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일본 유화 제스처는 제국군대 부활을 위한 꼼수

한일 외교분쟁에 대한 일본계 귀화 지식인의 고언

  • 호사카 유지│세종대 교수·정치학박사 |hosaka@sejong.ac.kr

    입력2012-09-21 1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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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박 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 방문과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일왕의 사과 요구 발언으로 촉발된 한일 외교분쟁이 일본 정부의 전략적 후퇴로 일단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떠오르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 정부의 일회적 제스처에 불과하다. 독도 문제를 영토분쟁화하려는 공세는 멈추지 않는다. 700년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측은 불리하면 숙이는 척하고 빈틈이 보이면 공세를 취한다. 그들의 유화 제스처 뒤에는 자위대의 군대 지위 상승과 유엔 안보리 이사국 진출이라는 부동의 목표가 자리 잡고 있다.
    지난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계기로 한일 간에 외교 분쟁이 벌어졌다. 독도 방문 직후 이 대통령의 일왕 과거사 사과 요구 발언 등이 이어지면서 일본은 격분했다. 이성을 잃은 듯한 일본 정부의 격한 대응에 양국 정부와 국민의 대립은 가열됐다. 일본 정치권이 여야를 막론하고 강경 일변도로 한국을 압박하며 총공세에 나선 속내는 뻔해 보인다. 여야가 가까운 시일 내에 총선을 실시하기로 합의한 상황에서 집권 민주당으로선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에 온순하게 대처하면 그렇지 않아도 낮은 지지율이 더욱 떨어진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밀어붙이기식 공세를 지켜보며 과거와 처지가 정반대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이가 필자뿐은 아닐 것이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독도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양국의 대응 방식은 일본 측이 망언을 하면 한국 측이 화를 내며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일본이 격분하는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며 대단히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외교분쟁의 시작

    필자는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일본 정부가 발표한 일련의 보복 조치를 바라보며 무례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일 통화 스와프 축소 검토, 관료급 한일회담 연기 등….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는 각 성청(省廳)에 할 수 있는 모든 보복조치 방안을 제출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이성을 잃은 듯한 일본의 이런 대응은 한일 외교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겠다며 한국을 압박한 후 노다 총리의 친서를 보내왔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일단 수용을 거부한 후 외교관을 통해 친서를 일본 측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일본 측은 한국 외교관을 문전박대했다. 팽팽한 대립 각을 세우던 중 한국 측이 노다 총리의 친서를 우편으로 송부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양쪽이 서로 “외교적인 결례를 범했다”고 비난하는 양상이 계속됐다.



    일본은 친서 전달이 무산되자 외교문서를 통해 독도 문제를 ICJ에 공동 제소할 것과 그것이 안 되면 1965년에 정한 교환공문 방식으로 분쟁조정에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양쪽 모두를 거부했다. 일본 정부는 결국 ICJ 단독제소를 공표하고, 소위 ‘영토국회’를 열어 한일 간의 독도 문제와 중일 간의 센카쿠열도 문제에 대해 자신의 정당성을 알리는 생방송을 전 세계로 내보냈다. 노다 총리는 일본 국회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가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증거가 없다”며 독도 문제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까지 억지 주장을 폈다.

    위안부 문제가 변곡점

    한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일본이 독도 문제를 부당하게 ICJ에 단독 제소한다면 위안부 문제의 국제범죄재판소 회부를 검토하겠다는 메시지를 일본 측에 보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공방이 계속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브레이크 없는 전차처럼 달려나가던 외교분쟁은 바로 이 부분에서 변곡점을 만났다.

    위안부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자 일본 내 언론들이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마이니치신문 등이 “독도 문제와 달리 위안부 문제로 한국과 대립하는 것은 일본에 불리하다. 여성의 인권문제인 만큼 세계적으로 일본이 다시 지탄받게 될 우려가 있다”며 충고하고 나선 것. 이때부터 일본 정부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9월 4일 겐바 고이치로 외상은 독도 문제를 ICJ에 단독 제소하는 방안은 변함없다고 주장하면서도 “한국의 차기 정권과는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고 발언한 데 이어 7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는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총리의 비공식 회담이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일본 측이 유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실제로 8일부터 이틀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겐바 외상의 비공식 대화가 있었고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총리의 비공식 대화가 있었다. 모두 일본 측에서 먼저 다가온 결과였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도 이에 보조를 맞추듯, 한일 양국이 영토 문제의 대립강도를 낮춰줄 것을 요청했다.

