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이어져온 폭발적 성장세와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목도하며 모두들 21세기야말로 명실상부한 중국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쏟아낸다. 그렇다면 이제 미국에 남은 길은 지나간 시점의 영광을 되뇌며 쓸쓸히 사그라지는 것뿐일까. 미 국무부 정책기획 파트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아시아 전문가 대니얼 트위닝은 “그렇지 않다”고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미국과 공유하고 있는 인도를 활용하면 지금의 대세를 근본적으로 뒤집을 길이 있다는 것. 절대적인 경제·안보·군사 협력을 통해 인도의 부흥을 이끌어냄으로써 아시아에서부터 베이징을 견제해나가는 것이야말로 떠오르는 중국의 세기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이야기다. 21세기를 ‘인도-미국의 세기’로 만들어 자국의 영광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그의 이러한 주장은, 세계를 ‘거대한 체스판’으로 보고 행마를 읽는 워싱턴 전략가들이 중국의 부상을 지켜보며 어떠한 그림을 준비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보여준다. 영문계간지 ‘글로벌 아시아’ 2011년 봄호에 실린 글을 번역, 게재한다. |
인도는 1947년 독립 이후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국제정치적 환경과 내부적 한계로 인해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2%에 지나지 않던 극도로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 이 나라는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최근의 급속한 성장세가 이어진다면 머잖아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자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국가로 발돋움할 것이고, 그에 따라 국제질서의 중심국가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세계는 중국이 부상하는 동안 느꼈던 심대한 변화를 다시 한번 겪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는 그 변화의 방향이 미국에 좀 더 긍정적일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냉전 기간 인도는 미국과 거리를 두는 전략을 택했지만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구도가 종말을 고하고 세계화가 대세가 된 2000년 이후, 세계의 민주주의 강대국들은 새로운 친분을 쌓아가며 신(新) 세계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는 인도가 이러한 새 세계체제의 ‘경합국(swing state)’이 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인도가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의 장기적인 입지가 결정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과거의 인도가 세계질서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나라였음을 감안하면 실로 놀랄 만한 변화다.
혁명적 변화
잠시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려보자.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까지만 해도 인도는 세계제국의 전략적 중심이었다. 이 시기 인도군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과 동남아는 물론 중국에도 주둔했다. 19세기 초까지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인도의 경제적 부는 영국이 제국주의적 야망을 이루는 바탕이 됐고 영국의 산업을 일으키는 촉매구실을 했다. 작은 섬나라 영국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쓰러뜨릴 수 있던 배경에는 인도의 인적·물적 자원과 지정학적 위치가 숨어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 이후 인도는 국내적으로 구(舊)소련 식 중앙집권정책을 펼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비동맹노선을 채택했다. 특히 미국이 파키스탄이나 중국과 수교를 맺자 이에 대응해 소련과 암묵적인 동맹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인도가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소외되는 결과를 낳았고, 중국과 달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서 제외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비확산 체제가 구축되기 전에 핵실험을 단행한 중국은 핵무기 보유나 거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뒤늦게 핵 개발에 뛰어든 인도는 국제법에 의해 ‘불량국가’로 간주되면서 기술교역에 제재를 받았고 그로 인한 안보 약화와 경제발전 저하를 감수해야 했다. 특히 1980년대 중국이 인도의 적국인 파키스탄에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고 서방세계가 이를 묵인하자 인도의 대(對)서방 인식은 급속도로 악화됐고, 1998년 인도 핵실험에 대해 미국과 중국의 정상이 한목소리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이 같은 인식에 기름을 부었다. 미국은 인도를 억압하는 데 앞장섰고 인도는 이를 강도 높게 비판하던 시기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분위기는 급반전하고 있다. 날로 성장해가는 중국의 국력을 위협으로 인식한 미국은 인도와 협력해 중국을 억제하는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지 모색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이 인도를 미래의 강대국으로, 그것도 다원적 민주주의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아시아의 균형자로 보게 된 것이다. 결국 미국은 인도를 기존의 핵 국제질서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부시 행정부는 서방 중심의 핵 보유 질서를 흔드는 놀랄 만한 선택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인도는 민수용 핵 기술의 국제 거래에 참여할 수 있게 돼 장기적인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도의 지도자들은 미국과의 협력 증진이 자국의 미래를 위해 외교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이른바 ‘전략적 개방정책’이 채택된 배경이다. 이후 인도는 적극적인 외교전략을 구사하면서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고 국제정치 무대의 정상 반열에 올랐고, 세계 열강으로 진입하는 길을 열 수 있었다. 불과 지난 10년 남짓의 시간 동안 벌어진 혁명적인 변화다.
