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돌리자 라이스는 흑백갈등이 심한 앨라배마에서 자라고, ‘흑인은 열등하다’는 내용의 대학 강의를 들으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도리어 실력을 쌓아 “나는 베토벤을 연주할 수 있고,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고 당차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인종이 아닌 실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 국무장관으로 부시 왼손 역할을 하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의 뒷심은 어디에서 생겨난 걸까.
콘디가 2004년 2월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으로 일할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내 치안 상황 악화와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 재소자 인권 유린으로 거센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디가 정부 내 고위 관료들을 백악관에 소집했는데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부(副)장관을 대리 참석시키는 방식으로 그녀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조지 테닛 당시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아예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콘디의 말에 “개수작(bullshit)”이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회의장을 나가버렸고 순간 자제력을 잃은 콘디가 눈물을 쏟아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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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의 전쟁’을 이끌면서 독재자들과 정면으로 승부한 강철 여인으로 알려진 그녀지만 역시 도처에 존재하는 적(?)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음을 알 수 있는 일화다. 콘디를 울린 럼스펠드는 2006년 물러났으니 결국 최후의 승자는 콘디인가.
클린턴의 20여 년 정치참모로 일하며 킹 메이커 역할을 했지만 최근 비판자로 돌변한 미국의 유명한 ‘스핀닥터(Spin Doctor·정치 선거 전략가)’ 딕 모리스는 2008 미 대선에서 만약 힐러리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다면 공화당 쪽에서는 콘디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을 냈다. 힐러리가 경선에 패배해 주장이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그는 책 ‘콘디 대 힐러리’(국내 번역본 제목은 ‘나는 이기기 위해 도전한다’)를 통해 콘디의 경쟁력을 이렇게 말한다.
‘콘디는 대부분의 사람처럼 처음부터 위대하게 태어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야심이 큰 것도 아니다. 성공한 현대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력이나 현란한 화술, 화려한 프레젠테이션, 공격적인 수사(修辭)도 그에게 없다. 단지 그녀는 자기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내버려둘 뿐이다.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려고 노력한다.’
‘자기 자신을 평가의 잣대로 삼는다’는 것은 곱씹을수록 무서운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타인의 마음에 맞춰 자기를 만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딕 모리스는 콘디가 실력과 함께 내면의 강한 힘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남성에 비해 여성이 소수자인 분야에서 일해왔지만 그녀의 성취에 여성단체의 집단적 힘이나 인종단체의 후원 같은 것은 없었다. 이런 면에서 그녀의 삶은 ‘환경, 지역, 인종, 성별 심지어 가난과도 관계없이 개인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미국 공화당의 핵심적인 신념과 맞닿아 있다.
더구나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흑인’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여성이다. 이런 그녀가 그 모든 약점을 장점으로 바꾼 원동력은 ‘교육’과 ‘자기계발’이었다.
“흑인에게는 보여줄 수 없다”
콘디는 1954년 11월14일 앨라배마에서 태어났다. 1950~60년대 앨라배마는 미국 남부 지역 중에서도 가장 혹독하게 인종분리정책이 시행된 곳이다. 흑백갈등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그린 미국 현대문학의 걸작 ‘앵무새 죽이기’의 무대도 앨라배마다. 앨라배마 중에서도 콘디의 고향 버밍햄의 인종차별은 특히 심했다.
아직 콘디가 태어나기 전 일이지만 1952년 아버지가 투표 등록을 하러 갔을 때 등록부 직원이 콩이 가득 든 커다란 깡통을 가리키면서 “콩알 수를 알아맞히면 선거용지를 주겠다”고 빈정거릴 정도로 흑인들은 투표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콘디가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통해 밝힌 경험도 몇 가지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이다. 어머니와 옷을 사러 백화점 의류매장에 간 콘디가 옷을 골라 탈의실로 향하자 백인인 백화점 점원이 옷을 빼앗았다. 그러면서 “탈의실은 백인 전용”이라며 “정 옷을 입어보고 싶으면 창고로 가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콘디 모녀가 “여기서 옷을 사지 못한다면 다른 가게에 가서 웃돈을 얹고 사겠다”며 맞서자 결국 점원은 탈의실로 콘디를 안내했다.
콘디는 성년이 된 뒤 한 인터뷰에서 “당시 그 점원은 탈의실 밖에서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각되면 일자리를 잃고 사회적으로도 매장될게 뻔했기 때문에 겁에 질려 있던 표정이 눈에 선하다”고 회상했다.
