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용 :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그게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씨가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겁니다.
문제는 당시가 반공이 불가피한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어요.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반면에 우리는 내외적인 위협에 의해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4·19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 박정희씨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거죠.
박 : 근소한 차이기는 하지만, 박정희씨는 윤보선측의 사상 공세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민주공화당에 합류한 지식인들의 태도가 그의 승리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시 지식인들은 박정희씨를 어떻게 평가한 것일까요.
강 : 저 개인적으로는 박정희를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기적으로 몇 단계로 나눠서 이뤄져야 할 것 같아요. 특히 5·16 직후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그 이후의 평가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사혁명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5·16이 나던 무렵은 도저히 나라가 유지될 수 없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분위기였지요. 4·19는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4·19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는 바람에 학생들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역할을 더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조장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지식인들 중에는 비록 바람직하진 않지만, 보다 건전한 생각을 가진, 애국심으로 충만한 군인들이라도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이가 적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저는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윤보선씨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5·16이 좌익혁명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고, 박정희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보니 상당한 기대를 걸게 됐어요.
‘민생고 해결’ 다짐과 청렴함에 기대
박 : 박정희씨를 처음 만나신 게 언제입니까.
강 : 쿠데타 직후였죠. 그때 장도영씨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었고, 박정희는 부의장이었습니다. 육군 소장 군복을 입고 퇴계로 보훈처회관 3층에서 저를 만났습니다.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 내용이 ‘동아춘추’라는 잡지에 자세하게 나왔어요. 그때 제가 “독재할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독재는 군중을 끌어들일 만한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 하는 거다. 히틀러도 그랬고, 무솔리니도 그랬다. 신화 같은, 전설 같은 뭔가를 가져야 하는데, 이승만에겐 그런 게 있었다. 하지만 당신에겐 그런 게 없다. 그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일개 군인일 뿐이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민주주의를 할 사람으로 보진 않았어요. 일정 때 대구사범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온 사람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겠습니까.
다만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본 것은 혁명공약 중에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내용(‘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씨는 정말 가난한 농촌에서 농민의 설움이 뭔지, 굶주림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부정부패를 뿌리뽑으면 자연히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독재할 생각일랑 말고 민생부터 챙기라고.
박 : 박정희씨가 왜 목사님을 만나려 했을까요. 뭔가 부탁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