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는 싫건 좋건 4월 총선에서 또 한 번 한나라당과 전면전을 치러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이 후보의 사무실이 있는 서울 남대문 단암빌딩에 정치부 기자들의 출입이 잦아진 게 사실이다. 물론 만에 하나라도 사실로 확인되면 낙종(落種)할 수 있다는 방어적 성격이 강했다.
이 후보는 출마설에 대해 한동안 긍정도 부정도 않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아니다’라고 하면 될 일인데 뜸을 들이자 출마설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단암빌딩에서 이 후보를 보좌해온 이흥주 특보가 출마 가능성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비좁은 단암빌딩 사무실에는 10여 명의 기자가 상주하기 시작했고, 이 후보가 칩거에 들어간 서울 서빙고동 자택 앞에는 방송 카메라진이 새벽까지 진을 쳤다. 특히 이 전 총재가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를 만난 데 이어 서빙고동 자택에서 강삼재 전 부총재를 면담하는 등 지난 대선에서 자신을 보좌한 인사들을 잇달아 만난 것으로 확인되면서 출마설은 갈수록 힘을 얻었다.
그 후 이 후보는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다”는 말을 남긴 채 부인 한인옥씨와 함께 지방 칩거에 들어갔고, 5일 만인 11월7일 전격 출마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로써 이 후보 출마설은 취재진과의 숨바꼭질이 20여 일 계속된 끝에 사실로 확인됐다. 다만 2002년 대선 패배 뒤에도 보좌를 계속해온 측근들은 꽤 오래전부터 이 후보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감지했다고 한다. 이 후보가 측근들에게 ‘출마’란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적은 없지만 이심전심으로 속뜻을 읽은 것이다.
측근들 사이에선 출마를 권유하는 분위기가 더 강했지만, 출마에 반대하는 인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쪽도 이 후보의 출마 가능성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의 출마가 대선판도에 몰고 올 격랑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72세의 노(老)정객 이회창은 그렇게 돌아왔다.
조직도 돈도 없었다
이 후보 진영은 강삼재 전략기획팀장과 이흥주 홍보팀장 ‘투톱’ 체제로 운영됐다. 5선 의원 출신 강 팀장은 선거 전략을 진두지휘하고 자원봉사자 일색인 캠프의 규율을 책임졌다. 캠프 관계자들은 “당신들은 감기에 걸려도 직무태만”이라는 강 팀장의 다그침에 알 수 없는 힘을 얻었다. 43세의 나이에 집권여당 사무총장에 오른 강 팀장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화려한 정치생활을 하다 ‘안풍(安風·안기부 자금 선거 전용) 사건’으로 정계를 떠났었다. 그런 강 팀장이 외롭게 법정투쟁을 할 때, 한나라당 총재이던 이 후보가 측근인 서정우 변호사와 이정락 변호사에게 “당을 위해 고생한 사람”이라며 무료 변론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때 도움으로 강 팀장은 2005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