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갖가지 불안과 열패감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공통 질문이다.
- “스스로 세상의 중심에 서야만 마음속 고민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신과전문의 윤대현 교수를 만나 이성적인 뇌와 감성적인 뇌를 함께 만족시키는 ‘날라리 행복론’에 대해 들었다.
“아직도 그 ‘진상’ 팀장 밑에서 일해요? 왜 직장을 안 옮겼어요? 사장은 아마 ‘진상’ 팀장과 부하 직원인 당신이 최고의 팀워크를 발휘한다고 생각할 거요.”
퇴근 후 포장마차에서 직장동료들끼리 나눌 법한 대화다. 하지만 아니다. 환자와 의사가 마주 앉은 정신과 진료실 풍경이다. ‘친절한 의사’보다 ‘솔직하고 까칠한 해결사’가 되기를 바라는 윤대현(44)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잔뜩 움츠린 환자에게 “세상? 인생? 별거 없어. 힘내!”라고 말을 건넨다. 온갖 고민과 문제를 안고 진료실을 찾는 이들이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 마음의 병을 안고 오는 환자를 상대하는 정신과 의사라면 좀 더 친절해야 하지 않나요?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에 강의하러 가면 물어봐요. 옛날보다 세상이 엄청 친절해졌는데 그렇게 느끼느냐고요.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요. ‘고객 친절 서비스’니 뭐니, 친절조차 상업화한 이 사회의 친절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거지요. 제 편에서 봐도 그래요. 친절한 의사가 되려고 하니 이상한 병리현상이 생기더군요. 환자를 보면 막 짜증이 나고 마음이 비뚤어지는 겁니다. 친절을 상업화하는 데서 감성적인 스트레스가 온 거죠. 그래서 환자에게 친절하기보다는 환자를 위로하는 의사가 되자고 마음먹었어요. 예전에는 예약시간에 맞추느라 진료하면서도 다음 환자를 신경 썼는데 요즘엔 기다리든 말든 상관 안 해요. 말도 좀 더 거칠게 하고요.”
▼ 불친절한 의사라고 항의하거나 민원을 넣는 환자는 없나요?
“그동안 한 명도 없었어요.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면서 공감해주니 문제가 안 되더라고요. 환자가 만족하니 스스로도 ‘이거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제 감성이 보상을 받은 거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사는 현대인은 감성의 뇌가 지쳐 있어요. 감성 고갈 상태죠. 그래서 쉽게 짜증이 나고 화도 많아져요.”
생활습관 의학
뇌건강증진연구회 회원인 윤 교수는 ‘생활습관 의학(Lifestyle medicine)’에 관심이 많다. 질병의 대부분은 생활습관, 식습관, 운동습관만 바꿔도 상당부분 치료할 수 있다는 철학을 바탕에 둔 의학의 한 분야다. 현대 의학이 약물치료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시돼 미국이나 영국·호주 등에서는 이미 입지를 다지고 있다. ‘생활습관 의학’을 정신과에 접목한 윤 교수는 “정신과 의사는 정신 병리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서 한발 나아가 증상은 있는데 진단이 나오지 않는 환자, 막연히 위로받고 싶은 사람을 위한 철학적 카운슬링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심리발달은 사춘기 때 끝나는 게 아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70대에도 사춘기가 올 수 있다. 이때 정신과 의사가 조금만 도와주면 삶의 어려움과 고통·고민을 뛰어넘어 잘살 수 있다. 의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근 정신과에 대한 거부감이 줄면서 심각한 증상이 없어도 병원을 찾는 환자가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윤 교수처럼 일상의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해주는 ‘부드러운 정신의학(Soft Psychiatry)’을 치료에 활용하는 의사가 늘고 있다. 윤 교수는 특히 서울 강남에 사는 부유층과 기업 임원 등을 대상으로 우울증과 불안증, 스트레스증후군에 대한 정신과 상담을 자주 해 ‘대한민국 상위 1%를 가장 많이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로 알려져 있다.
▼ 부와 사회적 지위를 다 가진 사람이 뭐가 부족해 정신과를 찾나요?
