들에 대해서만 별도의 추도시설을 만들라”며 총리의 신사 참배에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취해왔다.

    하지만 A급 전범에 대해서만은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전쟁을 주도한 책임자와 일반 참전자를 구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A급 전범에 대한 별도의 추도시설 건립비용을 2006년 예산안에서 제외함으로써 중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중국이 A급 전범 문제를 들고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A급 전범 중에는 과거 중국 침략을 주도한 인물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1937년의 난징 학살 책임자로 인정돼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마쓰이 이와네 전 육군대장도 그중 한 명이다. 중국측 발표로 30만명이 학살됐다는 ‘난징 학살 전범’을 상대국 총리가 ‘추도’한다는 것은 중국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일 것이다.

    그럼에도 후진타오 주석은 지금까지, 제3국에서이긴 하지만, 신사 참배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고이즈미 총리와 대화를 계속해왔다. 감정보다는 국익과 실리를 앞세우며 양국관계를 ‘평화적으로 발전’시켜온 것이다. 그래놓고서는 왜 이 시점에 정상회담까지 거부하며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를 문제 삼을까. 신사 참배를 둘러싼 갈등이 증폭돼오다 ‘드디어 폭발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또 고이즈미 총리는 왜 A급 전범 별도분리 요구조차 거부하며 신사 참배를 계속하려고 할까. 자국 내에서조차 아시아 외교를 무시한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신사 참배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출발점으로 ‘전쟁상태’의 중일관계를 짚어보기로 한다.

    1972년 9월29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중일 공동성명에서 일본은 “과거 전쟁을 통해 중국 국민에 중대한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고 표명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이 유감 표명에 대해 중국은 전쟁배상금 요구를 철회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관계 정상화 이후 중일관계는 1982년 ‘침략’을 ‘진출’로 묘사한 제1차 교과서 왜곡 파동과 1985년 8월15일 나카소네 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파동으로 한때 출렁이기도 했지만, 1995년 8월15일 무라야마 총리 담화로 과거사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당시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에서 “우리나라는 국책의 오류로 전쟁으로의 길에 들어서서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민에게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다시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의 뜻을 표명합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침략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을 지칭했다. 과거사에 대한 가장 진전된 반성이었다.

    그런데 1998년 11월 장쩌민 주석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이 ‘무라야마 담화’가 문제가 됐다. 일본측은 정상회담 자리에서 ‘구두’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으나 공동선언문에 ‘사죄’를 넣자는 중국의 요구는 거부했던 것이다. 담화를 준수한다고 하면서도 거기에 표명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말을 공동선언문에 넣어야 한다는 중국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과거사 반성에 대한 일본의 진실성을 의심받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쩌민은 5박6일간의 공식일정 내내 일본의 과거 잘못을 공박하는 데 시간을 보냈고 공동성명서에 서명도 하지 않은 채 귀국해버렸다.

    중화민족주의의 폭발

    2001년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새 역사교과서를 들고 나오면서 중일관계는 또 한번 요동쳤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중국 민간인 30만명이 학살됐다고 하는 난징 대학살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새역모가 편찬한 후쇼사판(版) 중학교 역사교과서(2005년판)에 난징 학살은 이렇게 묘사돼 있다.

    “1937년(쇼와 12년) 7월7일 밤 베이징의 교외인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훈련하고 있던 일본군을 향해 ‘누군가’가 총포를 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다음날에는 중국군과 전투상태가 됐다(루거우차오 사건). 그리하여 이후 8년간에 걸친 일중전쟁이 시작됐다. 같은 해 8월 외국의 권익이 집중된 상하이에서 일본인 장병 두 명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이것을 계기로 일중 간의 충돌이 확대됐다.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면 장제스가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2월에 난징을 점령했다. 이때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중국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다(난징 사건). 또한 이 사건 희생자 수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상 의문점도 제기되고 다양한 견해가 있어 오늘날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중일전쟁에 대해 중국이 도발했다는 ‘혐의’를 두고 기술했으며 난징사건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정확한 사실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축소 혹은 논란 중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린 것이다. 또한 이 교과서는 일련의 전쟁에 관한 기술에서 ‘침략’이라는 단어를 사용치 않고 ‘진출’이라고 표현했다.

