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기억하는 천재는 대부분 아쉽게 요절해 전설이 됐다. 그러나 피카소는 자타공인 천재였음에도 한 세기 가까운 삶을 살았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90세에도 ‘젊은이’로 불린 그의 곁을 내주지 않았으며, 그는 죽기 직전까지 붓을 들었다. 화폭이든 여인에게든 쉴 새 없이 천재적 욕망을 뿜어내는 것이 그의 질긴 운명이었다.
약속시간 오후 3시를 좀 지나 멜빵바지 차림의 백남준이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기자가 얼른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 “선생님, 저희 국장이 오셨습니다. 어디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요?” “뭐라고? 난 약속한 적 없는데?” “아니, 약속하셨잖아요. 국장께서 서울에서 오셨는데….” “몰라, 나 바빠. 지금 가야 돼.” 백남준은 기자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뒤뚱거리며 가버렸고, 기자는 하늘이 노래지는 걸 느끼며 김훈에게 보고했다. “백 선생이 약속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인터뷰를 못 하겠답니다.” 그는 당연히 호되게 ‘깨질’ 각오를 했지만, 김훈은 얼굴색 하나 안 바뀐 채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천재는 그럴 수 있어.” 그리고 그 길로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이 에피소드는 캐나다로 이민한 당시 기자 성우제가 쓴 에세이집 ‘느리게 가는 버스’에 실려 있다(후일담에 따르면, 김훈은 결국 서울에서 백남준과 인터뷰했다고 한다).
이 기막힌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왜 내 머릿속에는 파블로 피카소가 떠올랐을까? 모르긴 해도, 생전의 피카소는 백남준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스스로 왕이라 칭했던 오만과 독선, 예술을 위해 어떤 것도 희생하는 아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용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전대미문의 창조성과 에너지까지 백남준은 피카소와 닮은꼴이다.
‘파이프를 든 소년’
그러나 피카소는 이들과 확실히 다르다. 우선 그는 1881년에 태어나서 1973년에 타계했으니 ‘현대의 산물’이다. 생전의 피카소를 만났던 사람들이 아직 건재하고, 피카소의 일상을 담은 1950년대 기록영화도 남아 있다. 우리는 이 많은 기록을 통해 피카소의 키가 몇 센티미터였는지, 그가 어떤 억양의 프랑스어를 썼는지, 그림 그리는 순간에 표정과 손놀림이 어떠했는지 등을 모두 알 수 있다. 빛바랜 신화로 채색되기에 그는 너무나 근거리에 있으며, 전설적 천재치고는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
또 피카소는 생전에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성공과 명예, 부를 다 얻었다. 그는 한 세기에 가까운 긴 생애 동안 3만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들의 가치는 현재 상상을 초월한다. 2004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피카소의 초기작인 ‘파이프를 든 소년’(1905)이 1200억원에 팔려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 3위를 기록했다. 피카소 작품의 가격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부터 형성돼 있었다. 1960년대 그의 소품 하나가 1억6000만원에 팔렸다. 당시 피카소는 유화만 500점 이상 소유하고 있었고, 수채화나 데생 등은 이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었다. 이 작품들의 가치만으로도 피카소는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억만장자였다.
