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호

‘술꾼’ 룰라가 사랑한 브라질 국민주 ‘카샤사’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입력2012-06-21 11:0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룰라 다 실바 전 브라질 대통령의 인기는 여전하다. 연임을 하고 퇴임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대선후보로 꼽힌다. 이런 룰라 전 대통령도 술과 관련한 구설에 자주 올랐다. ‘룰라는 폭음을 일삼는 술꾼’이라는 ‘뉴욕타임스’ 보도로 브라질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고, 전 브라질 국가대표 축구선수 호나우두는 애주가 룰라를 비꼬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룰라가 사랑한 술은 브라질 국민주 ‘캬샤사’였다.
    ‘술꾼’ 룰라가 사랑한 브라질 국민주 ‘카샤사’
    동아일보 4월 15일자 국제 면에 오래간만에 브라질 전 대통령 룰라에 관한 기사가 게재됐다. ‘룰라 前대통령, 암 치료 후 첫 대중연설’이란 제목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66) 전 대통령이 5개월간의 후두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첫 대중연설에 나섰다. 룰라 전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자신이 거주하는 상파울루 시 인근 상 베르나르두 두 캄푸 시의 공공교육센터 준공식에 참석해 6분간 연설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높이 평가하고 오는 10월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집권노동자당(PT) 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행사에 참가한 주민과 지지자들은 룰라 전 대통령을 연호하며 그의 정치활동 복귀를 환영했다. 그러나 룰라 전 대통령은 연설 도중 여러 차례 기침하는 등 아직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않은 모습이었으며, 이 때문에 연설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27일 66번째 생일을 지내고 나서 후두암 판정을 받았다. 그동안 3번의 항암 화학요법과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거쳤다. 룰라 전 대통령은 3월 28일 후두암 치료를 끝내고 나서 곧바로 정치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기사 내용대로, 룰라 전 대통령은 2010년 성공적인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끝 마치고 나서 그 이듬해인 2011년 10월 후두암 판정을 받았다. 발병 원인은 그의 흡연 습관 때문으로 추정됐다. 치료 후 현재 검사로 관찰되는 암은 없어졌으나 병의 특성상 한동안 규칙적인 검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브라질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룰라의 공식적인 후계자로도 인정받고 있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현재 지지율이 70%를 넘는 현실에서, 전임 대통령인 룰라의 근황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은 지속되고 있다. 이는 브라질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그의 인기가 현역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여전하다는 방증이다.

    그의 후두암 발병 소식 이후 다소 주춤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브라질 정치권에서 룰라의 2014년 대선 출마설이 화제가 됐다. 브라질 선거법에서는 대통령의 3선(選)을 금지하고 있으나, 대선을 한 차례 이상 건너뛰고 출마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룰라의 폭발적인 인기를 감안하면 지금도 자신이 결심한다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2014년 대선 승리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브라질 국민은 예상한다.

    그러면 국제정치사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고 있는 룰라 전 대통령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본명이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Luiz In?acio Lula da Silva)인 그는 1945년 10월 27일 브라질 동북부에 있는 페르남부쿠 주의 작은 농촌 마을 카에테스에서 빈농의 8명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룰라의 여전한 인기

    그리고 1952년 7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대도시인 상파울루로 갔다. 룰라의 어머니가 앞서 고향을 떠난 남편을 찾아 자녀들을 데리고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이미 어머니의 사촌과 딴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가난 속에서 두 가족 간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고,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4년 후 다른 빈민가로 이사를 갔다. 그 후 룰라는 아버지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결국 알코올 중독 상태에서 1978년 세상을 떠났다.