오바마 행정부 역시 인도 포용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 11월 인도 방문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의 G2 체제가 아시아와 세계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임기 초의 인식에 종언을 고했다. 대신 그는 미국과 인도가 함께 아시아의 안보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바람직한 통치(good governance)’를 각국에 확산시켜 나가자는 비전을 제시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전통을 갖고 있는 인도를 이용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자는 새로운 구상은 워싱턴 정가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는 또한 지난 세기 이어져온 미국의 영광이 21세기에도 이어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인도의 부상에서 미국이 얻을 수 있는 핵심적 이익은 과연 무엇인가. 우선 미국을 훌쩍 넘어 계속 증가하는 인도의 중산층 인구는 장기적으로 미국 상품과 서비스, 외국인 투자에 있어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해외시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인도의 인구와 경제 성장률은 이미 중국을 추월했다. 더욱이 주요 선진국이나 한국, 중국 등의 신흥 강대국들이 이미 노령화 사회에 접어든 것과 달리, 꾸준히 증가하는 인도의 청년인구는 향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안보 영역에서도 인도와 미국의 이해관계는 하나로 만난다. 두 나라 모두 테러리즘 척결의 최전방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조직적인 활동에 맞서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 자국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갖추고 국민의 기본적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하도록 협력하는 일에도 미국과 인도 모두의 매우 중요한 국가적 이해가 걸려 있다. 특히 그간 국제무대에서 가공할 만한 권력을 누려온 미국과 오랫동안 중국과 분쟁을 치러온 인도 모두 중국의 부상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중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인도의 부상에서 미국이 갖는 가장 중대한 이익은 국제체제 전체에 미칠 인도의 내적 가치에서 비롯된다. 중국이 이끄는 세계질서, 다시 말해 국가자본주의와 중화사상에 입각한 독재체제로 이뤄지는 국제질서는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의 이해에 부합하기 어렵다. 대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인도의 성장은 중국이 이끄는 질서와는 다른 세계 질서를 만들어낼 열쇠가 될 것이다. 세계 최강 미국과 급부상하는 인도의 튼튼한 동맹을 바탕으로 국제사회를 보다 열린 사회로 유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자유주의 시장질서가 대세를 이루는 토대 위에서 미국과 인도가 일본, 유럽, 한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의 파트너 국가들과 함께 열어가는 다원주의는, 중국이 지배하는 세계 혹은 중국의 의지가 무조건적으로 관철되는 국제무대보다 훨씬 미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한다.
그간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는 중국식 권위주의 발전모델인 ‘베이징 컨센서스’가 새로운 세계체제로 굳어져갈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도가 평화로운 번영을 추구하면서도 비서구적인 현대성을 만들어내는 대안으로 자리매김한다면 그러한 질서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미국과 인도가 전략적 파트너로서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낼 경우 그 위에서 번영을 구가하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과 그 우방국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인도가 민주주의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일은 미국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경제와 군사
그렇다면 미국과 인도가 협력을 통해 안정과 번영을 다른 국가들에 전파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우선은 포괄적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 협력기반을 튼튼히 할 필요가 있다. 실리콘밸리 등 미국의 경제혁신을 이끄는 지역에서 인도의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첨단기술을 선보일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작업이 급선무다. 공공과 민간의 협조를 통해 에너지 문제나 기후변화 문제에서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는 작업도 중요한 지렛대가 될 것이다. 인도는 각종 장학제도를 비롯한 미국과의 교육 분야 교류를 확대해 고급인력 풀을 확장하는 한편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를 폐지해 더 많은 미국 자본을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안보 분야에서의 협력은 이미 궤도에 올랐다. 인도는 이미 미국과 가장 자주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국가이고, 미국의 해군함정이나 수송기, 기타 군사장비를 구매하는 데도 강한 열의를 보이고 있다. 인도가 미국의 5세대 다기능전투기를 구매한다면 이러한 흐름은 새로운 차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양국 공군의 훈련과 정책, 군수조달이 이미 해군에서 이뤄지고 있는 수준까지 통합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훈련과 장비의 협력을 넘어 군사동맹의 다음 단계는 인도와 미국 사이의 안보 협력을 일본, 한국, 인도네시아, 호주, 태국, 싱가포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다른 전략적 협력국가로 확대해나가는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미국-일본-인도 3국 간 협력일 것이다. 세 나라를 합친 군사력은 실로 막강할뿐더러, 군사기술 분야에서 상호보완적 성격이 강하고, 인도양과 서태평양 공해 수역의 자원을 자율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 인도는 올해 내로 3국 고위급 안보회담을 열어 아시아의 전략적 안정이라는 방어벽을 만들어내는 계기로 삼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바람직한 통치’의 확산
두 나라 사이의 협력이 필요한 네 번째 분야는 ‘바람직한 통치’를 다른 주변국가로 전파하는 일이다. 인도의 지도층은 이미 주변국들의 민주주의 정착이 자국 안보의 원천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략적 계산 아래 아프가니스탄에 바람직한 통치를 위한 기관 설립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고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네팔 등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내부분쟁을 해결해 민주주의적 가치에 부합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미국과 인도는 그간 다양한 다자간 활동을 통해 해당 지역의 전환기 국가들을 지원하는 일에 협력해왔다. 또한 최근의 민주화 열풍과 관련해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와 중동국가들이 민주적 통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협력할 방법은 무엇인지 두 나라가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인도와 미국은 이미 제3세계 국가 내부의 인권개선과 법치주의 회복을 위한 협조가 양국관계를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이 냉전기간 형성했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줄 것이고, 부상하는 인도에도 이익이 될 것이다. 이제 중국의 세기는 잊어버리기를 바란다. 미국과 인도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21세기는 미국과 인도의 세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 원문은 www.globalasia.org/ V6N1_Spring_2011/Daniel_Twining.html 참조)
* ‘Global Asia’는 동아시아재단이 발간하는 국제문제 전문 계간 영문저널이다. ‘21세기 아시아가 열어가는 세계적 변화의 형성과정을 주목한다’는 기조 하에 아시아 지역 주요 현안에 관한 각국 전문가와 정책결정자들의 공론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