피카소는 왜 유명한가
단순히 작품 가격만으로 피카소의 가치를 매길 수는 없다. 피카소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예술가다. 예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그의 이름은 안다. ‘피카소 미술학원’이나 ‘피카소 레스토랑’처럼 그의 이름은 예술의 범주를 넘어서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괴팅겐대학교 미술사학과 카르스텐-피터바르케 교수는 피카소의 위대함을 ‘진보적인 예술과 전통적인 예술, 두 가지에서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요컨대 피카소의 천재성은 20세기 정신을 가장 독창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방식으로 묘사했다는 데 있다.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칭호를 듣기에 합당한 거목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현대미술의 상징임에도 많은 사람이 피카소가 어떤 작품을 남겼는지, 그가 왜 위대한 화가인지는 잘 모른다. 피카소를 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피카소가 어떤 그림을 그렸죠?” 하고 물어보라. 아마 열 명 중 아홉 명은 대답을 못할 것이다. 열에 한둘 ‘아비뇽의 여인들’이나 ‘게르니카’를 기억해낸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다시 “그 그림이 무엇을 그린 건가요?” 하고 묻는다면, 거기에 답할 사람은 100명 중 1명쯤 될 것이다. 놀랍게도 ‘게르니카’가 ‘스페인 내전 중 스페인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공습과 학살의 참상을 고발한 벽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그럼 그 그림이 왜 위대한 거죠?” 하고 물어보라. 이 질문까지 통과할 사람은 정말이지 1000명에 한 사람 만나기도 어렵지 않을까?
이것이 피카소의 모순이다. 20세기 예술가 중 가장 유명하며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화가이나, 작품보다 작가 개인이 훨씬 유명하다는 것. 이는 화가에 대한 모독일지 모른다. 왜 사람들은 피카소라는 이름은 기억하면서도, 정작 그가 그린 그림은 기억하지 못하는가?
모딜리아니(맨 왼쪽), 앙드레 살몽(맨 오른쪽)과 함께 한 피카소.
답은 명백하다. 별빛을 가리는 태양처럼 피카소라는 인물 자체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의 압도적인 천재성은 그밖에 모든 것, 심지어 그의 작품까지 빛바래게 만드는 찬란한 태양이었다. 미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 피카소의 다부진 몸매와 동물적 감각으로 빛나는 눈동자, 캔버스 앞에서의 신들린 몸놀림 등을 보면 과연 천재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하나의 ‘현상’이었다.
일찍이 피카소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아홉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데생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다. 화가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화풍을 얻기 위한 고독한 수련기를 거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피카소에게는 이 같은 습작 시기가 없다. 그 자신의 말처럼 아홉 살에 이미 대가의 솜씨로 그림을 그렸다. 열네 살에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입학할 때는 한 달 동안 그려야 하는 입학시험 과제물을 하루에 다 해치워버렸다.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서도, 그리고 2년 후 입학한 마드리드 왕립 아카데미 미술학부에서도 피카소가 배울 것은 거의 없었다. 특히 그의 데생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미술교사이던 아버지 호세 피카소는 아들의 데생 솜씨를 보고 경악한 나머지 더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천재에게 “당신은 어떻게 천재가 되었나요?” 하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마치 미인에게 “당신은 어떻게 미인이 되었나요?”하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이없는 일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법이 거의 없었지만, 어떻게 그처럼 많은 그림을 그렇게 빨리 그릴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화폭에 무엇을 옮길지 사전에 모르고, 심지어 어떤 색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업하는 동안 내가 무엇을 그리는지 모른다. 그림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자신을 공중에 던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언제 땅에 내려설지도 전혀 모른다.”
그는 한 번에 서너 장의 그림을 펼쳐놓고 동시에 작업했다. 여러 캔버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밤 11시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11시가 넘어서야 저녁을 먹기 위해서 붓을 놓는 그를 보고 ‘피카소의 여인’ 중 하나였던 프랑수아즈 질로가 피곤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몸은 바깥에 가 있어.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신발을 밖에 벗어두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피곤할 수가 없지”라고 대답했다. 스무 살의 피카소를 본 화가 브라크는 그가 마치 ‘불을 뿜기 위해 석유를 들이마시는 광대처럼’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는데, 이 정열적인 기질은 아흔 살이 넘도록 사그라지지 않았다.
