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cm의 작은 체구로 홀로 중동의 오지를 누비며 새로운 세계를 서양에 알린 여성 탐험가 프레야 스타크.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전해 내려오는 알라무트 요새와 인도양 연안의 고대 항구 카나에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그는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오지 탐험을 멈추지 않은 20세기 최고의 여행자였다.
이러한 시기에 여자의 몸으로 홀로 중동 오지를 누비며 서양에 새로운 세계를 알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조국 영국을 위해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린 이가 있었으니 프레야 스타크(Freya Stark·1893∼1993)가 바로 그다.
프레야는 영국 남부 데번에서 출생한 아버지 로버트가 이탈리아 태생의 어머니 플로라의 등쌀에 못 이겨 함께 그림공부를 하려고 파리에 머물던 1893년 5월 태어났다. 프레야 가족이 파리를 떠난 것은 한 살 아래의 여동생 베라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유럽 곳곳을 마실 다니듯 하던 부모를 따라 프레야 또한 어릴 때부터 영국과 이탈리아 등을 오가며 자랐다. 여행가로서의 삶은 어쩌면 그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홉 살 때 ‘아라비안나이트’를 생일선물로 받고는 그때부터 이야기의 무대인 오리엔트 땅으로 가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체구가 왜소해 키가 고작 153cm에 지나지 않았고, 병을 달고 산다고 할 정도로 약골이었다. 그런데도 프레야는 아버지를 닮아 운동을 좋아했다. 그가 주로 살던 곳은 베네치아의 서북쪽에 위치한 중세풍의 작은 산골마을 아솔로였다.
가정은 단란하지 못했는지 프레야가 열 살 되던 해, 극심한 성격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별거를 선언했고 이혼으로 이어졌다. 그후 그가 캐나다로 이주한 아버지를 본 것은 두세 번뿐이었고 대신 편지를 주고받으며 부녀의 정을 나눴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그때그때 자신이 보고 느낀 것, 그리고 하고 싶은 말들을 편지에 적어 아버지에게 보냈다. 이때 미리 문재(文才)를 보였으며 훗날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가정형편상 제대로 된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영어와 이탈리아어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 능숙하게 구사했고, 프랑스어는 뒤마의 소설을 통해, 독일어는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하지만 고등교육만은 1912년 런던대학 부속 베드퍼드 여자대학에 진학해 정식으로 수학했다. 전공은 영문학. 이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이미 60대에 접어들어 중세문학과 고전학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윌리엄 페이턴 커 교수였다. 프레야는 “내가 아는 영국 문학은 모두 교수님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모처럼 시작한 학업도 마침 터진 전쟁으로 끝맺지 못했다. 이탈리아로 되돌아가 간호사를 자원한 그는 막판엔 전장에도 나갔는데 그게 잘 맞았던 모양이다. 텍스트에 파묻혀 지내는 것보다는 모험을 즐기는 성격이라 현장을 좋아했다. 관심도 자연스레 문학비평에서 역사로 바뀌었다.
34세 때 중동탐험 첫발
전쟁은 끝났지만 먹고 살 길은 막막했다. 이탈리아 사람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바닥을 헤매는 생활이 계속됐다. 무엇보다 지식의 향연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루고자 새로운 세계로 탈출을 시도했다.
커 교수는 아이슬란드어를 배울 것을 권했으나 그는 아랍어를 배우기로 했다. 아랍어 사용인구가 많은 데다 앞으로 석유가 국제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질 것으로 봤다. 베이루트에서 30년간 활동하다 귀국한, 하얀 턱수염을 기른 카푸친회 수도사를 아랍어 선생으로 모시고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갔다. 아랍어를 배우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서.
10세 때의 프레야 스타크.