콘디는 친구와 보석가게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점찍어둔 물건을 보여달라는 콘디에게 점원이 “흑인에게는 보여줄 수 없다”며 버틴 것이다. 콘디는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합시다. 당신은 시간당 6달러를 벌기 위해 점원 일을 하고 있고 난 당신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카운터 반대편에서 보석을 보여 달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차별은 사소한 축에 속한다. 당시 버밍햄의 분위기는 극렬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들이 테러를 가할 정도로 흉흉했다. 콘디가 아홉 살인 1963년 집 근처 교회가 흑인신도들이 있다는 이유로 백인 과격파들에 의해 폭파되었고 콘디 친구 두 명도 목숨을 잃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조사를 거부해 콘디 아버지는 소총으로 무장하고 이웃들과 직접 야간 순찰을 돌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은 콘디가 나중에 총기 통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다행히 상황은 점점 좋아졌다. 열 살 때인 1964년 린든 존슨 대통령은 미국 내 모든 공공장소에서 흑백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법이 발표된 날, 콘디 가족은 일부러 백인 전용 식당을 찾아 역사적인 날이라며 자축하는 의식을 가졌다. 일종의 분풀이였던 셈이다. 콘디는 당시 식당을 찾은 가족의 모습에 놀라 음식을 넘기지 못했던 백인들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쌓다
콘디가 덴버대학에 들어갈 당시 미국에는 윌리엄 쇼클리의 열성학(劣性學)이 번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IQ가 낮은 흑인들 때문에 인류가 퇴보한다’는 것이었다. 흑인 출산율이 백인보다 높아 ‘가까운 미래에 위험한 사태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견도 있었다.
대부분 과학자는 대꾸할 가치가 없는 이론이라고 무시했지만 쇼클리가 트랜지스터의 공동발명자이자 반도체를 개발한 주역으로 노벨상까지 탄 과학자라는 사실 때문에 지지자 또한 많이 있었다.
어느 날, 콘디는 한 교수가 쇼클리의 논문을 인용하며 열변을 토하는 것을 억지로 듣고 있었다. 마침내 ‘서구 문화의 보물인 예술·문학·기술·언어학 이 모든 것이 바로 흑인보다 우수한 백인들의 지적능력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대목이 나오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강의실이 떠나갈 정도로 외쳤다.
“교수님, 저는 프랑스어를 할 수 있고 베토벤을 연주합니다. 당신들 백인보다 당신네 문화에 더 능합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육체적·심리적 한계와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 이와 직면한 사람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분노하는 것이고 하나는 인정하는 것이다.
콘디와 콘디 부모가 택한 것은 후자였다. 그렇다고 무조건적 순응을 한 게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쌓았다. 무남독녀 외딸이 인종차별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콘디 부모의 전략은 ‘인내심을 키워주는 일’이었다.
콘디는 “부모님은 내가 비록 월 워스(옷이나 음식을 팔던 미국의 소매체인)에서 백인들과 햄버거를 함께 사 먹지는 못할지라도 나중에 커서 미국 대통령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고 가르쳤다”고 회상한다. 실제로 콘디의 부모는 “사회는 어떤 식의 장벽이든 이것을 넘어서는 개인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딸에게도 “장벽을 개탄하는 대신 뚫고 나가는 방법에 골몰하라”고 반복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딸에게 한번도 “우리는 피해자”라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콘디가 철이 들어 인종차별에 대해 질문할 때도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누게 마련인 흑인 동류집단에 참여하는 것도 신중히 했다. 연좌농성이나 시가행진을 통해 집단의 동질성이 주는 힘과 위로를 거부하는 대신 묵묵히 딸의 실력을 길러줬다.
‘힘’을 바탕으로 한 콘디의 현실주의적 외교관도 사실은 어릴 적부터 받은 이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교육방식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콘디의 집안은 물질적으로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다 해도 부모가 모두 교육자인 중산층이었다. 조부모와 부모는 대학까지 마쳤고 아버지는 목사이자 교수였으며 어머니도 고교 음악교사였다. 모두 험악한 인종차별이라는 고난의 시대를 묵묵히 타파하며 살아온 진정한 투사들이었다.
콘디는 음악, 발레, 외국어, 스포츠 등을 배웠으며 고전도 탐독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비롯해 다양한 악기 연주법도 배웠는데 특히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 글을 깨치기도 전에 악보를 먼저 읽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탈리아어인 콘돌체자(condolcezza·부드럽게 연주하라는 뜻)에서 딸 이름을 빌려온 모친은 다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영특한 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고교 교사직까지 휴직했다.