    일견 독도와 관련된 외교분쟁은 이 대목에서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이 ICJ 단독 제소를 철회하지 않은 마당에 이런 표면적인 평화무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9월 11일 일본 정부가 중앙 일간지와 지방지에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광고를 일제히 낸 것도 독도 문제와 다른 사안을 분리 대응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한국 측 시각으로 보면 일본 측의 갑작스러운 태도변화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들의 태도 변화는 지극히 전략적인 행동이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다면 언제든지 언행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한국 측은 깊이 명심해야 한다.

    일본의 역사는 사무라이의 역사다. 12세기 말부터 시작돼 약 700년에 걸쳐 내려온 사무라이의 전통은 일본인에게 손자병법적 사고방식을 심어놓았다. 사무라이 시대 대부분의 무사는 손자병법을 기초 경전으로 여기며 통째로 외워버렸다. 700년 사무라이 사회의 영향은 현재 인본인의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손자병법적인 사고방식을 유산으로 남겼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을 해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문구를 진리로 생각하는 일본인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선(善)은 이기고 악(惡)은 패한다’는 논리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항상 선이고 다른 나라는 악이다.

    전략적 후퇴는 사무라이 수법

    따라서 일본 정치인의 발언을 해석할 때는 이면의 전략적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일본 측 논리 자체도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의 독도영유 논리가 잘못이고 독도는 불법으로 점거되어 있으니 반드시 일본 영토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자국민에게 심어놓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전략적 발언이나 지침이 많아서 왜곡을 일삼아도 일본 정치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치인의 태도도 진심으로 사과한다기보다 사과하지 않으면 세계적으로 수세에 몰리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한국 측이 일본 측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에 진정성이 결여됐다며 진심 어린 사과를 다시 받아야겠다고 말하는 것도 일본 정치인의 이런 전략적 태도에서 비롯됐다. 일본 측은 “몇 번 사과했는 데도 한국인은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도리어 화를 낸다. 일본인은 절대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다. 전략적으로 사과할 따름이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망언(妄言)과 망동(妄動)을 되풀이 한다. 일본인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한일관계의 구축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사무라이 정신이 체화된 일본인은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후퇴하고 때가 왔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공세에 나선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중국, 동남아, 유럽, 호주 등에 걸친 세계적 여성의 성 착취 문제이므로 일본에 절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반성이나 사과 없는 전략적 후퇴 전략을 택했을 뿐이다.

    현재 일본의 중단기적 외교목표 중 하나는 유엔 안보리 이사국이 되는 일이다. 일본은 몇 년 전 한번 실패한 이 목표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일본이 안보리 이사국이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국제적 공헌을 할 수 있는 군대가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사국이 되려면 자위대를 군대로 승격시켜야만 하고, 이를 위해선 현행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현행 일본 헌법 제9조‘전쟁을 포기하고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삭제 또는 ‘군대 보유’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헌법개정을 위해선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과 국민투표를 실시해 50%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한다. 여야가 보수화되면 국회의원 3분의 2 찬성표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이 군대를 부활시키는 데 50% 이상 찬성할지는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군 성노예 문제가 불거지고 다시 세계적 수준에서 비난을 받으면 헌법개정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악행이 일본인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면 될수록 국민투표에서 과반 이상의 표를 얻는 것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일본이 9월 초순 들어 갑작스럽게 유화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런 상황까지 고려해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로 결정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엊그제까지 감정적으로 화를 내던 노다 총리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악수를 청하는 모습은 한국인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 중 하나였을 테지만 먼 미래를 바라보고 전략적 판단을 하는 일본 정치의 행태로 봐서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사무라이 국가 일본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이기기 위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방이 되고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상대가 나쁘다고 생각하면 문을 잠그고 철저히 무시해버리는 한국의 유교적 문화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민족이 바로 사무라이의 후예 일본 민족이다.

    역사적 사료 고의적 무시

    주지하다시피 필자는 일본계 한국인이다. 2003년 한국 체류 15년 만에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1998년부터 독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현재까지 14년간 그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의 연구는 극히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진실을 탐구하려는 마음이 강한 연구자일 따름이다.