피카소를 둘러싼 사람들
피카소가 태어난 곳은 스페인이지만, 화가로 일가를 이룬 곳은 프랑스다. 그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로 건너왔다. 파리의 예술가들은 오래지 않아 이 스페인 젊은이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아폴리네르, 로랑생, 모딜리아니, 앙드레 살몽, 브라크 같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몽마르트르에 모였고 이들은 ‘세탁선(Bateau-Lavoir)’이라 불린 피카소의 아틀리에에서 함께 지냈다. 이 아틀리에 2층에 있던 피카소의 방은 그림과 물감, 세간들이 엉망으로 쌓여 있어 더는 지저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청년 피카소의 ‘청색 시대’가 지나가고, ‘아비뇽의 여인들’(1907)이라는 대작과 함께 입체파 화가 피카소가 탄생한다. 살롱전은 물론 이 낯선 화가를 외면했지만, 1909년에 열린 화상(畵商) 볼라르의 전시회에서 피카소의 작품이 평론가들과 화랑의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 미국, 독일의 화랑들이 앞 다투어 그의 그림을 사들였다.
몽마르트르 예술가 그룹에서 피카소처럼 쉽게 성공을 움켜쥔 이는 없었다. ‘세탁선’과 몽마르트르의 카페 ‘라팽 아질’에 모이던 치들 중 모딜리아니는 가난 속에서 요절했고, 아폴리네르는 스페인 독감으로 급사했으며, 로랑생은 독일 남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추방당했고, 막스 자코브는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 죽었다. 몽마르트르의 끔찍한 가난을 온몸으로 버텼던 이들 중 피카소만이 살아남았다.
피카소의 그림이 특별했던 것은 그가 형태나 대칭을 고의로 무시한, 즉 입체파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피카소의 그림에는 아프리카의 원시예술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에너지가 넘쳤다. 사조나 양식을 따지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섹슈얼한 매력이 그림 속에 있었던 것이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새까만 눈,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스페인 남자의 모습도 대중의 열광을 얻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독창적이고 과감한 그림에 화가의 이국적인 이미지가 합쳐지자 파리 미술계는 온통 피카소에게 매혹되고 말았다. 스무 살에 무일푼으로 파리에 온 피카소는 서른이 되었을 때 파리 최고급 주택가에서 하녀와 요리사, 운전기사를 두고 생활했다.
그리고 이 천재 화가 옆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때로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고, 때로 그의 아이를 낳은 아내였다. 여자는 늘 바뀌었다. 피카소는 평생 일곱 명의 여자와 동거했고, 그중 두 명과 결혼했다. 물론 드러나지 않은 여자가 무수히 많았다. 피카소가 그린 수많은 그림을 보면 절대 다수가 여자 또는 화가와 모델을 그린 것이다. 노골적으로 에로틱한 그림, 춘화를 연상시키는 판화도 적지 않다. 여자, 황소, 미노타우루스, 모델, 화가, 투우, 새…. 피카소가 평생 그린 그림의 주제는 이런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여자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반면, 남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피카소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남자는 대부분 화가, 즉 피카소 자신이다.
아내와 여자?
몽마르트르의 세탁선 시절, 석유를 살 돈이 없어 등잔 대신 왼손에 촛불을 들고 오른손으로 밤새 그림을 그리던 때에 피카소는 한 여자를 만났다.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이 아름다운 여성은 세탁선 건물로 비를 피해 뛰어들었다가 마침 복도에 서 있던 피카소, 검은 눈이 매혹적인 남자에게 이끌렸다. 페르낭드는 피카소의 첫인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작은 키에 가무잡잡했으며 몸집도 작았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의 눈은 깊고 어두웠으며 뭔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이었다.” 두 사람은 1905년부터 1912년까지 동거했다. 쓰레기 더미 같은 화실에서 피카소는 미친 듯이 페르낭드를 사랑하다가, 페르낭드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 화실에 누군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페르낭드는 “잠깐만요, 옷을 입을 때까지 좀 기다려주세요!”하고 외치곤 했다. 이 기간에 피카소는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리고 무명 화가에서 사교계의 총아로 발돋움했다.