“요약하면 하나예요. 열심히 일해서 많은 걸 이뤘는데 뭔가 허전하다는 것. 감성적인 보상의 문제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열심히 일해서 많은 걸 이루면 마음이 채워질 거 같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뇌는 그게 안 됩니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를 갖는 건 이성적인 보상이지 감성적인 보상이 아니거든요. 우리 뇌는 이성과 감성, 둘 다 충족되기를 원해요. 정신과를 찾는 소위 ‘상위 1% 사람들’이 그걸 보여주는 거죠.”
▼ 성공하기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많은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라고 하면 맥 빠질 것 같아요.
“열심히 사는 건 좋은 일이죠. 저는 환자에게 항상 ‘열심히 살아라, 성공하라’고 얘기합니다. 사장 하려는 사람이 부사장만 하고, 40평 아파트에 살고 싶은 사람이 30평 아파트에 산다면 만족할 수 있겠어요? 어차피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더 가지라고 해요. 다만 이성적인 삶과 감성적인 삶의 균형을 맞추라고 하죠. 그건 이성적인 성취를 줄이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소통과 공감
윤 교수는 성공한 사람이 정신과를 찾는 이유에 대해 “젊어서부터 승승장구한 사람은 일이 뜻대로 안 풀리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개중에는 ‘의욕이 없다’ ‘기력이 떨어졌다’고 오는 환자도 있다”고 했다.
▼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했으면서도 ‘허전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겐 어떤 처방을 하나요?
“그분들은 대체로 모범생이에요. 이성적인 성취를 위해 놀고 싶은 마음보다 해야 할 일을 우선해온 사람이지요. 사회 시스템에 맞추려다보니 마음과 다르게 살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성 뇌 피로증을 얻은 겁니다. 그래서 ‘감성의 뇌를 즐겁게 하라’ ‘젊은 친구를 만나라’ 같은 조언을 해요. 젊은 친구를 만나라고 하면 나이 든 분들은 대부분 ‘여자’를 생각하더군요.”
그는 60대 중반의 기업 CEO 얘기를 꺼냈다. 노년이지만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싱글의 이 기업인이 어느 날 실연한 사춘기 소년처럼 풀이 죽어 진료실에 들어서더니 “윤 교수 말 듣고 연애 비슷한 거 했는데 괴롭기만 하다”고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아마 여자한테 순수한 감정으로 다가갔다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충격을 받은 모양이에요. 그게 참….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친구를 만나 함께 웃고 떠들고 멘토가 돼주면 감성 보상이 이루어지거든요. 그런데 굳이 더 나아갔다가 문제가 생긴 거죠. 상징적인 조언을 듣고 싶은 대로 듣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어요. 말조심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꼭 그가 아니더라도 나이가 적당히 들고 성공한 이 가운데 사랑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종종 영화관을 찾는 윤 교수는 지난 4월 ‘롤리타 신드롬’과 ‘여주인공의 파격노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화제가 된 영화 ‘은교’를 관람했다. 박범신이 쓴 동명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영화의 줄거리는 일흔 살의 원로시인 이적요가 열일곱 살 여고생 은교를 만나면서 잊고 지내던 사랑의 열정과 욕망을 되찾게 되고, 그들 사이에 제자가 끼어들면서 파멸로 치닫는 것. 윤 교수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사랑을 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나이 든 환자들 때문에 아직 그 나이가 안 됐는데도 영화 속 노 교수의 마음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 ‘감성의 뇌’는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나요.
“소통과 공감을 하는 거죠. 열심히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 하고 명품 백을 사는 행동의 기저에는 관심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남보다 앞서나가고 남과 달라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끊임없이 경쟁하게 되는 겁니다. 문제는 그러다보면 감성의 뇌가 지쳐서 모든 게 싫어지고 나이 들수록 점점 더 고독해진다는 거예요. 성공한 사람일수록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공한 회장님보다 동네에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소소한 얘기를 나누는 시골 어르신이 얻는 심리적 보상이 더 클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공평한 거 같기도 해요.”
‘날라리’로 사는 법
윤 교수는 “행복을 느끼는 데 재산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감성의 목표를 낮추면 된다”는 설명이다.