그해 11월, 34세의 프레야는 베이루트로 가는 작은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최초의 중동지역 여행이었다. 갑판 의자에 앉아 지중해의 넘실대는 파도를 보자 아랍어를 배우고 이름난 탐험가들의 모험담을 모조리 구해 읽으면서 머릿속에 모래땅 중동을 그려본 그 오랜 날들이 떠올랐다. 바로 그 땅을 자신의 두 발로 직접 디딜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수중에 가진 것이라곤 단테의 ‘신곡’ 한 권과 얼마 안 되는 돈, 리볼버 권총 한 자루, 그리고 털 코트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마음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레바논에선 주로 브루마나에 머물면서 현지실정을 파악하고 아랍어를 익혔다. 또한 강대했던 우마이야 제국의 수도로서 영광스러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아랍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위대한 도시 다마스쿠스를 다녀왔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다마스쿠스는 너무나 초라했다. 영광스러운 역사를 말해주는 건물은 무너지고 도시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종교와 부족 간의 전쟁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지저분하고 불편한 생활에 이골이 난 그였지만 식사를 할 때엔 단테를 읽으며 자신이 뭘 먹는지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막에 사는 토착민 족장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을 만나자 그들이야말로 기사도 정신과 명예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아랍의 마지막 보루란 것을 깨달았다. 그가 아무런 지위도 없는 아랍의 토착민과 어울리려 한 것은 이런 점을 일찍이 간파했기 때문이리라. 오지의 베두인들이 무식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그 자신 역사의 과정에 행위자(actor)로서 참여하겠다고 결심했다.
홀로 여행하며 오지 토착민과 교류
다시 브루마나로 돌아온 프레야는 새 봄이 오자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새벽시간을 이용해 당나귀를 타고 드루즈파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드루즈파는 외세에 거세게 항거하며 1000년 가까이 고립된 생활을 영위해왔다. 그들은 대개 바위투성이로 이루어진 산악지대에 살았다. 다른 종족과는 결혼도 하지 않으며, 이슬람교를 믿는데도 모스크를 세우지 않았고 예배시간도 지키지 않았다.
프레야는 갖은 고생을 다하며 드루즈파의 본거지로 들어갔지만 곧 그 지역을 지키던 프랑스 군인에게 붙잡혔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이 지역의 관할권을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드루즈파는 영국 편을 들었고 프랑스는 이들과 앙숙관계인 마론파 기독교도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따라서 프레야의 체포는 자칫 국제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런 사실이 영국에 알려지면서 그의 명성은 오히려 드높아졌다. 예루살렘과 카이로에 들렀다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캐나다로 가 아버지를 만나고는 런던에서 발간되는 ‘콘힐’지에 드루즈족 탐험기사를 기고했다.
1929년 10월 말, 프레야는 다마스쿠스와 트란스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지를 거쳐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아랍인과 사귀면서 아랍어를 익혔고 페르시아어 등 동방언어도 배웠다. 틈틈이 저명한 여성 여행가이자 ‘아라비아 로렌스’의 친구였던 게르트루드 벨과 이븐사우드 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천재 탐험가인 존 필비의 여행기를 탐독했다. 또 이슬람 세계의 낯선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데는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코란의 교리도 배우기 시작했다.
프레야는 바그다드를 매우 낭만적인 곳이라고 생각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도시이자 압바스 왕국의 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본 바그다드는 오스만 제국의 압제를 받으면서 망가질 대로 망가져 볼품이 없었다. 1920년 상 레모 조약에 따라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이라크란 국명을 사용하게 된 이 나라는 메카의 지도자인 파이잘과 1916년 오스만제국에 대항해 ‘사막의 항거’를 주도한 로렌스가 그럭저럭 꾸려가고 있었다.
하루는 사막에 사는 베두인 족장에게서 초대를 받았다. 그는 아랍어 선생의 사촌이었다. 프레야를 아는 사람들은 초대에 응하지 말라고 했으나 유럽 여성 한 사람과 길을 떠났다. 프레야 일행은 족장의 환대를 받고 하얀 매트리스와 자주색 쿠션이 있는 전형적인 베두인의 검정 천막 속에서 한동안 지냈다.