‘울고 있는 여인’
그러나 이 아픔은 오래가지 않았다(피카소가 에바의 투병생활을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피카소는 에바의 병세가 깊어지자 그녀를 곧 요양소로 보내버렸다). 1917년, 피카소는 장 콕토를 통해 디아길레프의 발레단 ‘발레 뤼스’(한때 니진스키가 활동했던 전설적인 러시아 발레단)의 새 작품 ‘퍼레이드’의 무대미술을 맡아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이 작업을 위해 이탈리아 로마로 간 피카소는 발레단원인 올가 코흘로바와 사랑에 빠진다. 발레 자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피카소는 러시아 귀족다운 우아함과 세련미가 몸에 배어있는 올가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올가는 상류사회의 귀부인 생활을 원했고, 피카소는 그녀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보헤미안 생활을 청산하고 1918년 7월12일 파리의 러시아 정교회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피카소는 올가에게 고전적인 필치의 초상화를 선물하기도 했다.
올가와 결혼한 후 피카소의 생활은 또 달라졌다. 그는 지팡이를 들고 모자를 썼으며 줄을 빳빳하게 세운 바지를 입었다. 올가는 새 아파트를 귀족 취향으로 호사스럽게 꾸몄다. 친구들의 놀람과 질시에도 이후 7년간 피카소는 완전한 상류 사회 일원으로 살았다. 1921년에 아들 파울로가 태어난 것도 피카소의 이 같은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올가의 세련된 마나님이자 권위적인 안주인 스타일과 피카소의 예술혼은 궁극적으로 화합할 수 없었다. 피카소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등장한 초현실주의에 이끌리며, 다시 열일곱 살의 아름다운 처녀 마리 테레즈 발터를 만나 자유분방한 생활로 되돌아간다.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에게 비밀리에 집을 마련해주고,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울고 있는 여인’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유명한 화가인지 모를 정도로 순진한 처녀였다. 이 여자를 통해 피카소는 자신의 천재성을 되찾고 억눌러왔던 창작욕을 발산했다. 그는 사교계에 발을 끊고 초현실주의에 투신했으며, 100여 점에 달하는 판화 ‘볼라르 연작’과 테레즈를 모델로 한 조각들을 제작했다. 동시에 한쪽에는 부인 올가와 아들 파울로가, 다른 쪽에는 정부(情婦) 마리 테레즈와 딸 마이야가 있는 복잡한 생활을 했다. ‘피카소의 아내’라는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올가는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다. 피카소는 거액을 들여 최고의 변호사들을 고용했지만, 어떤 변호사도 이혼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후에도 피카소의 곁에는 여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사진작가 도라 마르, 젊은 여인 프랑수아즈 질로가 그의 곁에 있었으며, 1954년에는 일흔넷의 나이에 자클린 로크와 마지막 연애를 시작했다. 끝까지 그의 아내로 남았던 올가는 1955년 암으로 사망했다. 1961년, 여든이 넘은 피카소는 서른 살의 자클린 로크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자클린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왜 피카소는 한 여자에게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여자를 찾아다녔을까?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의 화려한 여성편력으로 치부해버리기엔 아쉬움이 남지 않은가? 피카소가 갈망했던 것은 아내와 함께하는 안락한 생활이 아닌, 아찔하도록 거칠고 위험한 연애, 그리고 예술혼을 자극하는 젊은 애인이었다. 올가는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아내였지만, 그녀가 아내로서 남편과 동등한 위치에서 애정을 주고받으려 하는 것을 피카소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철저히 이기적이었다. 한번 마음이 식으면 다시는 그 여자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피카소의 명성이 날로 높아가는 동안, 피카소에게 버림받은 여자들의 인생은 비슷비슷하게 파멸했다. 피카소를 만나기 전 촉망받는 사진작가였던 도라 마르는 피카소와 결별한 후 정신병자가 되었다. 1937년 도라를 모델로 그 유명한 ‘울고 있는 여인’을 그린 피카소는 자신 때문에 굴절된 도라의 삶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도라가 정신병원을 전전하는 동안, 피카소는 새로운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와 함께 남프랑스의 별장에 머무르며 지중해의 풍광을 즐겼다. 마리 테레즈와 자클린은 각각 1977년과 1986년에 자살했다. 생전의 피카소를 엑상프로방스의 보브나르그성에 가두다시피 했던 두 번째 아내 자클린은, 피카소가 죽은 후 집의 모든 창에 검은 커튼을 치는 등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이 들수록 강해지는 창작력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는 “피카소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는 늘 젊고, 그런 점에서 볼 때 천재적이었다”고 평한다. 피카소처럼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떨친 예술가가 죽을 때까지 그 천재성을 유지한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천재들은 어린 시절 반짝거리다 성년이 되면서 그 광휘를 잃어가든지, 아니면 막 중년이 되는 시점에 죽어버려 영원한 전설로 남는다. 그러나 피카소는 한 세기 가까운 삶을 누리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줄기차게 명예와 부를 유지했다.