“가령 작은 것에 기뻐할 수 있는 마인드 트레이닝을 하면 상대적으로 심리적 보상이 더 많이 채워집니다. 반면 재벌 2세처럼 사회적 지위와 부를 노력 없이 물려받은 사람의 경우 오히려 불행할 수 있어요.”
그는 아버지 회사에서 근무하며, 이미 후계자로 내정된 상태인 20대 후반의 젊은이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날 ‘아빠 때문에 너무 괴롭다’며 그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집이든 회사든 심리적으로 피할 곳이 있어야 하는데 양쪽 모두에서 아버지와 부딪치니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더라고요. 남 눈에는 팔자 좋은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부나 지위는 이성적인 성취일 뿐이에요. 고생 없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누리려면 감성적인 성취도 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잘 노는 겁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감성 보상이 되도록 노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에요.”
▼ ‘노는 것도 재주’라는 말도 있죠.
“네. 한번은 일에 지친 여성 환자한테 노는 걸 좀 연구해오라고 했더니 ‘방법은 하나도 못 찾고 고민만 했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자꾸 해결책을 얻는 데 집착하는데, 사실 노는 걸 연구하는 것 자체가 감성에 만족을 줄 수 있어요. 놀 궁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뇌는 진정한 휴식과 쾌감을 얻는 거지요. 노는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날라리’인데 인생의 30%쯤은 날라리로 살아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날라리’가 되면 인생이 정말 가볍고 경쾌해질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날라리’가 될 수 있죠?
“감성 위주의 삶을 사는 거죠. 사람들이 ‘날라리’라는 말을 좋아하는 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에 모범생이 많기 때문일 거예요.”
그는 모범생 진단법을 알려줬다. ‘오늘 꼭 해야 할 일’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뒤 둘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모범생일수록 둘의 차이가 크다. 해야 할 일의 리스트가 훨씬 길다. 윤 교수는 “‘날라리’가 되려면 전자의 항목을 줄이고 후자를 늘리라”고 조언했다.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하루 10분씩 사색하면서 걷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를 사귀고, 취미생활이든 뭐든 마음이 즐거운 일을 하는 것. 윤 교수는 이에 대해 “매우 아날로그적인 것들”이라고 했다.
“뇌를 쉬게 하려면 단락을 지어줘야 해요. 해야 할 일에 치이다 술 한잔 먹고 자는 일상이 계속 반복되면 인생이 무가치하게 그냥 흘러가버리죠. 사색하면서 삶의 목표를 재정립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그게 뇌의 단락이 됩니다. 자연스럽게 매일의 삶에 의미가 생겨요.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거죠. 그러려면 자유를 얻어야 해요. 저는 그걸 ‘바캉스(vacance)’라고 부르는데, 라틴어 ‘바카티온(vacation)’에서 온 단어예요. ‘쉰다’가 아니라 ‘자유를 얻는다’는 뜻이죠. ‘날라리’로 살아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윤 교수는 현대를 감성 마케팅의 시대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감성 마인드 트레이닝이 필요하다고 한다.
“언젠가 병원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적이 있어요. 술 한잔 먹고 길을 가는데 TV 광고가 보이더군요. SUV 차가 거침없이 질주합니다. 그 순간 확 자유가 느껴졌어요.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는 감성 마케팅 광고였던 거죠.”
감성 마인드 트레이닝
그는 구입한 지 1년도 안 된 차를 팔고 광고에 나온 차를 새로 샀다. 문제는 그 뒤로 오히려 자유가 없어졌다는 점. 차량 할부금을 내느라 일을 더 열심히 해야 했기 때문이란다. 윤 교수는 “새 차가 아니라 헌차라도, 심지어 차가 없어도 스스로를 근사하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게 감성 마인드 트레이닝”이라고 했다.
▼ 요즘처럼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쉽지 않은 일 아닌가요?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는 생각이 실은 착각일 수 있어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먹고살기 힘들었잖아요. 그때는 그야말로 생존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이 지금을 더 치열하다고 느끼는 건, 경쟁사회가 됐기 때문입니다.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저 경쟁 속으로 빨려들어간 거죠. 내가 뭘 얻으려고 하는지, 왜 얻으려고 하는지 모른 채 이성적인 목표만 추구하다보니 힘든 겁니다.”