    이 역사교과서가 2001년에 이어 2005년 4월에도 문부성 검정을 통과하자 중국에서는 격렬한 반일시위가 발생했다. ‘중화민족주의’의 폭발이었다. 시위가 통제불능의 상태로 확산될 징후가 보이자 그제야 중국 정부는 진압에 나섰다.

    제3국에서의 정상회담조차 파탄이 날 조짐은 2004년 11월에 열린 두 차례의 중일 정상회담에서 드러났다. 그해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APEC 회의와 라오스에서 개최된 ASEAN+3 정상회담이 무대였다. 칠레 회담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중일 간 우호를 위해 야스쿠니 참배를 그만둘 것을 대놓고 요구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그 답변을 라오스에서 회담 상대자로 나선 원자바오 중국 총리에게 들려줬다.

    그는 “중국이 일본의 대외원조자금 수혜자 자리를 졸업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하면서 1979년부터 25년간 계속된 대외원조계획(ODA·정부개발원조)을 끝내겠다고 ‘통보’했다. 의도적인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2000년부터 대폭 삭감된 일본의 대(對)중국 ODA 자금 지원규모는 점차 줄어들다가 2008년말에는 완전히 끊길 전망이다. 일본은 이 자금을 동남아와 중남미, 아프리카로 돌릴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관계악화의 가속페달을 해를 넘겨서도 계속 밟고 나아갔다. 2005년 2월19일 워싱턴에서 미국과 일본은 새로운 군사협정에 서명했다. 대만해협의 안보가 미국 부시 행정부와 일본의 ‘공동의 전략적 목표’임을 처음으로 명시하는 내용이었다. 대만이 독립선언을 해 본토와 대만 간에 긴장이 고조되면 일본이 미국과 함께 ‘출병한다’는 것을 공개 선언한, 말하자면 대중(對中) 선전포고였다. 두 달 뒤 마치무라 외상은 공식적으로 대만을 “미일 안보조약 대상”이라며 중국의 뺨을 때렸다. 그렇지만 대만 문제는 30년 넘게 지속된 터라 정상회담 거부의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다.

    전몰자 대부분은 중일전쟁 사망자

    2005년 5월 고이즈미는 중의원에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계속할 것”이라며 결정타를 날렸다. 고이즈미 발언 직후 일본을 방문한 우이 부총리가 예정돼 있던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을 전격 취소하고 귀국해버린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정상회담 중단은 고이즈미가 야스쿠니 참배를 기정사실화한 5월에 이미 결정됐고, 10월17일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후진타오 주석이 고이즈미 총리를 상대로 말문을 닫아버린 이유가 완전히 납득되진 않는다. 야스쿠니 문제가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다, 국익 우선의 국제정치 현실에 비춰보면 이 시점에 제3국에서조차 회담을 거부할 명분으로는 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냥 예전처럼 ‘안고 갈 수도 있는 문제’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이쯤에서 야스쿠니 문제를 짚어보기로 하자. 중국이 국익도 ‘접을 만큼’ 야스쿠니를 물고늘어질 만한 이유가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 아시아 외교를 버리면서까지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를 강행하는 배경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1869년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로 창건돼 1879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853년 근대국가 수립 이후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치른 모든 전쟁에서 공적인 희생자로 인정된 전몰자를 제사 지내고 있다. 이 전몰자는 메이지 유신을 비롯해 세이난 전쟁, 청일전쟁, 대만정벌, 북청사변(혹은 의화단 사건),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남사변(일본이 장제스의 국민혁명군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산둥성에 출병해 1928년 제남에서 무력 충돌한 사건), 만주사변, 중일전쟁,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총 246만6532주가 합사돼 있다. 여기에는 조선인, 대만인도 포함돼 있고 5만7000주의 여성도 있다. 11차례의 전쟁 중 중국과 직접적으로 벌인 전쟁이 6회에 이르고 나머지 전쟁도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침략과정에 일어났던 점을 감안하면, 전몰자의 대부분은 중국과 벌인 전쟁 도중 사망한 이들로 볼 수 있다.

    야스쿠니신사가 주목받게 된 것은 1978년, 전시 내각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되면서부터다. 중국은 A급 전범을 신사에서 분리 합사(分祀)하라고 요구했는데,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는 일반 전몰자와 전쟁을 주도한 군국주의자를 구분함으로써 전쟁 책임자를 명확히 가리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지만 중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복수심’을 버리자는, 자국 국민을 향한 설득의 의미였다. 전쟁지도자만 문제 삼고, 일본군 병사들은 일본 군국주의자에 의해 전쟁에 동원된 피해자라고 간주하는 것은 중국으로선 큰 양보였다.