    일본과 한국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저서나 양국 정부의 주장 등을 두루 살펴봤고, 필요할 때는 일본 측이 내세운 1차 자료를 어렵게 구해 보기도 했다. 4년간의 연구 결과, 필자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는 은폐와 왜곡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을 토대로 필자는 2002년 ‘독도영유권 문제의 미해결문제 고찰’이라는 논문을 냈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처음 나온 논문이었다.

    그간 일본 학자와 정부는 1870년과 1877년 당시 일본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태정관이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의 부속영토이자 일본 영토 외의 섬들이라고 결정한 공문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하거나 심하게 왜곡해왔다. 2002년 첫 논문에서 필자는 1877년 태정관 지령문에 대한 일본 측의 은폐와 왜곡을 주로 다뤘다. 2005년 일본의 한 목사에 의해 태정관 지령문의 부도인 ‘기죽도약도’가 발견됨으로써 태정관이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 두 섬이 울릉도와 독도라는 사실이 보다 선명해졌다. 일본 정부는 2006년과 2009년 국회에서 한 의원이 태정관 지령문에 대해 질문을 하자 “오래된 문서이므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직 조사 중”이라며 확답을 피했다.

    2006년 필자는 태정관 지령문에 대한 질의서를 일본 정부와 자민당 등에 보냈지만 일본 정부의 답은 “현재 조사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그들은 계속 “조사 중”이라는 답만 되풀이하고 있다. 태정관 지령문의 조사결과가 나오면 국회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므로 그들은 조사가 끝났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했다고 고백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사무라이적 행태로 보면 그들은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조사 중”이라는 답변만 할 것이다.

    2008년 일본 북해도 사회과 교원노조가 “독도는 한국인의 주장처럼 한국 영토”라는 성명을 냈고, 2011년 9월에는 도쿄도 사회과 교원노조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증거가 없다”는 성명을 냈다.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기재된 교과서를 교재로 가르쳐야 하는 일부 사회과 교사들이 그들 나름대로 독도에 대한 한국 측의 주장을 연구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 결과 많은 일본 내 사회과 교사가 독도는 한국영토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첫 번째 증거로 1877년의 태정관 지령문을 거론하고 있다.

    8월 24일 노다 총리는 일본 국회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인 근거를 설명했다. 그 장면은 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일본으로서는 최대의 홍보효과를 노린 이벤트였지만 결국 논리적 한계만 드러내고 끝이 났다. 노다 총리는 독도가 일본 영토인 첫 번째 근거로 일본이 17세기 중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점을 부각했지만 앞서 말한 태정관 지령문은 그 논리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정관 지령문에는 ‘17세기 말 조선과 일본의 서한 왕래가 끝나 두 섬(울릉도와 독도)은 일본과 관계가 없는 섬이 되었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독도 문제는 영토분쟁 아니다

    일본 유화 제스처는 제국군대 부활을 위한 꼼수

    청소년 시민단체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 회원 70여 명은 9월 9일 오후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열고 독도에 대한 일본의 의견 철회, 위안부 사건에 대한 일본 측의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 논쟁을 하면서 시작은 어느 정도 사실로부터 출발해서 도중에 심하게 왜곡시키는 수법을 즐겨 쓴다. 그들은 절대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문사회 분야에서 일본이 진실을 추구하는 나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인문사회 분야에서 일본인은 진실보다 국익을 추구한다. 일본은 국익만 열심히 추구하면 아시아와 세계를 제패하는 국가가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헛된 꿈일 뿐이다.

    또한 노다 총리는 일본 국회에서 1905년 일본은 독도를 정식으로 시마네현 오키 섬으로 편입시켰다는 억지 주장을 폈다. 당시 독도는 어떤 나라에도 소속하지 않은 무주지(無主地)였다고 우기면서 선점 논리에 입각해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는 얘기다. 그런데 당시 내무성은 “한국 영토일 수 있는 일개 불모의 암초를 취함으로 인해 열강으로 하여금 일본이 대한제국 전체를 삼켜버릴 우려가 있다는 경계심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면서 독도 편입에 반대했다. 한편 외무성은 “때가 때인 만큼 독도를 하루속히 일본 영토로 편입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른 성청을 설득해 1905년 1월 28일 각료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주목할 점은 당시 일본이 독도의 시마네현 불법 편입을 비밀스럽게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독도 편입을 알리는 고시는 일본의 관보가 아니라 시마네현 현보에 실렸고 지방신문이 기사를 작게 냈지만 일본인 중 거기에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본 정부는 내무성의 충고를 받아들여 독도 침탈 사실을 열강이 알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독도뿐 아니라 한국 전체를 삼키기 위해 열강과 거래하기 시작했다. 1905년 8월 미국과 일본이 소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묵인한다는 데 합의해 미국을 자국 편으로 만들었다. 그때 영국도 서명을 했기 때문에 일본은 미국과 영국이라는 당시의 강대국 둘을 자국 편으로 만든 셈이다. 이어서 일본은 1905년 9월 러시아와의 강화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 제1조에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보호국화를 인정한다’는 문구를 삽입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러시아로 하여금 한반도 문제에 있어 일본의 우선권을 인정케 했다.

