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푸틴 ‘최대 정적’까지 죽었으나 저항 세력 여전

[조은아의 유로프리즘] 한국 같은 민주주의 꿈꾼 나발니, 정신만은 죽지 않아

  • 조은아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입력2024-03-1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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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옥과 암살 시도에도 굴하지 않던 나발니

    • 혹한의 감옥서 사망, 가족도 모르는 사인

    • 암살 시도에도 여전히 푸틴과 싸우는 민주투사들

    2월 17일(현지 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러시아영사관 앞에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진과 꽃이 놓여 있다. 나발니는 2월 16일 수감 중이던 러시아 최북단 시베리아 야말로네네츠 자치구 제3교도소에서 갑작스레 사망해 러시아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그의 시신에서는 멍 자국과 심폐소생술(CPR)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AP뉴시스]

    2월 17일(현지 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러시아영사관 앞에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진과 꽃이 놓여 있다. 나발니는 2월 16일 수감 중이던 러시아 최북단 시베리아 야말로네네츠 자치구 제3교도소에서 갑작스레 사망해 러시아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그의 시신에서는 멍 자국과 심폐소생술(CPR)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AP뉴시스]

    “올 것이 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대 정적(政敵) 알렉세이 나발니(48)가 숨지자 서방 언론은 대체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 ‘푸틴의 적’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23일(현지 시간)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수장도 비행기 추락으로 숨졌다. 푸틴 대통령에 맞서 무장 반란을 일으킨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나발니도 2020년 시베리아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독극물에 중독돼 죽음의 고비를 맞은 바 있다.

    나발니가 차디찬 시베리아 감옥에서 숨진 건 2월 16일. 러시아 대통령 선거 한 달을 앞둔 시점이라 의미심장하다. 3월 15~16일 대선에서 승리해 30년 종신 집권으로 나아가는 푸틴 대통령에게 나발니는 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발니는 생전에 미국 CNN방송과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들이 나를 죽이기로 결정했다면 그건 우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뜻이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발니가 사라졌으니 푸틴 대통령은 이제 안심할 수 있을까. 나발니는 이에 대한 물음을 3월 6일 프랑스 언론에 공개된 2020년 인터뷰에서 답을 남겼다. “달라지는 건 없다.” 푸틴 대통령이 자신을 죽여도 그에 맞설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다.

    체르노빌 비극이 키운 ‘정치 소년’

    2020년 9월 독극물 중독 증세로 혼수상태에서 빠졌다 깨어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인스타그램]

    2020년 9월 독극물 중독 증세로 혼수상태에서 빠졌다 깨어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인스타그램]

    나발니는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의 부틴에서 옛 소련 장교 아버지와 경제학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성장했다. 이 지역 다양한 도시를 돌아다니며 지냈는데 여름철엔 할머니 댁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 댁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근처다.



    나발니가 10세 때인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이 일어났다. 나발니 가족은 옛 소련 정부가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정황을 지켜봤다. 미국 언론인 데이비드 허센혼은 저서 ‘반체제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에서 “체르노빌의 비극은 어린 나발니에게 정부의 거짓, 허위 정보, 무능력이 생사를 좌우하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인상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10대의 나발니는 이 무렵 정치에 대한 관심을 키우기 시작한다.

    나발니는 1998년 모스크바의 러시아인민우호대 법학과를 졸업해 변호사가 됐다. 2001년엔 정부 산하 금융대에서 경제학 학위도 받았다. 본격적인 정치 이력은 24년 전 시작됐다. 그는 2000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정당 ‘야블로코’에 합류했다. 당에서 지역 대표까지 맡았지만 2007년 돌연 제명됐다. 당 지도부는 나발니가 극우 행사에 참석하는 등 ‘민족주의적 활동’으로 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나발니는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당대표와 충돌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초반부터 목소리가 큰 젊은 정치인이었던 셈이다.

