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령도 앞바다 NLL 부근에서 조업하는 중국 어선들. 건너편 육지는 북한의 장산곶.
그날의 충돌도 우리 어선의 월선이 원인이었다. 월선한 어선은 고속정의 유도로 NLL 이남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북한 경비정은 늘 그랬듯이 그것을 핑계로 남진(南進)했다. 오래된 일임에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기자가 고속정 근무를 하는 동안 북한 경비정과 가장 가까이 마주한 날이자 가장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남하를 계속한 북한 경비정이 NLL 코앞까지 밀고 내려왔다. 기자가 탄 고속정도 NLL에 최대한 근접했다. 레이더에 나타난 양측의 거리가 2노트마일(1노트마일=1852m) 이내로 좁혀지자 비상이 걸렸다. 사이렌과 함께 ‘총원 전투배치!’ 명령이 떨어졌다. ‘전투배치’는 한마디로 실전 상황이다. 모든 장병이 개인 화기에 실탄을 장전하고 갑판에 엎드려 사격자세를 취했다.
사통하사관이 포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함수의 30㎜포와 함미의 20㎜포가 경비정 쪽으로 포신을 돌렸다. 적 경비정이 20㎜포의 사정거리 안으로까지 들어왔다. 어느 쪽이든 포문을 열면 상대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거리였다. 통신실은 지휘부와의 교신으로 악머구리 끓듯 시끄러웠다. 지시 내용은 ‘먼저 쏘지는 말라’ ‘적정거리를 유지하라’ ‘NLL은 절대 넘지 말라’ 따위였다.
양측의 거리는 2㎞까지 좁혀졌다. 바다의 2㎞는 육지의 2㎞와 차원이 다르다. 적함이 육안으로도 또렷이 보였다. 망원경으로는 북한군 병사들의 얼굴까지 잡혔다. 정장의 지휘를 돕던 기자도 어느 순간 갑판에 엎드려 총을 겨눴다. 파도로 배가 흔들려 조준이 쉽지 않았다. 하늘과 맞닿은 듯한 드넓은 바다에 보이는 것이라곤 적함뿐이었다. 눈부신 햇살이 파도를 쩍쩍 가르고 있었다.
끌려가는 어선 낚아채 오기도
이날 북한 경비정은 1시간가량 무력시위를 하다 돌아갔다. 당시 북한 함정과의 ‘NLL 대치’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아슬아슬한 순간도 많았다.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한 날 북상하는 우리 어선을 쫓다가 북한 경비정과 거의 부딪칠 뻔한 고속정도 있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북한 경비정에 끌려가는 우리 어선을 중간에서 낚아채 오는 ‘전과’를 올린 적도 있다. 203편대의 이웃 편대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이 편대 소속의 한 고속정은 북쪽으로 달아나는 북한 경비정과 우리 어선의 한가운데로 달려들어 두 배를 연결한 홋줄을 도끼로 끊어냈다. 그와 동시에 홋줄을 던져 어선을 묶고는 쏜살같이 끌고 내려왔다. 이 사건으로 이 고속정과 해당 편대는 함대사령부 표창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북한측은 NLL을 ‘현실적인’ 해상경계선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듯싶다. 가끔 NLL을 슬쩍 넘어오기도 했는데, 우리 고속정이 출동하면 곧바로 뱃머리를 돌렸다. 뒷날 발생한 연평해전이나 서해교전 같은 실제 전투는 없었다. 무력충돌은 피차 위험하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흐른 2007년 11월 하순 기자는 NLL 취재차 백령도를 찾았다. 국회 국방위 소속 국회의원들의 NLL 시찰에 동행한 것이다. 한나라당 황진하·송영선 의원을 비롯해 국방위 수석전문위원과 보좌진, 국방부와 합참 및 해군 관계자 30명이 시찰 일정에 동참했다.
오전 10시, 경기도 수색에서 헬기를 타고 백령도로 날아갔다. 의원들과 군 관계자들은 해군 헬기(UH-60)를, 나머지 사람들은 공군 헬기(CH-47)를 이용했다. 소요시간은 1시간 반. 배로 가면 4시간 걸릴 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