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종사자 4만 명 생계 막막
베테랑 원전 기술자들이 떠나고 있다
“신한울 3·4호기라도 지어달라”
전기료 인상에 탈원전 잠시 멈칫?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9일 부산 기장군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열린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석했다. [동아DB]
원자력발전 부품을 제조하는 한 중소업체 대표의 한탄이다.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시작된 ‘탈원전’ 정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원전 부품 제조업자들의 근심이 커지고 있다. 국내 원전이 가동을 중단하기 전에 부품 생산 시장은 먼저 소멸하고 말 것이란 우울한 전망마저 나온다.
한국원자력기자재진흥협회에 따르면 원전 부품 등을 제조·납품하는 업체는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 등록업체 296개, 여기에 딸린 종사자만 1만2000명이 넘는다. 이 중 중견기업은 20%밖에 안 되고 나머지 80%는 종업원 수 20명 안팎의 중소기업이다. 한수원에 등록되지 않은 업체까지 합하면 원전 제조업체는 2000여 곳, 여기에 딸린 전체 종사자 수는 4만 명에 이른다.
지난 7월 9일 한국원자력학회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에게 맞는 에너지수급계획을 재정립하기 위해 심도 있고 성숙한 범국민 공론화의 장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학회는 “월성 1호기 조기 폐쇄와 신규 원전 부지의 고시를 무효화하는 등의 행정조치로 원전기자재 공급망과 원자력산업 관련 양질의 생태계가 붕괴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신고리 5·6호기 완공 전 부품 시장 문 닫는다
7월 9일 한국원자력학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탈원전 정책으로 원전기자재 공급망이 붕괴되고 있다”고 성토했다. [유튜브 캡처]
정부의 탈원전 로드맵에 따르면 현재 24기인 국내 원전은 2022년 28기까지 늘어나지만, 이후 수명을 다한 원전이 늘면서 2038년에는 14기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마지막 원전인 신고리 5·6호기의 수명이 60년 정도 된다고 보면, 국내에서 원전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기는 대략 2082년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부는 국내 원전은 문을 닫더라도 수출만큼은 적극 지원하겠다는 방침이다. 원전 부품 시장도 해외로 눈을 돌리면 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원전 수출과 국내 부품 시장은 큰 관련이 없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얘기다. 원전 수출은 크게 건설과 주기기(터빈), 보조기기(원자로 밸브, 펌프 등 부품)로 나뉘는데, 주기기는 원전 수출국 제품을 전부 사용하는 데 반해 부품은 원자력협정에 의해 자국산을 쓸 것을 권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전 수출 수주에 성공한다고 해도 보조기기에 해당하는 원전 부품 수출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 한 관계자는 “해외 다른 업체와 컨소시엄 형태로 원전을 수출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국내 부품 업체들에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는 국내 원전산업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다. 원전 부품 관련 업체들은 “이미 그전에 원전 부품 시장은 문을 닫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원전을 건설하려면 부품을 미리 만들어놓아야 하는데, 현재 국내 신규 원전 설계 일정에 따르면 국내 원전 부품 시장은 신고리 5·6호기 완성 직전인 2021년에 사실상 문을 닫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
따라서 업계는 6월 15일 한수원 이사회 당시 논의 대상에서 제외된 신한울 3·4호기 건설만큼은 어떻게든 사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의 제7차 전력수급 계획에 따르면 신한울 3·4호기를 포함해 2030년까지 국내에는 총 8기의 신규 원전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그에 따라 원전 관련 업체들은 토지와 설비를 갖추며 대대적인 투자를 강행한 게 사실이다.
한 원전용 계측기 생산업체 대표는 “앞으로 먹고살 일도 걱정이지만, 정부 계획만 믿고 투자한 돈을 어떻게 회수할지 막막하다. 신고리 5·6호기 납품은 예정대로 되겠지만 그 뒤가 문제다. 당초 정부가 공언한 대로 신한울 3·4호기 건설은 반드시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업체의 경우 전체 매출에서 원전 부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40~50% 정도 된다. 원자력 외에도 석유화학, 조선, 해양기자재 등에 사용되는 계측기를 만들고 있다. 조선업이 사양길에 접어든 상황에서 자구책으로 원자력 투자 비중을 늘렸지만 이 역시 된서리를 맞게 된 상황. 이 회사 대표는 “신한울 3·4호기 납품에 대비해 최근까지 400억여 원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애써 쌓은 100% ‘국산화’, 탈원전에 물거품
원전 부품 품질 인증 관련 라이선스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원전 부품은 전력산업기술기준(KEPIC)을 통과해야만 발전소 납품이 가능하기 때문에 해외 인정 품질체계를 갖추려면 더 많은 비용이 투입된다. 생산하는 물품의 종류와 가짓수에 따라 비용이 다 다른데, 규모가 작은 회사의 경우에는 이미 해당 라이선스를 포기한 곳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원전 부품 시장이 붕괴되면 20여 년에 걸쳐 구축한 ‘원전 부품 국산화’도 무너진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완성해놓은 원전 부품 기술력을 하루아침에 쓰레기통에 처박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국내 원전 건설 초기에는 원자로 등 주요 설비를 미국, 캐나다 등에서 들여오면서 부품도 같이 받았는데, 부품은 소모품이라 수시로 바꿔줘야 하지만 따로 사려면 가격이 너무 높아 부담이었다. 이러한 독점적 구조를 깨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정부 차원에서 국내 원전 부품 개발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런데 부품 업체가 도산해버리면 예전처럼 부품 조달을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부품 가격이 올라가 원전 유지비용 자체가 높아진다. 이는 곧 원전 안전에도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원전 부품 개발자들의 이탈도 심각한 수준이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가 진행됐을 때부터 유능한 엔지니어들이 업계를 떠나고 있고 그 수가 꽤 많다고 알려져 있다. 경북 울진에서 원전 부품 등 제조업을 하고 있는 한 업체 임원은 “30명이 넘던 원전 관련 인력이 지금은 8명밖에 안 남았다. 원자력 분야는 진입 장벽이 매우 높기 때문에 엔지니어들의 기술력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 이런 베테랑 기술자들이 원전을 포기하고 자동차, 반도체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으니, 미래가 심히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원자로를 생산하는 두산중공업 역시 소속 엔지니어들의 이직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또한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33.8%, 매출은 7% 감소했다. 지난해 말 한국신용평가와 NICE신용평가가 두산중공업의 신용등급을 A-에서 BBB+로 하향 조정하면서 급기야 두산중공업 매각설이 돌기도 했다.
