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21일 방송된 KBS 코미디 프로그램 ‘쇼! 행운열차’의 정치풍자코너 ‘왜 나만 가지고 그래’의 한 장면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을 풍자했다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왜 나만…’의 대본을 집필한 개그작가 장덕균(39)씨. 1987년 KBS 2TV ‘유머 1번지’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을 통해 본격적인 정치·시사풍자 코미디의 문을 연 그가 ‘왜 나만…’에 쏟는 정성과 애정은 남다르다.
방송가에 널리 알려진 그의 닉네임은 정치풍자의 ‘달인’. 1988년과 1993년 KBS 코미디대상 작가상과, 2002년 KBS 연예대상 작가상을 수상한 그가 정치·시사풍자 코미디 프로그램에 얽힌 뒷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노 대통령의) ‘10분의 1’ 발언을 풍자한 대본을 가지고 연출자, 개그맨 등과 회의를 하면서 ‘이거 이대로 나가도 괜찮을까’ 하고 걱정했죠. 조심스럽게 녹화를 마쳤고 방영이 됐는데 다행히 저쪽(청와대)에서 아무런 얘기가 없습디다. 일요일 낮 시간대라서 못 봤나?(웃음) 그래서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지금이 어떤 시댄데’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게 정치풍자 코미디 제작현장의 현주소입니다.”
‘노 통장’ 김상태의 예감
-정치권의 눈치를 본다는 겁니까.
“무시할 순 없죠. 방송계가 오랫동안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연출자, 연기자, 작가까지 한마디로 ‘쫄아’ 있어요. 하찮아 보이는 ‘왜 나만…’의 코너는 실상 방송사(史)에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정치풍자 코미디가 1997년 가을 TV브라운관에서 사라진 지 6년 만에 다시 살아났으니까요. 제작진과 저는 이 코너를 통해 정치풍자 코미디의 폭을 넓혀가자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했어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게 바로 정치풍자 코미디였으니까요.”
-이유는요?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며 “그건 조금 있다 얘기하겠다”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개그콘서트’(KBS)의 주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정치풍자가 중단됐다고 하는데. 대선 직후인 지난해 1월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캐릭터인 ‘노 통장’을 등장시키지 않았습니까.
“‘노 통장’은 정통 정치풍자 코미디가 아니라 노 대통령의 캐릭터만 등장시킨 단순한 개그 소재일 뿐이었죠. ‘노 통장’의 탄생 배경도 아주 재밌습니다. 대선 직후, 대통령당선자에 대한 개그는 ‘쓸만한’ 아이템이라 ‘개그콘서트’에 출연하는 개그맨들이 당선이 유력한 후보를 흉내내는 연습에 몰두했어요. 당시 이회창 후보가 된다는 분위기여서 다들 이 후보를 따라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딱 한 사람, 김상태가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 후보 흉내는 안 된다’면서 ‘노무현 후보를 연습한다’고 합디다. 김상태가 ‘내가 노 후보와 똑같은지 봐달라’는 말에 다들 ‘그 사람이 당선되고 나면 그때 해봐’ 하고 묵살했어요. 그런데 ‘개그콘서트’ 팀의 예측이 빗나갔고. 김상태가 ‘맞습니다 맞고요’ 한마디로 하루아침에 무명의 설움을 벗고 스타가 됐잖아요.
‘노 통장’을 ‘봉숭아학당’에 투입하자마자 저쪽(노무현 대통령당선자측)에서 전화가 여러 번 왔어요. 예전과는 달라서 ‘이렇게 하지 말라’고 직접 요구하면 문제가 생길게 뻔하니까 ‘(대통령에) 취임하기도 전인데 조심스럽게 다뤄달라’는 주문을 한 거죠. 결국은 ‘잘 다뤄줬으면 좋겠다’는 얘기였어요. (대통령당선자가)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분위기였고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노 통장’을 너무 희화시키거나, 웃기는 대사를 날리면 바로 다음날 연락이 와요. ‘이미지에 손상 가는 것은 안 하면 좋겠다’는 거죠. 저쪽에서 그런 식으로 얘기해 와서 기분이 썩 좋진 않았어요. 대본을 쓰면서도 무척이나 조심스러웠고요. 우리나라 대통령인데 망가뜨릴 의도가 있었겠어요? 하지만 코미디가 갖는 한계라는 게 있잖아요. 어쨌거나 사람들을 웃겨야 한다는. 저쪽의 요구대로라면 무미건조하고 근엄하기만 한 모습으로 그려야 하는데…. 제작진과 방송국의 여러 시스템을 통해 거를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 있고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데도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물론 무관심보다는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좋죠. 하지만 관심이 지나쳐서 자신들이 의도한 바대로 진행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