꿈을 수정하다
콘디는 덴버 시 남쪽 잉글우드의 천주교재단이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입학한 지 1주일 만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과 맞닥뜨렸다. 교내 진학 담당자가 음대에 진학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콘디의 계획을 듣더니 ‘힘들 것’이라고 단언한 것. 흑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녀와 부모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오히려 ‘무엇이든 백인보다 두 배 더 열심히’를 신조로 삼는 계기로 삼았다.
마침내 흑인 최초로 버밍햄 음악학교에 진학한 콘디는 음악학교에서 그 꿈을 포기했다. 막상 전공으로 삼자 현실적인 고민들이 다가왔다. 다양한 음악회와 뮤지컬에서 많은 연주자를 만날 때마다 천재도 아닌 자신이 전업 피아니스트로 산다는 것이 녹록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카네기홀에 서보기는커녕 피아노 바에서 일생을 마치는 연주자가 너무나 많았다. 평생 교사나 교회합창단 지휘자로 만족해야 한다면 목표를 수정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매진했던 목표를 수정한다는 것은 내면적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우울증으로 허비한 후에야 새로운 분야를 찾아 나서게 마련이다. 하지만 콘디는 덴버대학에 입학해 새로운 관심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영어학도 기웃거려보고 정치학도 수강했다.
그러다 2학년 봄, 한 강의실에서 그녀를 사로잡는 평생 전공을 발견했다. 국제정치학 강의였는데 강사는 전직 중유럽 외교관이자 후에 클린턴 행정부 여성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울브라이트의 부친 조지프 코벨 교수였다. 그날 강의의 주제는 ‘스탈린’이었다.
콘디는 그 강의를 듣고 음악 외에 어떤 것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열정을 실감했다. 나중에 코벨 박사는 콘디의 총명함과 열정에 감동받아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도록 이끌었다.
콘디는 정치과학부에 등록한 후 러시아어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는 배우기가 어려운 공포의 언어다. 그러나 발군의 어학감각을 바탕으로 1974년 졸업할 때에는 전공 필수와 선택의 구분 없이 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정치과학부 명예의 전당에 가장 탁월한 업적을 거둔 한 사람으로 이름을 새길 정도가 됐다.
물론 그녀가 전공을 바꿨다고 해서 피아노 실력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콘디는 백악관 재직 시절인 2002년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협연을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다.
콘디는 졸업 후 국제정치학 연구소로 유명한 인디애나 주 노트르담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현실정치는 도덕적 이념이 아닌 힘의 역학 관계에 따른 움직임이라는 현실적인 외교관(外交觀)이 형성됐다. 그리고 콘디는 노트르담 대학 석사를 거쳐 덴버대로 돌아와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오로지 결승점을 향해 내달려라”
그런데 박사과정 재학시절 그녀의 정치적 성향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민주당원이었던 콘디가 지지를철회한 것이다. 1976년 선거에서 콘디는 지미 카터 대통령을 지지했다. 그러나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카터의 미온적인 정책을 접하면서 지지를 철회했다. 콘디는 “소련은 마치 바이올린을 조율하듯 미국을 다루며 침략의 본성을 드러냈는데 카터는 무능하게도 소련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콘디는 1980년 공화당원으로 등록해 로널드 레이건에게 한 표를 행사한 이후 일관되게 ‘선도적인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1981년 8월 스물여섯의 나이로 박사 학위를 딴 그녀는 스탠퍼드 대학 ‘국가안보 및 군비감축 연구소’ 부소장을 거친 뒤 정치과학부 부교수로 임용돼 군사학과 국가안보 외교정책, 소련 및 제3세계 동맹국의 경제 활동을 가르쳤다.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역할연기’를 통해 각자의 입장을 표명하게 하는 독특한 수업방식을 도입해 학생들의 의사결정 능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또 미식축구 마니아답게 군사학을 미식축구에 비유하는 수업도 인기를 끌었다.
“인생도 미식축구와 마찬가지다. 결승점을 향해 내달려라. 주눅 들지 말고 반칙도 하지 마라. 오로지 결승점을 향해 내달려라.”
3년 부교수 계약 기간이 끝나고 정교수로 임용되면서 우수 교수에게 주는 상과 ‘최우수강의상’을 받을 정도로 강의 실력이 뛰어났다.