프레야는 베두인족을 좋아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베두인은 마지막 남은 물 한 방울까지 낯선 방문자에게 나누어준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베두인어는 시적 언어다. 시적 표현이 매우 풍부하다. 아랍인들은 서구인들처럼 텍스트를 통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으로 역사를 이해한다. 종교는 여전히 큰 힘이다”라고도 했다.
그는 고고학자로 불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울리가 고고학적 대발견을 하던 시절에 이라크에 있었던 것을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가 보여준 우르의 지구라트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함께 걷던 거리의 집 하나하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엔 상점이 있었고, 저곳엔 학교가 있었다고 설명해줬다”고 자랑하곤 했다. 당시 이라크는 영국식 입헌군주국으로 첫발을 내딛던 시기로, 그때의 바그다드에 대해 프레야는 1929년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오늘 아침 바그다드는 그 옛날의 아라비안나이트를 재현했다. 공중에 매달린 채색 발코니, 넓은 가로와 연결되는 좁은 골목, 흰색 갈라비아(아래위가 통하는 헐렁한 남성 복장) 차림에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
유럽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가 집을 구한 것은 그때쯤이고 또 집이 자기 맘에 쏙 든다고 했다. 전통적인 아랍인 지구에서 한 달에 1실링짜리 방을 빌렸는데, 방 한쪽이 커다란 창이라 그 앞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티그리스 강이 내려다보였다.
이 시기 그는 쿠웨이트와 이라크 남부 습지를 여행했으며 거기서 고기잡이배도 보았다. 석유 붐이 일기 전 진기한 풍경의 쿠웨이트 시장을 사진으로 찍어 서구인들에게 전했다. 당시 바그다드와 쿠웨이트의 풍경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바그다드 타임스에 기고한 에세이를 묶어 발간한 ‘바그다드 스케치’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왕립지리학회 ‘백 기념상’ 수상
프레야는 1930년 4월, 달랑 지도 한 장을 들고 바그다드를 출발해 ‘아사신파’라는 비밀 조직이 있는 페르시아의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아사신파 이야기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엘부르즈 산맥의 알라무트 산에 ‘산상의 노인’이 산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상의 노인 무하마드는 시아파의 하나인 이스마일파의 지도자였다. 그곳에는 1090년 하산이 조직한 ‘아사신’이라는 암살단이 살고 있었다. 자객을 뜻하는 ‘어새신(assassin)’의 어원인 아사신은 아랍어 ‘하시시(대마)’에서 유래된 말이다. 비밀조직인 암살단을 훈련할 때 대마 같은 약물을 이용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하마드는 열두 살에서 스무 살까지의 청소년들을 눈을 가린 채 각지에서 데려왔다. 요새는 무릉도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절세미인과 맛있는 포도주와 산해진미가 소년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언제나 마약과 함께 주어졌다. 암살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했다. 그것은 낙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프레야는 이 이야기를 토대로 알라무트 산 일대를 탐험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서양 여성이 홀로 험준한 산속으로 찾아들어온 것을 본 토착민들은 기특하다고 여겨 식사와 잠자리 등을 제공했다.
그는 마침내 안내인 없이는 찾기 힘든 높다란 바위산 골짜기 뒤편의 알라무트 요새에 닿았고 위치와 특징을 세세히 관찰했다. 그리하여 영국 지도에 빈 공간으로 남아 있던 곳을 채우게 됐는데, 프레야는 그 일을 자신이 해냈다는 데 자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지 4년 만에 그 내용을 ‘아사신의 계곡’이란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고, 이 일로 필명을 날렸다.
알라무트 산을 다녀온 지 꼭 1년 뒤인 1931년 6월, 프레야는 다시 바그다드로 향했다. 이제 바그다드는 낯선 땅이 아니었다. 환영해주는 사람도, 부탁만 하면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할 친구도 많았다.