    2008년 나발니는 주주행동주의에 나섰다. 상장 국영기업의 주식을 소량씩 사들여 주주총회에 참석해 재무적 문제와 투명성 부족을 제기했다. 이 내용을 자신의 블로그에 담았다. 2010년엔 내부 고발 웹사이트를 운영해 정부의 부정 계약 사례를 폭로했다. 당시 그는 통합러시아당을 ‘사기꾼과 도둑의 당’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반정부 운동의 슬로건이 됐다.

    공개 토론, 가족 포스터 공개

    나발니가 해외 언론에 본격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1년 대규모 반(反)정부 운동 때다. 그해 12월 러시아 의회의 부정선거로 소련 붕괴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발생했다. 나발니는 반정부 운동에 나섰다는 이유로 15일간 투옥됐고, 그 후 투옥과 석방이 반복됐다.

    2013년 7월 나발니는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출마 선언 다음 날 바로 그는 횡령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스크바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니발니는 하루 만에 풀려났다. 시장 후보로 뛸 수 있게 된 그는 시민들과 가두 토론을 벌였다.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포스터에 과감하게 싣는 등 서구식 캠페인도 도입했다. 그해 9월 선거에선 낙선했지만 27.2%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2020년 8월 나발니는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독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아 간신히 살 수 있었다. 독일 정부는 그가 ‘노비촉’에 중독됐다고 발표했다. 노비촉은 1970년대 냉전시대 소련이 개발한 화학무기로 호흡 정지, 장기 손상, 근육 경련 등을 일으킨다. 노비촉 중독으로 숨지면 심장마비에 따른 사망과 구별하기 어렵다. 그는 다음 달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회복한 그는 이듬해 1월 러시아로 돌아갔다. 입국 직후 체포됐고, 이런 행보는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는 독일에 입원했을 때 당국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3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다음 해엔 사기 및 법정모독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9년형을 선고받았다. 그해 2월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뒤 반전 시위가 거세지자 탄압은 더 심해졌다.

    나발니가 극도의 압박 속에서도 이뤄내려 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숨진 뒤 미국 뉴욕타임스(NYT) 2월 19일자 1면에 실린 나발니의 옥중 편지에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9월 쓴 이 편지에서 그는 ‘한국과 대만은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했다. 러시아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냈다.

    평소 그는 민주주의 전환기를 놓친 과거를 아파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전임자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에 대해 “소련 체제를 바꾸는 데 실패했다”며 “이게 내가 옐친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라고 말하곤 했다.

    의문 증폭시킨 죽음

    나발니는 시베리아 야말로네네츠 자치구 제3교도소에서 돌연 숨졌다. 당국은 그의 사인에 대해 거의 한 달간 함구해 의문을 키웠다. 결국 3월 5일 현지 방송에서 그가 자연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측근들은 그가 푸틴 대통령 지시로 암살됐다고 보고 있다.

    수상한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사망 이틀 전 그가 수감된 교도소에 러시아 정보요원이 찾아와 내부 폐쇄회로(CC)TV를 껐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망 시각도 조작됐단 설이 흘러나왔다. 당국이 밝힌 나발니의 공식 사망 시각은 2월 16일 오후 2시 17분. 교도소는 사망 2분 만에 보도자료를 냈다. 러시아 대통령실인 크렘린궁은 사망 7분 만에 이를 언급했다. 사망 발표가 짜인 듯 진행된 인상을 줬다.

    사인을 두고서도 당국은 우왕좌왕이었다. 러시아 국영방송사 RT는 사망 직후 관영 텔레그램을 통해 사인을 ‘혈전’이라고 밝혔다. 반면 나발니의 모친은 당국으로부터 사인이 ‘돌연사 증후군’이라고 들었다고 했다. 당국은 나발니의 시신도 유족들에게조차 공개하지 않다가 엿새 만에 확인해 줬다. 하지만 모친은 당국이 “비밀 매장에 동의하라”는 협박을 했다고 주장했다.

