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전선은 모스크바, 하바롭스크를 비롯해 옛 소련 및 자치공화국에 하부 조직을 두었다. 구국전선 지도부가 60~70대일 때 40대들이 현장에서 활약한 것이다.
‘신동아’는 A씨의 증언을 다각도로 검증했다. 미래전략연구원(원장 구해우)이 통일부의 의뢰를 받아 구국전선 핵심 인사를 비롯해 제3국에 망명한 북한 인사들의 증언을 녹취한 기록이 있다. 이 녹취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는데, A씨의 증언은 구국전선과 관련한 다른 망명인사들의 증언과 뼈대와 디테일이 일치했다. 정추의 증언과도 통했다. 그가 증언한 사안의 일시와 팩트, 인명을 기존 증언 및 문헌과 비교했는데 역시 일치했다.
A씨에 따르면 구국전선의 소련 내 맹원은 400명에 달했다. 북중국을 중심으로 중국에도 조직이 있다. 탈북자들을 흡수해 맹원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도 활동 중이다. A씨가 이끌던 ○○○동지회는 ○○명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북한의 엘리트 중심으로 조직이 이뤄졌다.
북한 식량난 이전 소련에 망명한 이들이 조직을 만들어 젊은 탈북자를 추가로 영입했다. 식량난 이후 탈북한 생계형 탈북자들과는 성격이 다른 사람이 모인 것이다. 구국전선 원로들은 사망했거나 고령이다. 40대로 현장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탈북자들을 흡수해 명맥을 잇는다. 현재는 김정은 정권 타도를 목표로 활동한다.
A씨와의 대화는 정식 인터뷰가 아닌 밥상머리에서 이뤄졌다. 그는 취재에 응하는 것을 꺼렸다. 구체적 활동 내용에 대해서는 “식구들에게 누가 될 수 있다”면서 답하지 않으려 했다. 대화는 중구난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A씨의 허락을 받고 대화를 녹음했다. A씨는 신원을 보호해줄 것, 구체적 내용은 다루지 말 것을 전제로 답했다. “현재의 활동 사항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A씨와의 대화를 1문1답 형식으로 소개한다.
“목표는 임시정부 건설”
▼ 누구와 일했나.
“허진 선생이 직속상관이었다.”
▼ 핵심 인사들은 사망했거나 고령이다. 현재 활동은?
“기업 형태다. 돈을 벌어야 할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위로금 보내줘야 하고 가족생활을 책임져야 한다. 용천역 폭발사고 때 맹원 8명이 죽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나는 한국에 들어와 있지만 언론에서 잘못 다루면 우리 식구들이 위험할 수 있다. 잘못하면 테러 조직으로 규정될 수 있다.”
▼ 한국에는 어떻게 들어왔나.
“○○라는 러시아 고려인을 통해 바티칸 교황청 고위 인사를 만나기로 했다가….”
▼ 구국전선에는 어떻게 가입했나.
“구국전선의 중심은 러시아와 옛 소련 공화국 망명자들이다. 허진 선생이 주도했다. 허 선생이 모스크바로 오라고 연락해왔다. 지역을 맡을 사람 3명 정도를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내가 선출됐다. 40대 초반으로 피가 끓던 때다.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구국전선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 구국전선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허진 선생의 목표는 임시정부가 건설되고 그곳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투쟁과정과 활동경력에 허진 선생이 끼친 영향은 많지 않다. 활동자금을 지원한 것도 많지 않다. 새 발의 피다. 돈 들어온 게 굉장히 많았는데, 그분이 돈과 관련해 문제가 있었다. 한국에서 돈 주고 그런 것을…. 우리도 한국 대통령이 준 시계는 하나 받았다. 허진 선생의 아내가 탈북자들을 아랫사람 다루듯 했다. 카자흐스탄 버섯공장 하나를 우리한테 넘겨줬는데 정상진(전 북한 문화성 부상)이 다 팔아먹었다.
30~40대 피 끓는 청춘은 자생 능력이 매우 강했다. 러시아의 벌목장도 인수했다. 구국전선의 실제 활동은 젊은이들 몫이었다. 어른들은 워싱턴, 도쿄를 다니면서 북한을 규탄하는 세미나를 열었을 뿐이다. 얼굴마담 노릇을 한 것이다.”
교황청에 北 인권 호소
▼ 주(駐)모스크바 북한대사….
“이상조 선생 딸들이 소련에서 어렵게 살았다. 우리가 잘나갈 때, 잘나갔다고 표현하면 안 되겠지만, 상층부에서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조직의 상층부에서 무시했다. 상층부는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북한이 붕괴 직전이라고 봤다. 그때 확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안타깝다.”
▼ 정추, 허진 등은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반대했을 뿐 사회주의자였던 것으로 안다.
“허진 선생은 ‘국가적인 공급체계는 옳았다, 좋았다’고 말했다. 사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 대목에서 젊은 사람들과 생각이 달랐다. 노선에서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사람이 태어나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었다. 철학적인 것을 떠나 자유롭게 제대로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꽉 막힌 시스템에서 산 우리가 지향한 것은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