    “일본인의 神은 국가”

    이에 고이즈미 총리가 A급 전범들의 분사를 거부한 논리는 이렇다.

    “일본인의 감정으로는 죽으면 모두 부처가 된다. A급 전범은 이미 사형이라는 이승의 형벌을 받았다.…사자(死者)를 그렇게까지 선별해야만 하는가.”

    강국 일본을 이끄는 정치 지도자의 발언치고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런 논리로 분사를 거부하고 신사 참배를 고집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야스쿠니신사와 전후 일본의 군국주의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일본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전혀 색다른 종교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국가교(國家敎)’다. 국가를 신으로 받들며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생의 기쁨’으로 여기는 종교다. 그 국가교의 신, 즉 국가(=신)를 받들며 제사 지내는 곳이 바로 야스쿠니신사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는 일본의 국가주의는 곧 ‘국가교’라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은 신국(神國)이다. 나라가 곧 신인 셈이다. 이것은 일본인 일반의 신앙이다. 일본인의 신은 국가다. 그리하여 천황은 신인 국가를 대표하는 자로서 이른바 추상적인 국가신을 구현한 자다. 그러므로 일본인의 신앙에 비춰보면 황위는 곧 신위이고 천황은 곧 신인(神人)이다. 대다수의 일본인에게 인생의 목적은 바로 국가에 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살고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 이미 국가주의는 일본인의 종교다. 그러므로 보라. 이 국가주의에 순직한 자는 사후에 모두 신으로 모시지 않는가. 야스쿠니신사는 그중의 하나다. 이토 히로부미 공작도 신으로 모시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다카가미 가쿠쇼가 전몰자의 유족을 향해 쓴 ‘야스쿠니 정신’을 보면 야스쿠니의 실체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이 야스쿠니 정신을 발휘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은가. 국가를 위해서는 기쁘게 피를 흘려라. 유가족 여러분은 소중하게 키운 아들과 소중하게 섬기던 남편을 흔쾌히 천황의 방패로 바친 것이다. 그 아들과 남편은 지금 야스쿠니의 신으로 모셔져 언제까지나, 위로는 폐하의 참배를 받고 밑으로는 국민으로부터 호국의 충령으로서 우러름을 받는 것이다. 유가족 여러분도 그 덕택으로 대단한 감사와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야스쿠니신사 사무국이 발행한 ‘야스쿠니신사 개요’라는 팸플릿에는 신사에 합사된 영령들에 대해 ‘영원한 조국의 평화와 영광을 원하고 일본 민족을 지키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생명을 국가에 바친 동포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몰자에 대한 인식은 교과서 왜곡 논리와 너무도 흡사하다.

    야스쿠니 전몰자는 침략전쟁을 수행하다 숨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영광과 평화를 위해 죽어간 사람이라는 것이다. 야스쿠니신사 사무소가 발행한 ‘야스쿠니 신사 충혼사’는 식민지 획득과 저항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본이 벌인 전쟁을 모두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A급 전범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 즉 침략전쟁을 주도한 죄로 기소된 28명을 일컫는다. 이들은 만주사변과 이후의 중국 침략 및 태평양전쟁의 주된 전쟁책임자로서 심판받았는데, 도조 히데키 등 7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A급 전범 분사를 거부한 채 강행돼온 고이즈미의 ‘전몰자 추도’는 고이즈미 정부에서 방조하거나 적극 추진해온 다른 두 가지 사안, 즉 역사왜곡, 헌법개정 문제와 결합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즉 ‘야스쿠니신사+보통국가(헌법개정)+역사왜곡=전전(戰前)의 군국주의 일본’이라는 공식이다. 교전권(交戰權)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군대 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해 교전권과 군대를 보유하는, 이른바 보통국가론, 과거 침략전쟁을 미화하거나 옹호하는 교과서 왜곡, 그리고 침략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을 포함한 전몰자들을 야스쿠니신사에서 기리는 것이다. 이미 세계 제2위의 군사대국인 일본이고 보면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는 바로 전쟁 전 일본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각오로 비치기 십상인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자신의 신사 참배에 대해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라고 한 말이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도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역사 왜곡과 헌법개정 추진이 동시에 진행돼왔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도 갈등 요인