언제나 빛바래지 않고 늘 새것처럼 작품들에서 반짝거린 천재성 덕분이었다. 그는 여든아홉 살이 될 때까지 새로운 작품으로 채워진 전시회를 열었으며, 해가 거듭될수록 그의 신작들에 대한 찬사는 늘어만 갔다. 아흔 살에도 그는 그림과 판화, 조각, 시(詩)와 희곡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막론하고 왕성하게 창작했다. 60년 동안 회사원이나 아버지로 사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60년 동안 천재로 산 사람이 피카소 외에 또 있을까!
그가 평생 젊은이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연애사건,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관계 덕분이 아니었을까. 피카소의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보면, 여자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작품 경향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 애인을 만날 때마다 그의 창조성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브라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피카소에게 여자란 ‘광대가 불을 뿜기 위해 들이마시는 석유’나 다름없었다.
피카소가 긴 생애에서 천착했던 주제로 여자 외에 미노타우루스와 황소, 올빼미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루스는 미노스 왕의 아들로 반인반수(半人半獸)는 괴물이라 미노스 왕궁 지하의 미궁에 갇혀 공물로 바쳐지는 젊은이들을 먹고 살았다. 어느 날 영웅 테세우스가 이 괴물을 해치우러 미궁에 들어온다. 그는 공주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실타래를 들고 와, 미노타우루스를 해치우고 실타래에서 풀린 실을 따라 미궁을 탈출한다.
피카소는 상반신은 사람이고 몸은 황소인 미노타우루스에게 본질적으로 끌렸다. 왕자인 동시에 야수, 사람인 동시에 황소인 이 괴물은 왕궁의 지하에 갇혀 살며 사람고기를 먹는다. 피카소는 미노타우루스의 처지에 이상한 동질감을 느꼈다. 미노타우루스의 모습은 그의 그림에서 때로 심각하게, 때로 희화적으로 변화하며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만년으로 갈수록, 그림 속 미노타우루스는 피카소의 모습과 흡사해진다.
1955년 사진작가 앙드레 빌레가 찍은 피카소의 작업 모습.
미노타우루스와 함께 피카소가 매혹된 동물로 올빼미가 있다. 피카소는 젊은 시절, 상처 입은 올빼미 한 마리를 누군가에게서 얻어 기른 적이 있다. 올빼미의 상처를 치료해주며 피카소는 올빼미의 눈, 모든 것에 초연한 철학자 같은 눈매에 빠져들었다. 피카소는 올빼미 외에도 비둘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올빼미에게는 어떤 미신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답게 마법이나 미신 등에 대해 특별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피카소는 그리다 만 올빼미의 눈 부분에 두 개의 구멍을 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 위에 그 올빼미 그림을 겹쳐놓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피카소의 눈은 바로 올빼미의 눈, 초연한 듯싶지만 실은 욕망에 이글거리는 올빼미의 눈과 똑같았던 것이다!