    최근 들어서야 러시아 당국은 나발니는 자연사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자연사를 유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발니가 숨진 교도소는 ‘북극의 늑대’라고 불릴 정도로 혹한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미국 NYT는 2021년 수감된 나발니가 수감 기간의 4분의 1 이상을 이곳에 갇혀 있었음을 지적하며 “그가 ‘슬로모션(slow motion)’으로 사형당할 것이란 우려가 결국 현실이 됐다”고 지적했다.

    “창가와 홍차를 조심하라”

    나발니에 앞서 푸틴 대통령의 수많은 정적이 알지 못할 이유로 숨을 거뒀다. 표적이 된 정적들은 러시아의 전직 정보요원들, 야당 지도자, 기업 재벌 등 다양하다. 해외에서 가장 이목을 끈 사례는 2006년 영국 런던에서 숨진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다. 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이었던 그는 영국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2006년 런던의 한 호텔에서 홍차를 마신 뒤 숨졌다. 그 홍차엔 방사능 물질인 ‘폴로늄 210’이 녹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 수사당국은 러시아 요원들이 푸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그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을 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전했다.

    리트비넨코는 사망 직전 기자들에게 FSB 보안국이 옛 소련 시대부터 독극물 실험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런 독극물을 홍차에 녹이거나 정적의 집 문 손잡이에 묻혀왔던 것으로 보인다. 정적들 사이에선 “홍차를 조심하라”는 말이 일찍이 퍼졌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3월 3일 보도한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의문사한 러시아 주요 인물은 9명. 이들 중 가장 많은 사망 형태는 건물 추락사다. 러시아의 지역 의원이자 전직 육류업체 최고경영자(CEO) 파벨 안토프는 2022년 12월 24일 인도의 사이 인터내셔널 호텔 창문에서 떨어져 숨졌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비평가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석유 대기업 루코일의 일라빌 마가노프 회장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한 지 몇 달 만에 모스크바의 한 병원 창문에서 떨어져 숨졌다. 라트비아계 미국인 투자자로 나이트클럽 소유주였던 댄 라포포트도 미국 워싱턴DC의 고급 아파트 건물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가장 강렬하게 저항한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CEO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6월 23일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프리고진은 창가를 조심해야 할 것”이란 말이 나왔다. 그가 반란 뒤 숨어 있던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의 호텔방엔 창문이 없단 얘기까지 돌았다. 그도 마찬가지로 결국 추락사했다. 건물이 아닌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하며 숨졌다.

    제2의 나발니는 누구?

    알렉세이 나발니의 아내 율리아 나발나야. [동아DB]

    알렉세이 나발니의 아내 율리아 나발나야. [동아DB]

    나발니의 죽음 뒤 반정부 운동이 동력을 잃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하지만 이런 우려를 불식하는 소식이 나왔다. 그의 아내 율리아 나발나야(48)가 남편의 뒤를 잇겠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옥중에서 푸틴 정권에 저항하는 인사가 꽤 있다. 저명한 야당 인사 블라디미르 카라 무르자는 2023년 4월 반역죄로 독방에 감금돼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는 연설로 반역죄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이미 두 번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모스크바 시의회 의원 일리야 야신도 대표적 반정부 인사다. 러시아 군인에 대한 허위 정보 유포 혐의로 2022년 6월 체포돼 8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유튜브에서 우크라이나의 부차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를 논하면서 당국의 타깃이 됐다. 그는 감옥에 갇혔지만 그가 운영하던 유튜브는 동료들이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야신은 2022년 9월 감옥에서 AP통신에 보낸 편지에 “당국은 나를 가두는 데 실패했다”고 했다.

    야당인 오픈 러시아의 전 대표인 안드레이 피보바로프도 2021년 소속 단체가 부적합하다는 당국의 판단을 받아 구금돼 있다. 이들은 나발니처럼 의문의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도 꿋꿋이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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