그가 찾고자 한 곳은 아사신파 성채가 함락된 뒤로 오랫동안 몽골군에 항거했던 라미아세르 성과 샤루드 계곡이었다. 쿠르드족 거주지역으로 잠입해 절벽 위로 솟은 라미아세르를 발견하고는 꼭대기에 올랐다. 왕립지리학회에 보낼 성채의 급수관과 저수시설을 촬영한 다음 테헤란으로 돌아왔다. 테헤란에선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캐나다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바그다드로 발길을 돌렸다.
예멘 고대 항구 카나 찾아내
1933년 6월, 런던으로 돌아온 프레야는 왕립지리학회로부터 지도상에 잘못 된 점을 바로잡아준 공로로 지리학 발전에 기여한 지리학자와 탐험가에게 주는 ‘백 기념상’을 수상했다. 방송사에선 강연을 해달라고 했고 출판사는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파티에도 초대되어 유명 인사들과 사귀게 됐는데,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을 접수한 앨런비 장군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①고대 페니키아 문명이 남긴 티레 유적. 레바논의 동지중해 연안에 있다. ② 동지중해의 진주라 부르는 베이루트. ③ 아라비안나이트
1934년 11월, 청명한 어느 날 프레야를 태운 범선은 홍해를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먼저 찾은 항구도시 아덴에서 사업가이자 아라비안 전문가인 스튜어드 페론을 만났다. 두 사람은 후일 결혼에 이를 정도로 가까워졌다.
또 한 사람을 만났는데, 당시 57세인 앵토냉 베세였다. 독신 장교들이 득실대는 아덴에서 홍일점 프레야는 베세의 사무실로 출근하다시피 하며 공부하고 사랑하고 차 마시고 파티에 참석하는 등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황홀한 한 달을 보내면서 사브와로 가는 대략적인 루트를 짠 프레야는 1935년 1월 증기선을 타고 무칼라로 갔다. 그때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늘에는 오리온자리와 황소자리, 묘성이 빛나고 있었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 세 개와 녹색불빛 하나를 빼고는 아무런 불빛도 보이지 않았고, 불빛 속에 물방울이 비처럼 쏟아졌다.”
무칼라에 도착해 무칼라 궁전과 시장을 둘러보고는 돌투성이의 불모지 속으로 들어갔다. 늘 베세가 곁에 있어 힘이 됐다. 내륙은 지독한 오지였다. ‘얼마나 씻고 싶은지 말도 못할 지경’이라고 했을 만큼 물 한 방울 구하기조차 힘들었다. 거기다 홍역까지 덮쳤다.
무칼라를 떠난 지 한 달 만에 중세 아랍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세이윤에 도착했다. 힘들었지만 드디어 아찔할 만큼 높이 솟은 탑이 있는 하트라마우트에 닿았다. 마을 사람들은 프레야를 환대했다. 프레야는 그곳에서 겪은 바를 ‘아라비아의 남문’에 꼼꼼하게 기록해놓았다.
시밤으로 가는 길에 프레야는 금세라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사브와가 멀지 않은데. 다행히 영국 공군에게 구조되어 아덴으로 이송됐다. 몇 주간 요양을 하고는 이탈리아로 가는 배에 올랐다. 유럽으로 돌아온 다음인 1935년 여름 한 달 동안 베세와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삶에서 그때처럼 행복한 시간은 없었다.
1937년 10월 말, 프레야는 다시 아덴으로 향했다. 사브와에 대한 집념이 그를 다시 그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게르트루드 카튼 톰프슨과 엘리너 가드너와 함께였다. 11월 중순, 구닥다리 트럭을 타고 내륙으로 들어갔다. 세이윤을 지나 고층 흙벽돌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시밤에 이르렀다. 그걸 보는 순간, 고대 예멘인이야말로 고층 건물의 발명가란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여러 남자를 만났지만…
동료 여성들이 고열을 호소하는데다 프레야 자신도 몸져눕는 바람에 아덴으로 돌아가야 했다. 장기간 요양한 끝에 건강을 회복한 그는 다시 후레이다로 가 와디 아무드를 답사하고는 거기서 낙타를 타고 남하하여 인도양 연안의 고대 항구 카나의 위치를 밝혀냈다. 그곳은 한때 캐러밴이 유향을 실어 나르던 곳이기도 했다. 프레야는 끝내 사브와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 그곳은 정신 속에 살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많은 사람이 사브와의 존재를 알도록 귀한 계기를 제공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당시 유럽에선 전쟁의 징후가 도처에서 감지됐다. 1938년 겨울 내내 프레야는 런던에 머물면서 자신의 여행담을 친구들에게 들려줬다. 스튜어트 페론을 다시 만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명문 주교 가문 출신에다 중동전문가인 페론은 이듬해 8월 아덴으로 돌아갔다.