살기 위해 젊은 여자를 잡아먹는 미노타우루스, 새끼가 어미를 잡아먹는 올빼미처럼, 피카소의 예술혼은 누군가를 제물로 해야만 타오를 수 있었다. 자신에게 버림받은 여자들의 불행을 헤아리기에 피카소는 너무 바빴다. 시시각각 엄습하는 영감을 좇아 하루에도 네다섯 점씩, 심지어 열 점 이상의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동경하는 이탈리아에 평생 한 번밖에 가지 않았으며, 미국에서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생트 빅투아르의 고성을 사들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했지만, 정작 피카소 자신은 그 부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70대가 된 피카소는 친구인 작가 엘렌 파르믈랭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화가의 작업이 결코 끝낼 수 없는 일이라는 거야. ‘오늘 열심히 일했으니까 내일은 휴일이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은 화가의 생에 절대로 오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카소는 자신을 찾아다니는 기자들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은둔생활을 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 그려진 대작 ‘게르니카’(높이 3.5m, 폭 7.8m의 이 벽화와 사전 작업인 45점의 스케치를 완성하는 데 단 6주 걸렸다)를 공산당에 입당한 그의 정치적 성향과 결부시키려는 세간의 호기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피카소에게 정치와 공산당 등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공산당 역시 대예술가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몰라 고심했다. 정작 모스크바에서는 피카소의 그림이 퇴폐화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에게 영원한 애정과 숭배의 대상은 오직 그림뿐이었다.
85세가 되던 해에 대대적인 개인전을 연 피카소는 남프랑스의 노트르담드비에 머물며 광적으로 그림에 몰두했다. 1970년 아비뇽의 교황궁에서 피카소 최후의 전시회가 열렸다. 마지막 전시에서 새로 확인된 경향은, 이 대가의 그림에서 스페인을 연상시키는 색채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는 세상을 뜰 날이 머지않았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1973년 4월7일, 피카소는 저녁 늦게까지 흰색의 누드 작품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 작품을 다 끝내지 못한 채, 피카소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4월8일 오전, 아무 고통 없이 숨을 거두었다. 죽기 12시간 전까지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피카소다운 최후였다.
예술가로서 피카소를 정의하자면, 그는 자신의 화폭에 20세기 정신을 모두 아우르고 표현해낸 단 한 명의 화가다. 그러나 예술가 피카소를 정의하기 이전에 인간 피카소를 정의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욕망’이다. 피카소의 우주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림에 대한 무시무시한 욕망이었다. 그 욕망은 때로 전대미문의 천재성이나 샘솟는 창작력으로, 또는 동물적인 욕정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곤 했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이 야수 같은 욕망은 쉴 새 없이 새로운 제물을 필요로 했다. 여자들이 차례로 제단에 바쳐졌고, 마지막에는 피카소 그 자신마저 욕망의 제물이 되었다.
끝도 없이 지속된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92년의 긴 생애 중 그 무시무시한 욕망이 완전히 채워진 순간이 잠깐이라도 있었을까? 노년의 피카소는 파르믈랭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은 시인의 삶을 살지만, 나는 죄수의 삶을 산다.” 그는 미노스의 지하 미궁, 천재성과 욕망의 혼합물질로 벽을 세운 미궁에 갇힌 불행한 괴물이 아니었을까.
▼ 파블로 피카소
● 1881년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
● 1901년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오가며 작업청색시대 시작
● 1905년페르낭드 올리비에와 만남
● 1907년‘아비뇽의 처녀들’ 완성
● 1911년마르셀과 교제
● 1918년올가 코흘로바와 결혼
● 1927년마리 테레즈 발터와 교제
● 1937년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게르니카’ 전시
● 1943년프랑수아즈 질로와 교제
● 1944년공산당 입당
● 1961년자클린 로크와 결혼
● 1967년레종 도뇌르 훈장 거부
● 1963년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개관
● 1973년92세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