    이런 집안 배경 때문에 그는 어릴 적부터 거리에서 땅콩과 오렌지 등을 팔아 가족 생계를 도와야 했다. 조금 커서는 구두닦이, 세탁소 점원 등을 하며 생계를 돌봤다. 남보다 늦은 10세 때 입학한 학교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4학년 때 그만뒀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이 전부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구리 공장 선반공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19세 때에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왼쪽 새끼손가락을 잃는 사고를 당한다. 이때 치료를 받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해야만 했던 아픈 경험이 그가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다.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되자 1969년 같은 공장에 근무하던 마리아(Maria de Louedes)와 첫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임신 중인 1971년 간염에 걸려 아이와 함께 그만 사망하고 만다. 룰라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1974년 노조 활동을 하다가 알게 된 여사무원이자 한 아이를 둔 과부인 마리자(Marisa·1950~)와 재혼했다. 이 여성이 바로 룰라의 현재 부인으로, 그들 사이에는 세 아이가 있다.

    룰라는 활발한 노조 활동을 통해 점점 그 위상을 높여나갔다. 그 결과 1975년에는 브라질의 자동차 산업의 중심 도시인 상 베르나르두 두 캄푸와 디아데마 두 도시의 철강 노조 위원장으로 뽑혔고, 1978년에 재선됐다. 1970년대 말 룰라는 불법 파업을 주동한 죄로 당시 브라질의 정권을 잡고 있던 군사정부에 의해 한 달간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룰라는 1980년 2월 10일 군사독재 반대 인사들과 함께 좌익 성향의 노동자당(PT) 창당을 주도한다. 그 후 노동자당은 1984년부터 대통령 직접선거를 위한 개헌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쳐나갔다. 당시 브라질은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만들어진 1967년 헌법에 의해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문제는 국회 선거는 일종의 형식에 지나지 않아 실제 군부회의에서 밀실회담을 거쳐 유망한 퇴역장성들 가운데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공공연한 관행이었다.

    노조활동으로 높아진 정치적 위상…3전4기 대통령

    룰라와 노동자당의 꾸준한 노력에도 1984년 처음 제출된 대통령 직선에 대한 수정 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원래의 법안대로 이듬해인 1985년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룰라의 지원을 받은 민간인 출신 탄크레도 네베스(Tancredo Neves·1910~1985)가 당선되는 성과를 얻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취임식을 앞두고 네베스가 급사해 부통령이던 조제 사르네이(Jos?e Sarney·1930~)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마침내 4년 후인 1989년에 숙원이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룰라는 그동안 1982년 상파울루 주지사 선거에서 한 차례 낙선한 후 1986년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

    그러나 대권 도전의 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1989년 직선제로 수정된 헌법하에 첫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룰라는 급진 개혁 정책을 내세우며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지만, 친기업 정책과 반부패 공약으로 지지 세력을 결집한 군소후보인 페르난도 콜로르 데 멜로(Fernando Collor de Mello·1949~)에게 예상 밖 패배를 당하고 만다. 절치부심(切齒腐心). 룰라는 1990년 국회의원 재선을 포기하면서까지 노동자당의 외연을 넓혀나갔지만, 1994년 선거에서는 브라질 경제의 발목을 잡았던 인플레이션을 해결한 전 재무장관이자 사회민주당 후보인 페르난도 엔리케 카를로소(Fernando Henrique Cardoso·1931~)에게 패하고 만다. 이어 벌어진 1998년 선거에서는 더 큰 표차로 낙선한다. 결국 2002년 10월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후보 조제 세라(Jos?e Serra·1942~ )를 이기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다. 3전4기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폭음을 일삼는 술꾼

    룰라 취임 당시 브라질 경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세계는 브라질의 국가부도를 우려할 정도였다. 하지만 취임 후 룰라는 좌우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적 자세로 브라질 경제를 일으켜 국가부도설까지 나돌았던 브라질 경제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5% 가깝게 성장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 기간 브라질의 국내총생산(GDP)은 3배 이상 커졌고, 외환보유액은 10배 가까이 늘었다. 브라질 GDP는 2005년 한국을 제치고 세계 12위로 올라섰고, 현재는 세계 8위다. 그리고 룰라는 재임기간 중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하계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 각종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고 주도적인 외교 행보를 보이면서 브라질 국민의 자부심을 크게 높였다.