콘디는 국방부 외무부 교환근무 일환으로 1년간 파견근무를 하면서 현실정책수립 과정에 첫 발을 내디뎠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핵무기를 비롯한 군비제한회담이 진행되던 때여서 핵무기 전략 연구가 주요 테마였다. 1년 후 다시 대학으로 복귀했지만 2년 뒤인 1989년 1월 국가안보리의 소련 동유럽 분과 고문으로 임명되면서 소련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이 기간에 폴란드 자유노조가 합법화됐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역사상 최초로 소련에서 대통령선거가 실시됐고 옐친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91년 3월까지 콘디는 공산권 붕괴라는 세계적인 대사건을 주도하는 미국 정부의 최중심부에 서 있었다.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은 그녀의 탁월한 업무 능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계속 안보리에 남아달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콘디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하루 14시간씩 일에 매달려 탈진한 상태였다. 학교로 돌아간 뒤에도 2년 동안 15편의 논문을 생산하며 연구에 몰두하던 그녀는 스탠퍼드 대학 종신교수 발령과 함께 1만4000여 명의 학생과 1400여 명의 교수진, 연간 15억달러의 예산을 가진 대학의 행정을 책임지는 교무처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나이는 38세였다.
스탠퍼드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여성에, 최초의 흑인 교무처장이었다. 전임 총장이 연방지원금과 관련해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부임한 신임 총장은 젊으면서 유능하고, 여성이면서 흑인인 콘디야말로 스탠퍼드 개혁에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인기가 목표는 아니다
콘디가 맡은 가장 큰 일은 연간 2000만 달러의 적자를 해소하는 것이었다. 이미 대학은 콘디 부임 몇 년 전부터 적자 줄이기에 안감힘을 쓰고 있어서 새로 줄일 부분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2년 만에 균형 예산을 맞췄다. 누구도 나서서 하기 싫은 ‘해고’까지 단행하면서 거둔 성과였다.
“한 기관의 기관장은 지식이 짧은 부분에 대해서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100만달러짜리 망원경을 지원해달라고 할 때 나는 망원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 다른 이슈들과 비교해 어느 정도 우선순위를 갖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어려운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고 또 했다.”
콘디는 당시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말한다. 후에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부드럽게 일을 처리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매사에 단호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에게 감동이나 인기를 얻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원칙을 지켜가는 스타일이었다.
예를 들어 교수채용 시 여성이나 흑인, 소수 민족 같은 소수자 우대 정책에 관해서도 ‘소수자 우대는 (흑인인) 나 자신이 제일 수혜자다.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좋다. 그렇다고 해서 당연직으로 정년 보장을 한다든지 하는 혜택을 주는 역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철학을 밀고 나갔다.
1999년 교무처장 퇴임 때 그녀는 역대최고로 유능한 교무처장으로 평가받았다. 균형 예산, 공정한 교수인사, 학교 경쟁력 강화 문제 등 부총장이 했음직한 일들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재임기간 중 스탠퍼드 신입생 지원자는 계속 늘어 콘디가 교무처장으로 재직한 마지막 해 최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부시가 내뱉으면 콘디가 다듬었다”
콘디는 교무처장 자리를 사퇴하면서 1년 동안 대학을 떠나 있겠다고 공식 발표하고 후버 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내 조지 W 부시의 2000년 대권 도전 대열에 합류했다. 외교 정책팀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콘디는 1989~91년 국가안보리에서 당시 무너져가던 소련과 동유럽권 담당국장으로 일하면서 부시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아들 부시와의 인연은 1995년 그가 텍사스 주지사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를 발탁한 사람은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이다. 조지 슐츠는 콘디를 부시의 외교 가정교사로 채용, 부시의 눈과 귀 역할을 맡겼다.
이후 외교정책에 관한 한 부시 대통령은 콘디가 설명해주기 전에는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됐다. 콘디는 보조관인 데도 대통령 가족과 함께 예배를 볼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그녀의 자서전을 펴낸 전기 작가 안토니아 펠릭스는 책 ‘콘돌리자 라이스’에서 “부시와 콘디는 우정과 충성심, 존경이 바탕이 된 사이”라고 전한다. 앞에서 언급한 정치참모 딕 모리스도 “콘디는 단지 보좌관이 아니라 부시의 사고를 깊게 하는 촉매제이고, 부시는 그녀가 제공한 자문을 이해하고 실행하도록 도왔다”고 전한다. 딕 모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부시는 즉흥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다. 이에 비해 콘디는 냉철하게 근거를 평가하고 공공정책의 분석에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한다. 대선 캠페인을 진행하는 동안 부시가 외교정책에 관한 ‘본능적인 말’을 내뱉으면 콘디가 그 말을 합리적으로 다듬었다.”