    하지만 신사 참배 강행에 도사린 고이즈미 총리의 ‘음모’가 아무리 흉칙한 것일지라도 대화 단절은 양쪽 모두에 득이 될 게 없다. 특히 경제성장을 위해 일본의 도움이 절실한 중국으로선 대단한 도박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중국은 그 도박에서 ‘고(go)’를 선택했다. 과연 무엇을 믿고?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로 마찰이 일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갈등보다는 협력에 치중하면서 관계를 진전시켜왔다. 중국은 일본의 경제지원이 필요했고 일본은 중국의 시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협력이 안겨주는 이익 앞에 야스쿠니 문제는 ‘해결해야 할 현안’이었을 뿐, 갈등을 분출하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런데 2004년을 기점으로 중일관계에 또 하나의 변수가 끼어든다. 바로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은 중국의 가장 큰 무역 상대국이었다. 하지만 2004년에는 유럽연합(EU)과 미국에 뒤져 3위로 떨어졌다. 중국의 2004년 무역량은 1조2000억달러로 미국, 독일에 이어 세계 3위이며 일본의 1조700억달러보다 많다. 의미심장한 변화는 EU가 중국의 최대 경제 파트너로 부상한 점인데, 이는 중국·유럽의 협동 블록이 그보다 활력이 떨어지는 일본·미국의 협동블록과 대결할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국가정보회의는 중국의 국민총생산(GDP)이 2005년에는 영국, 2009년에는 독일, 2017년에는 일본, 2042년에는 미국과 같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세계은행의 전 중국 담당 부국장이자 파키스탄 전 재무장관인 샤히드 부르키는 중국이 향후 20년간 6%의 경제성장을 유지할 경우 2025년에는 구매력 평가로 환산해 GDP 25조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반면 일본은 2010년께부터 인구가 급격히 감소해 “몰락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했다. 게다가 일본의 번영은 점점 더 중국과의 유대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일본의 대(對)중국 수출은 2001년에서 2004년 사이 70%나 급증해 불황의 일본 경제를 떠받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중국이 일본에 저자세로 나갈 이유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은 일본에 ‘노(No)’라고 할 수 있는 ‘준비된 강대국’으로 떠오른 것이다. 2003년 후진타오가 총서기로 들어선 후 ‘고개를 낮추면서 실리를 추구’해온 과거 장쩌민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외교노선이, 주변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평화적으로 ‘떨쳐’ 일어선다는, 이른바 ‘평화굴기(平和푞起)’ 외교로 전환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2005년 5월 중의원에서 “야스쿠니를 다시 참배하겠다”는 ‘고이즈미 선언’이 터져 나왔을 때 중일 간 갈등을 키워온 모든 요인은 후진타오 주석의 정상회담 중단 결정에 힘을 실었다. 야스쿠니 문제가 갈등의 분화구가 된 것이다.

    실보다 득이 큰, 정상회담 거부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강행에 대한 중국의 정상회담 거부 방침은 결코 즉흥적인 결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선 명분 싸움에서 충분히 우위를 확보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중국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둘러싼 갈등의 초점을 ‘A급 전범’에 맞춤으로써 이를 거부하는 일본의 부도덕성을 부각한 반면 중국의 피해자 이미지를 충분히 알린 측면이 있다.

    이는 대외적으로, 특히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반면 중국에 대한 반감을 줄이고 호감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일본이 돈을 쏟아부으며 아세안 지역의 패권 유지에 공을 들여온 반면 중국은 도덕적 우위와 거대한 잠재력으로 그 자리를 노려온 것을 고려하면 현 시점에서 정상회담 거부는 실(失)보다는 득(得)이 클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

    둘째, 탈냉전 이후 중국사회의 이념 공백을 메워온 중화민족주의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 중국 지도부의 정당성을 높이고 내부 응집력을 다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측면이 있다. 우이 부총리는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 취소 후 중국으로 귀국한 데 대해 야스쿠니신사 문제에서 밀릴 경우 “후 주석의 책임문제가 불거질 수 있어 불가피했다”고 말한 바 있다. 중국에서 야스쿠니신사의 A급 전범 분사 문제는 더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인식되고 있어 후 주석조차 운신의 폭이 그만큼 제한돼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 후 주석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연거푸 모욕을 받았고, 이제 이를 타개해야 할 시점으로 보고 강경대응으로 나갔다는 분석이다.