    이런 업적으로 그는 2006년 재선 성공에 이어, 2010년 선거에서는 퇴임을 앞두고도 80%가 넘는 국민적 지지를 받는다. 공식 후계자이자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1947~)의 당선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정치 영웅’ 룰라가 첫 대통령 임기를 보내고 있던 2004년, 그의 음주에 관련된 미국 ‘뉴욕타임스(NYT)’ 기사 하나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룰라 대통령을 ‘폭음을 일삼는 술꾼’으로 묘사하며, 이런 룰라의 술버릇이 대통령직 수행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요지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그해 5월 9일 NYT에 보도된 다음 날 브라질 신문에서 이를 인용 보도해 일약 국제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국내에서도 주요 일간신문들이 앞 다투어 이에 관한 기사를 보도했는데, 5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보자.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을 술꾼으로 묘사한 NYT 보도에 브라질 전역이 들끓고 있다. 뉴욕타임스 브라질 특파원 래리 로터는 9일자에서 ‘브라질 사람들이 대통령의 지나친 음주로 인해 업무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10일 대부분의 브라질 조간신문 1면을 장식하자, 룰라 대통령 지지자는 물론 반대파까지 발끈했다. 안드레 신제르 대통령 대변인은 ‘믿을 수 없는 취재원에게서 들은 얘기로 기사를 쓴 것은 심각한 명예훼손’이라며 ‘분노와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NYT가 인용한 소식통은 룰라 대통령의 반대 세력이거나 균형감을 상실한 일부 칼럼니스트라는 것. 한 언론인은 ‘룰라 대통령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기사로 다룰 정도의 사안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룰라 대통령의 출신을 거론하며 그의 과도한 음주를 옹호하는 반응도 있다.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층 유권자들은 그가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선반공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 그에게 ‘폭넓은 자유’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관용은 룰라 대통령이 간혹 대중 앞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때뿐만 아니라 종종 포르투갈어를 엉망으로 구사할 때도 적용된다는 것. 그러나 NYT의 보도를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 대통령에게 일침을 가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당시 이 기사를 쓴 기자의 취재원은 룰라에 대해 어느 정도 편견이 있는 사람이긴 했다. 한 사람은 룰라의 과거 노동운동 동지였으나 룰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 그의 정치, 경제적 기조가 바뀐 데에 큰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칼럼니스트로 과거 룰라의 정적이었던 페르난도 콜로르 데 멜로 측의 대변인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또 다른 칼럼니스트 한 사람도 평소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사람이었다.

    “‘술꾼 룰라’보도 NYT 사과 …브라질 대통령 수용”

    어쨌든 기사와 관련해 안드레 신제르 대통령 대변인은 NYT에 항의의 뜻을 전달할 것을 미국 주재 브라질대사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캐서린 매시스 NYT 대변인은 “우리의 보도가 정확하다고 믿는다”며 물러설 기세가 없음을 분명히 해 양측 긴장은 높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해 초 미국이 자국 입국 시 지문날인 제도를 도입하면서 양국 관계는 잔뜩 불편해져 있었다. 당시 미국은 지문날인 대상국에 브라질을 포함시켰고, 브라질은 이를 “나치 시대 이후 가장 극악한 일”이라고 비난하며 그 보복으로 미국 국민에 대해 브라질 입국 시 똑같은 조치를 적용했다.

    브라질 정부는 뉴욕타임스 측이 사과 의사를 보이지 않자 기사를 작성한 브라질 특파원 래리 로터의 비자를 취소하고 추방을 명령하는 강경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나온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은 자신을 ‘술꾼’으로 보도한 뉴욕타임스 특파원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14일 그의 업무 비자 취소를 무효화했다. 마르시오 토마즈 바스토스 법무장관은 문제의 기사를 쓴 특파원이 변호사를 통해 사과편지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바스토스 법무장관은 “나는 대통령에게 이 편지가 법률적으로 (기사의) 취소를 의미한다고 말했고 대통령은 그렇다면 이 사건을 끝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그는 로터 특파원이 “브라질의 제도에 대해 높은 존경을 표시했고 그의 기사가 야기한 논란에 대해 개탄했다”고 밝혔다. 로터 특파원의 변호사는 편지에서 로터가 “대통령의 감정을 상하게 할 의도가 없었다”고 말했다고 바스토스 장관은 전했다. 브라질 주재 외국 특파원에 대해 추방 조치가 내려진 것은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 이후 약 30년 만에 처음이었다.