부시-콘디의 시너지효과는 9·11테러 대응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초기에 즉각적으로 내놓은 대응책은 알 카에다를 쫓는 것이었지만 콘디는 부시로 하여금 테러리즘을 후원하는 국가에도 힘을 집중할 것을 독려했고, 마침내 국정 연설에서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이 나오게 했다.
두 사람의 외교 정책은 ‘윤리적 가치’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전 클린턴 정부와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콘디는 ‘내셔널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권력은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미국의 외교 정책에 윤리가 빠져서는 안 되며 미국 국민은 윤리의 부재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인은 ‘윤리’라는 말을 들으면 ‘참 순진하다’고 비웃겠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원칙이 있다.”
콘디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전파하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윤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다.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가는 2005년 12월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콘디의 외교 방식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외교’라고 평한 바 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막을 내린 뒤 유일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이 영토를 점령하던 옛 제국주의 국가들과 달리 ‘자비로운 패권(benevolent hegemony)’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전파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신념을 담아 외교를 행한다는 것이다.
콘디는 9·11테러 이후 2002년 6월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이를 보다 쉽게 설명했다.
“9·11테러는 더 큰 민주주의와 인권 향상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는 우리의 신념을 위축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진정 우리가 맞설 실체를 찾게 했다. 9·11테러는 우리들에게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깨우치게 했다. 우리는 더 나은 미국의 위상과 가치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
그러면서 ‘국익에 기반한 외교’를 들고 나왔다. 흔히 미국만의 이기주의적 외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미국의 국가 이익에 대한 명백한 입장 천명이 없다면 편협하게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과 일시적 압력단체에 따라 국익이 쉽게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미국의 국익이란 세계에 자유, 시장경제, 평화를 구축하는 기반이다. ‘인류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클린턴 행정부의 지나친 다자간 해결책이 때로 미국 이익을 배반하는 협정까지 조인하는 실수를 범한 것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나온 전략이다.
콘디는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리포트’(김영사)에 실린 ‘국익의 증진’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미국의 가치는 보편적이다. 우리에게는 언론, 종교, 정치의 자유가 있으며 이러한 가치는 국제정치가 이를 공유하는 국가들에게 유리하게 편성될 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지속적인 번영과 자유를 위해 평화는 최우선적이고도 필수적인 조건이다. 미국은 이런 세계평화와 안정의 유일한 보증수표이기 때문에 미국의 군사력은 중요하며 이를 무시하는 태도는 국제평화유지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 공화당에 면면히 흐르는 대외전략이기도 하다.
‘당신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십시오’
총 한 방 쏘지 않고 소련을 무너뜨린 레이건 대통령은 자유국가 국민이 누리는 평화와 번영을 공산주의 국가 국민도 누려야 한다는 구원(救援)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재임 시절 온갖 위기를 타파하며 마침내 성공적으로 대외정책을 펴게 한 힘도 이 같은 믿음에서 비롯된다.
콘디 역시 독실한 기독교도다. 그녀가 아직 미혼인 것을 두고 주변에서 ‘결혼 계획’같은 것을 물으면 “신(神)이 배우자를 점지해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그녀는 스물세 살 때 미식축구 선수와 약혼했다가 파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떠들썩하게 모임에 참가하거나 굳이 교회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는 “내면과 대화하는 기도를 통해 나 자신을 만들었다”면서 “기도를 할 때마다 절대 혼자가 아니며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이라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고 말씀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건 아니다. 그건 나의 종교관이 아니다. 다만 극도의 어려운 상황과 마주쳤을 때 충정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로 인도받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는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세속적 가치를 충족하기 위해서 일한다기보다는 신의 목적을 위해 일한다는 구도자적인 자세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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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나는 기도 속에서 ‘나 자신의 길이 아닌 당신(신)의 길을 걷도록 도와 달라’고 말하려 노력한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내 삶의 계획을 완성할 수 있고 나아가 나 자신이 큰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비교적 종교 갈등 없이 잘 살아온 우리가 때아닌 종교 문제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때여서 그런지 미국 공직자와 정치인들에게서 보는 이런 기독교적 신념의 공적인 확신은 자신과 종교가 같다거나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장관 인사를 하는 종교관과 비교해 격(格)과 급(級)이 다르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