▼ 그런 무의미한 경쟁에서 벗어나 ‘날라리’로 살면서 행복해진 환자가 있나요?
“의처증에 시달리다 찾아온 환자가 있어요. 진료를 받은 뒤 이혼하고 자기 사업을 일궈서 지금은 잘살고 있죠. 실연당한 미혼의 한 여성 환자는 자기가 못나서 차였다고 생각하고 남자를 무조건 피했어요. 그런 걸 ‘회피반응’이라고 하죠. 그 환자에게 ‘무조건 한 달에 한 번은 소개팅을 하고,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도 최소한 세 번은 만나라’고 처방했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소개팅 하면서 즐겁게 살고 있죠.”
짜증이 부쩍 늘고 부부관계가 안 좋아졌다며 찾아온 40대 투자회사 CEO에게는 ‘감성을 즐겁게 해줄 놀이를 찾으라’고 주문했다. 그는 어릴 적 좋아하던 게임기 모으는 걸 취미로 삼고,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늘리더니 180도 달라졌다. 자연스럽게 부부관계도 회복됐다.
“40대 후반의 발기부전 환자도 생각이 납니다. ‘부부관계가 잘 안 돼 우울하다”며 진료실을 찾아왔기에 약물치료와 생활습관치료를 3개월 정도 병행했죠.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오더니 저보고 너무 애쓰지 말라는 거예요. 발기부전 증상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옛날보다 신경이 덜 쓰이고 이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 같아 그만 치료 받으려 한다’며 가버리는 겁니다.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문제를 대하는 환자의 반응이 달라진 거죠. 인간은 자존감이 강해지면 똑같은 문제라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요. 발기부전은 치료하지 못했는데 환자가 괜찮다고 하니 내가 치료를 한 건지 아닌지 헷갈리더군요.”
마음 아프지 마라
최근 윤 교수는 ‘마음 아프지 마’(쌤앤파커스)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책에서 우리 사회를 “목표가 너무 높아 앞만 보고 달리느라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진단하고, 다양한 환자 사례를 통해 ‘착하게 살지 마라, 정색하고 살지 마라, 착한 척은 그만하라, 몸무게 대신 삶의 무게를 줄여라, 월급 받은 만큼 일하라, 조금은 날라리처럼 힘 빼고 살아보라’ 등의 조언을 건넨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특히 관심이 많다고 했다. “조금만 도와주면 좋아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불안이에요. 막연한 두려움이 바로 불안인데, 그걸 만드는 건 협박이죠. 협박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실질적인 협박’과 자신이 자신을 협박하는 ‘셀프(self) 협박’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요즘 많은 건강염려증은 죽음에 대한 셀프 협박에서 시작됩니다. ‘결혼적령기’에 대한 사회적인 협박을 비롯해 먹거리를 다루는 TV 프로그램, 노후자금이 얼마 이상 필요하다는 기사 등 온갖 협박이 양산되는 세상이에요. 그런 협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보면 전의가 불타오릅니다. 확 고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전 협박을 정말 미워해요.”
윤 교수가 마지막으로 들려준 이야기의 주인공은 40대 초반 여성이었다. 심한 부부갈등으로 잠시 바람을 피운 그는 상대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하면서부터 협박을 당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둘이 찍은 사진을 퍼뜨리고 남편에게 알리겠다고 했다. 환자는 불안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가 ‘모든 사실이 알려져 이혼을 당한다고 치자. 어차피 남편이 맘에 들었던 것도 아닌데 이 참에 새로운 삶을 살면 되지 않느냐’고 했어요. 협박범이 가장 당황할 때는 협박이 안 먹힐 때거든요. 또 변호사와 상의해 협박범을 공격할 수 있는 약점을 찾으라고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불안감에서 벗어난 환자는 그 후로 병원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윤 교수는 현대인이 갖가지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도 실체 없는 목적을 향해 기를 쓰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본다. 항상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그들과 닮기 위해, 혹은 앞서가기 위해 애쓰는 건 인생의 중심에 ‘나’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돼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는 게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길”이라는 윤 교수의 조언이 힘 있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