    룰라의 대통령직 업무 수행과 술에 관련된 외신 간의 신경전은 이렇게 해결됐지만, 룰라 대통령이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신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그를 공격하는 측의 좋은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룰라의 음주에 대한 또 하나의 뜻하지 않은 구설이 보도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끌게 된다.

    2006년 6월 9일 당시 독일에서 개최된 월드컵(2006 FIFA World Cup) 개막에 즈음해 브라질의 인기 TV 채널인 ‘레데 글로보(Rede Globo)’는 전날 밤 룰라 대통령과 당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 감독인 파레이라(Carlos Alberto Parreira) 감독의 화상인터뷰를 방영했다. 룰라는 대통령 취임 이전에는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했으나 첫 번째 임기 4년 동안에는 불과 두 차례 인터뷰에 응했다. 그래서 이 인터뷰에 대해 반대 진영에서는 그해 하반기에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룰라가 월드컵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의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인터뷰에서 룰라는 파레이라 감독에게 “(월드컵 최다득점(15점) 기록을 세운 브라질의 전설적 스트라이커) 호나우두가 과체중 상태라는 소문이 있다. 그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혹시 그가 정말 그러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파레이라 감독은 “그것은 소문일 뿐 호나우두는 4년 전, 8년 전보다 더 강하다”라고 답했다.

    “호나우두가 과체중이냐?”

    그리고 그 다음 날 기자들이 호나우두에게 그 인터뷰 대화에 대한 소감을 묻자, 호나우두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뚱뚱하다고 하고 대통령을 보고는 술을 너무 마신다고 한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오해하는 것처럼 대통령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했다. 가벼운 일로 끝날 수 있는 이 에피소드가 얼마 후 과거 룰라 대통령에 대한 음주 보도로 악연을 맺었던 NYT의 래리 로터 기자가 과거 군사정권 시절 특정 선수를 대표팀에 선발하지 않은 감독을 해고한 에밀리오 메디시 장군과 룰라 대통령을 비교하면서 “룰라 대통령이 국민과의 친밀감을 강조하기 위해 축구를 이용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사건이 커졌다. 그는 또 룰라 대통령이 대표팀 선수인 주니뉴 페르남부카누에게도 출전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 것을 지적하면서 “룰라 대통령이 대표팀의 선수 기용에도 간섭하고 있다”고 비꼬기도 했다.

    이처럼 술에 대한 룰라 대통령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술을 많이 마신다는 사실 자체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룰라 자신도 부인하지 않는 다. 이 사실은 오히려 그의 척박한 성장 환경을 대변하는 방편으로 옹호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초기 일부 언론의 악의적 평가에도 그의 음주와 대통령직 수행에는 전혀 부정적인 영향 관계가 없었음이 결과로서 증명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당연한 궁금증이 생긴다. 뭇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이 현대판 영웅이 그토록 즐겨 마셨던 술은 과연 무엇일까.

    질문에 대한 답은 브라질 국민의 입장에서는 자명하다. 바로 브라질의 국민주 ‘카샤사’다. 카샤사는 우리나라로 치면 소주와 막걸리를 합쳐놓은 것과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다. 카샤사는 이미 브라질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 유명한 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브라질에서만 무려 5000여 개의 제품이 생산되는 카샤사는 브라질 국내에서는 맥주 다음으로 소비량이 많고, 세계적으로도 증류주로서는 보드카와 소주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명실 공히 브라질의 국민주다.

    카샤사는 16세기 당시 브라질을 식민 지배하고 있던 포르투갈인들이 자국 영토인 아프리카 인근 마데이라 섬에서 사탕수수를 들여와 서아프리카에서 데리고 온 노예를 시켜 경작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카샤사는 사탕수수를 사용한 증류주란 점에서는 럼(rum)과 같은 성질의 술이다. 따라서 이 술을 럼과 혼동하거나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럼이 사탕수수에서 사탕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검고 진한 즙인 당밀(molasses)을 원료로 사용하는 데 비해 카샤사는 사탕수수를 압착해 만들어지는 주스의 발효액으로부터 직접 증류한다. 당연히 향과 맛도 다르다.