9월에 전쟁이 터지자 프레야의 활동무대인 중동지역도 전화에 휩싸였다. 프레야는 페론을 뒤따르듯 카이로를 거쳐 아덴으로 갔다. 이번 여행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현지 실정을 정부에 보고하는 공식적인 것이었다. 그 자신도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봉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기념조각이 서 있는 바그다드 신시가지.시바의 여왕이 지나간 길목에 자리잡은 예멘의 수도 사나. 고층 흙벽돌집이 유명하다.
그 일이 끝나자 카이로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랑하는 페론과도 이별이었다. 당시 카이로에는 영국의 중동지역 총사령부가 있었다. 프레야는 이집트인을 끌어들어 자유형제단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라크에서도 그런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바그다드로 갔으나 적군에 의해 도시가 포위될 위기에 처한 터라 기대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10월, 프레야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친(親) 이스라엘적인 미국의 대(對) 중동정책의 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방송에도 출연하고 대중강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행동은 애국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깨달은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중동정책은 더욱 친이스라엘적으로 나아갔고 급기야 이스라엘의 건국이란 결과를 가져왔다. 그에 따라 네 차례에 걸쳐 중동전쟁이 터졌다. 그가 예측한 대로였다.
90세 넘어 중앙아시아 탐험
1947년, 드디어 페론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5년 만인 1952년에 끝났다. 페론이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에서 일하다 보니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고 급료도 넉넉지 않아 원하는 생활을 꾸려갈 수 없었다. 많은 부분을 프레야의 돈으로 해결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결혼생활이 구속처럼 느껴졌다.
그는 사랑을 느껴 결혼 직전까지 간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결혼운은 없었다. 여러 남자와 때론 연인으로, 때론 친구로 사귀었다. 그러다 쉰이 넘어서 페론과 결혼에 골인했지만 5년 만에 파탄을 맞은 것이다. 그 탓에 평생 여행가로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젊어서 중동과 유럽의 여러 곳을 다닌 프레야는 60대에 들어서도 여행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가보지 못한 중앙아시아와 극동을 돌아다녔다. 먼저 아나톨리아를 찾기 위해 터키를 소재로 한 탐정소설을 읽으며 터키어를 배웠고, 말을 타고 터키의 오지 곳곳을 누볐다. 1961년엔 동아시아를 여행했다. 앙코르와트를 지나 베이징의 자금성에도 갔다. 이곳에서 진귀한 도자기들을 보고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72년엔 ‘데임(Dame)’ 칭호를 받았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청을 받아 버킹엄궁전에서 열린 만찬을 함께했다. 84세가 된 1977년에는 BBC와 시리아 국영TV의 후원을 받아 유프라테스강 뗏목 탐사를 벌였고, 89세에 들어선 조랑말을 타고 네팔의 히말라야와 파미르 고원 트레킹을 시도했다. 생애 처음으로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그리고 타슈켄트 등 중앙아시아의 캐러밴 도시를 여행한 것도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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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하기 직전까지 오지 여행을 멈추지 않은 프레야 스타크는 만 100년을 살고는 1993년 5월9일, 봄꽃이 돌로마트 산록을 뒤덮을 무렵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마치 저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듯이. ‘런던타임스’는 그날 반 페이지를 할애해 ‘그는 반평생을 극소수의 유럽인만이 알고 있는 세계를 탐사했다’는 제목의 부음 기사를 내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