    셋째는 명실상부한 ‘굴기’ 외교의 선언이라는 분석이다. 유럽이 중국 제1의 무역상대국으로 떠오르고 일본의 중국 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일본과 정면승부를 선택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일본과 사실상 도처에서 패권경쟁이 시작된 마당에 먼저 싸움을 걸진 못해도 일본이 걸어온 ‘도발’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중국이 쏘아올린 최초의 유인우주선 선저우 1호가 귀환하는 날에 맞춰진 것도 양국 간의 신경전을 보여주는 일화다.

    국가주의와 중화민족주의 충돌

    넷째, 정상회담 거부가 중국의 다극화 세계전략이 본격화하면서 불거져 나온 ‘부스러기’라는 관측이다. 일본의 정치평론가 후나바시 요이치는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주변화하고 일본을 고립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고 했다. 중국은 몇 년 전부터 유일 초강대국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보다는 다수의 나라가 경쟁하는 다극화된 세계를 추구해왔다.

    고이즈미 총리의 국가주의와 후진타오 주석의 중화민족주의가 마침내 충돌했다. 갈등 분출은 후진타오 주석의 달라진 행보에서 비롯됐다. 고이즈미 총리는 과거와 똑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지만 후진타오 주석이 정책을 바꿨다. 적극 대응으로 돌아선 것이다. 갑작스런 태도 변화로 볼 여지도 없지 않지만, 후 주석이 선택한 시점은 전략적 계산의 산물이다.

    후진타오 주석은 집권 3년을 맞았다. 여러 쟁점을 두고 중일관계가 꼬여 있지만, 실제 손해 보고 있는 것은 신사 참배 문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대만 문제나 영토 분쟁에서도 국익이 손상되지는 않고 있다. 일본을 제외하면 그의 화평발전 외교노선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제는 그의 지도력 검증이 강하게 요구되는 대외정책 영역이다. 일본 문제에 대해 그는 중화민족주의를 불러내는 노선을 택했다.

    탈(脫)냉전 이후 13억 인구의 개혁개방 틈새를 메워온 중국의 이데올로기는 중화민족주의다. 사회주의 외피를 벗어던진 후 심각한 정체성 위기 속에서 중화민족주의는 때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국가주의 혹은 애국주의로, 때론 중국의 과거 영광을 재현하자는 신보수주의로, 때론 중국 특유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신좌파의 얼굴로 나타나고 있다.

    2005년 4월 폭발적으로 분출된 중국의 반일시위를 생각해보면, 후 주석의 대일(對日)정책 전환은 고이즈미 총리의 행동을 눈감아줌으로써 다른 분야에서 얻는 ‘협력의 이익’보다 고이즈미 총리와 등을 돌림으로써 얻는 ‘갈등의 이익’이 더 클 것이라는 전략적 계산의 결과로 보인다. 중국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실리는 챙기되 갈등은 당분간 담아갈 생각인 듯하다.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 역시 계산된 행동임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지금은 총리의 신사 참배가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의 행동에 비춰보건대 앞으로는 천황까지 야스쿠니 참배를 시도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야스쿠니가 초점의 대상이 되지 않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히로히토 천황은 야스쿠니를 참배했다. A급 전범이 합사된 이후 천황은 참배하지 않고 있다. 천황의 신사 참배 가능성을 꺼내는 것은 야스쿠니의 제주(祭主)가 천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배와는 다른 한 켠에서 일본은 군사재무장을 준비하고 있다. 과거 침략전쟁의 역사를 ‘정의의 전쟁’으로 보는 우익세력이 정계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고, 총리의 신사 참배는 그들의 보호막이 되고 있다.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를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진타오 주석의 강경대응이 ‘고이즈미 이후’까지 예상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고이즈미 총리 이후의 일본을 이끌 가장 유력한 후보인 아베 신조 관방장관은 고이즈미 총리 못지않은 신사 참배 옹호론자다. 그리고 신사 참배의 최종 목표는, 일본은 부정하고 있지만 주변국은 모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강력한 경제·군사대국 일본이다. 이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싼 중일 간 갈등이 가까운 시일 내에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은 중일 양국이 걸어가는 길이 이처럼 판이하기 때문이다. 갈등의 출구는 갈등의 입구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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