    일본은 프랑스와도 다르게 협상했고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발언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주요 열강의 입을 막아버린 일본은 1905년 11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마음대로 강요할 수 있게 됐다. 일본의 한국 침략을 막을 열강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도 불법 편입 사실을 더는 비밀로 할 필요가 없어진 일본은 1906년 3월 시마네현 공무원들이 울릉도에 들러서 울릉 군수 심흥택에게 독도가 일본으로 편입된 사실을 구두로 전했다. 이때 심흥택은 “본군 소속 독도가 일본에 편입되었다고 한다”는 보고서를 상부에 올렸다. 이에 한국 정부는 “그럴 리가 없다. 일본인의 행동을 주시하라”는 지령 제3호를 군수에 하달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확인했다.

    여기까지가 독도를 둘러싼 분쟁이 시작된 역사적 맥락이다. 바로 독도 문제는 1904년 2월 독도에 상륙한 일본군이 한반도 전체로 영토의 침탈을 확대해나간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노다 총리는 8월 24일 성명 중에 “독도는 역사 문제가 아니라 영토 문제”라고 강조했다. 침략의 역사에 대해 뻔뻔스럽게 눈을 감는 모습이 바로 국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일본 사무라이 정신의 실체다.

    한일전쟁 일어날 수도

    그래서 한국인에게 독도는 한반도 전체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논리가 아닌 직감에 따른 판단이다. 독도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침략이 한반도 전체로 확대됐고, 그 결과 한국인은 모든 것을 잃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2000년간 영토 없이 박해와 차별을 받아온 것처럼 자기 땅을 잃어버린 한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에 짓밟혔다. 전쟁과 무기 생산을 위한 강제동원, 성 착취 등 온갖 수탈을 당했다.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희생됐다. 이런 한민족의 고통은 바로 영토 상실에서 비롯됐으며 그 단서는 독도였다.

    100여 년 전 한반도 침탈의 첫 번째 희생지였던 독도를 일본이 다시 침탈하려는 상황에서 한국인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과거의 민족적 고통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됐다. 한국 젊은이들이 독도 문제와 관련해선 일본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보이는 것도 영토 상실의 고통이 그들의 뇌리에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도 미군이 오키나와에서 폭행 등 사건을 일으키면 화가 나 참을 수 없게 된다. 감성적으로는 일본인에게 오키나와는 한국인에게 독도와 같은 존재다. 아니, 한국인에게 독도는 오키나와에 대한 일본인의 감정 그 이상의 무엇을 환기시키는 곳이다. 오키나와 문제로 전쟁까지 불사하겠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한국인은 독도를 지키는 것이 바로 한반도 전체를 지키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만약 일본이 독도에 도발을 해온다면 종국에는 남북이 하나가 돼 일본과 부딪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보인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내용이 실제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일본 유화 제스처는 제국군대 부활을 위한 꼼수
    호사카 유지

    1956년 일본 도쿄 출생, 2003년 귀화

    일본 도쿄대 졸업, 고려대 대학원 정치학 석·박사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 독도종합연구소 소장

    ‘우리 역사 독도’,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일본에게 절대 당하지 마라’ 등 저서와 ‘일본 민족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분석’ 등 논문 다수


    일본 정부는 ‘한국에 의한 독도 불법점거’라는 말을 지어내 일본인의 증오심을 유발하고 한일 간의 갈등을 지속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일본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선동하면서 한국에 대한 증오심을 일본 국민에게 심어왔다. 한일관계가 진정한 미래지향적 관계로 바뀌기 위해서는 일본이 하루속히 지금껏 견지해온 전략적 태도를 버리고 침략의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한국 측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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