    카샤사는 원래는 증류 후 따로 나무통에서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는 저렴한 술이었다. 따라서 술 자체의 투명한 색을 띠어 흔히 ‘흰색 브라질 럼(White Brazilian rum)’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카샤사 중에서도 2~12년 정도 나무통에서 숙성시킨 고급 제품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때 숙성 나무통으로 보통의 오크통이나 브라질 자국산 나무통을 사용한다. 숙성 제품의 색깔은 나무통의 영향으로 위스키나 코냑과 비슷한 색을 띠며 맛은 한결 부드러워진다.

    흰색 브라질 럼

    법적으로 ‘숙성 카샤사’로 표현하려면 나무통에서 1년 이상 숙성시켜야 한다. 카샤사는 술의 특성상 숙성 기간이 길다고 반드시 맛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카샤사 애주가들은 장기 숙성 제품보다 1~2년 정도 숙성된 제품을 선호한다.

    브라질에서 카샤사 제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사탕수수가 브라질에 처음으로 소개된 155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 우연히 사탕수수즙의 발효가 일어나 술이 얻어지게 되고 이를 증류 기법을 사용해 보다 강력한 증류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카샤사가 만들어진 초기에는 대부분의 술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각종 민간 치료에 널리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축제에서 노예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도 당연히 했다.

    카샤사는 오랫동안 노예, 원주민, 선원 등 하층들의 술로 인식돼왔다. 브라질의 부유층은 와인이나 스카치위스키, 코냑 등 유명 수입 술을 주로 마셨다. 이런 경향은 물론 최근까지 없어지지 않았지만 카샤사의 위상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현재 카샤사는 브라질의 바, 식당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으로도 인기 술이 됐다. 이런 인기를 반영하듯 브라질 내에서만 수천 종류의 카샤사 제품이 소개되면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카샤사 붐에 고무된 브라질 정부는 카샤사의 상품가치를 멕시코의 ‘데킬라’ 수준으로 높이려고 2000년대에 들어 카샤사라는 용어는 브라질산(産) 제품에 한해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지역 연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한국산 제품에 한해서만 사용하라는 주장과 같다. 세계무역기구(WTO)에도 이런 의견을 제출했고 유럽연합(EU)에도 이런 주장을 전했다.

    카샤사는 보통 40~48%의 알코올 도수를 가지고 있다. 스트레이트로 즐길 수도 있지만, 보통은 카이피히냐(Caipirinhia)라는 칵테일 형태로 많이 소비되고 있다. 이 칵테일은 카샤사를 신선한 라임과 설탕에 섞어 텀블러 잔에 얼음과 함께 나온다. 그 시원한 맛이 정말 일품이다. 이 칵테일은 브라질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너무 유명해져서 카샤사의 음용 방법의 표준으로까지 인식될 정도다. 심지어 카샤사는 몰라도 카이피히냐는 알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브라질 현지에서는 카이피히냐를 몇 잔 마시느냐에 따라 술꾼의 주량을 가늠하는 척도로도 쓰인다. 마치 우리나라의 폭탄주와 같은 사회적 상징물인 셈이다. 카이피히냐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카샤사는 주로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제품을 사용한다.

    이와 관련해 2003년에 룰라는 카샤사뿐만 아니라 카이피히냐 역시 오로지 브라질에서만 그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브라질의 넓은 국토를 반영하듯 카샤사는 지역에 따라 이름도 다르다. 카샤사가 주로 리우데자네이루 지역에서 사용되는 명칭이라면 상파울루 지역에서는 핑가(Pinga)로, 그리고 포르타레자 지역에서는 카나(Cana)라고도 불리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 정열의 삼바 춤, 광란의 축제 카니발, 그리고 아마존 강이 브라질의 상징이었다면 이젠 카샤사라는 술도 추가하면 좋을 듯하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