해외도 우리나라 원전 수출 정책 의심
우리나라 원전 수출 1호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1·2·3·4호기 모습. [뉴시스]
원전 업계 한 관계자는 “두산중공업은 2008년 신한울 원전 1·2호기 건설 당시 원자로냉각펌프(RCP)와 원전제어계측시스템(MMIS) 100%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듬해 우리나라가 수주한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프로젝트에서도 약 40억 달러 규모의 주기기설비 공급 계약을 함으로써 원전사업 진출 30여 년 만에 최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앞으로 탈원전이 본격화하면 이러한 기술력을 과연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학계 내 원자력 기술 인력도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에는 2학기 원자력 분야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다. 서울대도 지난해 후기 박사과정 모집에서 5명 정원에 1명이 지원했다. 다른 대학에서도 원자력 전공자 이탈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심지어 국내 유일 원자력 고등학교인 한국원자력마이스터고는 전공 과목 이름에서 ‘원자력’이라는 단어를 빼버렸다. 지난 5월 ‘원전산업기계과’ ‘원전전기제어과’ 등 2개 전공명을 각각 ‘기계과’ ‘전기제어과’로 바꿨다.
경북 울진에 있는 이 학교는 원자력 등 에너지 산업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2014년 공고에서 원전 마이스터고로 전환했고, 매년 80명의 원전 현장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한수원·한전 등 에너지 공기업에 다수의 졸업생이 취업하면서 경북뿐 아니라 서울·수도권 등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몰렸다. 하지만 지난해 탈원전 정책 기조 발표 후 경쟁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 1.04대 1을 기록했다. 정부 정책에 따라 학교가 존폐 위기에 처한 셈이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정부가 원전산업 생태계 보존을 운운하고 있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학계가 무너지면 뒤늦게 산업을 재건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원전 건설 분야 기술도 대번에 무너져 내릴 게 뻔하다”고 말했다.
원전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미 해외에서도 우리나라 탈원전 정책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학노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은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원자력전시회(WINE2018) 등 국제 행사에서 우리 정부의 원전 수출에 대해 많은 우려가 제기됐다. 원전은 한번 지으면 60~80년 동안 사후관리를 해줘야 하는데 ‘탈원전’을 선언한 국가에 누가 원전을 맡기겠나. 신규 원전에 부품 등을 제때 공급해주지 못하면 한국 원전의 신뢰도는 금세 추락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인력 공급이 더 큰 문제다. 우수한 인재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다른 분야로 진로를 바꿔버리면 해외 원전 운전을 맡아서 할 사람이 없게 된다”고 말했다.
원전 제어시스템을 개발 중인 한 업체 대표는 “우리나라 엔지니어들은 납기를 잘 맞추고 밤을 새워서라도 끈질기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1970~80년대 활약한 원자력 선구자들은 ‘산업의 쌀’인 제철·자동차·화학 분야에 전기를 싸고 안전하게 공급함으로써 국가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는 자부심이 크다. 이들의 노고가 대통령 말 한마디에 이렇게 무너져 내린다는 게 서글프다”고 말했다.
文 정부의 모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소재 신고리 5·6호기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앞서 한국전력공사(한전)는 기업에 저렴하게 제공하던 심야 경부하 요금 할인 폭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전기요금 인상에 나섰다. 원전 가동률이 낮아짐에 따라 값싼 원전 발전량이 크게 줄면서 한전의 영업이익이 2분기 연속 적자(지난해 4분기 1조4632억 적자)를 냈기 때문이다. 원전에서 사들일 수 있는 전력량이 줄어들면서 값비싼 액화천연가스(LNG) 발전 등을 늘려 전력구매비가 증가했다. 한전이 전기 1kWh를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은 원자력 66원, 석탄 90원, LNG 125원이다.
궁여지책으로 한전이 산업용 전기료를 올리는 방안을 택하긴 했지만 국가 기간산업인 반도체, 철강, 디스플레이, 화학 등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기업들의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부담을 느낀 정부가 산업통상자원부와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원전 가동률을 높이라는 지시를 했을 거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한전의 적자가 누적되면 가정용 전기요금도 오를 게 뻔한데, 이 경우 민심이 악화될 것이란 생각에 탈원전 정책에 잠깐 브레이크를 거는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탈원전으로 원전 시장이 붕괴하면 최소 4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이는 정부의 ‘청년일자리 창출’에도 반하는 행위다.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에 한숨만 나온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업계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범진 교수는 “중소업체들은 어떻게든 살려면 정부 보조금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 대기업은 더더욱 몸을 사린다. 원전산업이 다 붕괴하기 전에 정부는 빨리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