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호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 송상현 회고록

리비아 억류 4人 구출해 헤이그로!

  • | 송상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장·제2대 국제형사재판소장

    입력2018-08-1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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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턱수염을 기른 이가 집총을 하면서 “송상현 소장 외엔 아무도 이 지점을 넘어 따라올 수 없다”고 매서운 음성으로 소리친다. 모두 움찔했다. 나 역시 구금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비서실장 린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내 팔을 잡으면서 혼자 못 가게 했다. 나는 뿌리쳤다. 살 만큼 살았으니 무슨 위해가 닥쳐도 감당할 각오와 준비가 돼 있었다.
    [동아DB]

    [동아DB]

    2012년 1월 1일 차례를 올리고 곽윤직 교수께 세배를 다녀왔다. 나도 만 70세가 넘은 터라 올해부터 세배를 중단할까 생각도 했는데 잠깐 들러 인사드렸더니 그해 미수(米壽·88세)가 되셨다고 한다. 곽 교수님은 2018년 2월 22일 별세하셨는데 한국 민법학 거목으로 불리신 학자다. 곽 교수님 댁을 찾은 사이 내 집을 다녀간 세배객도 꽤 있다. 성낙인 교수를 비롯해 많은 분이 오셨다. 내게 배운 후 교수 또는 법조인으로 일하는 분이 주로 방문한다. 해가 가도 잊지 않고 와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1월 16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출근해 재판관 및 직원들과 새해 인사를 나눴다. 소장직 재선 불출마 쪽으로 마음을 굳혔는데 이런저런 재판관들이 저마다 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여러 동료가 ICC를 위해 내가 출마해야 한다고 강권한다. 그들의 압력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안사람은 내 건강을 이유로 반대한다. 어쩔 수 없이 출마해야 하는 운명인가.

    ICC 소장에 다시 선출되다

    안사람 걱정 때문인지 건강을 자주 생각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가디언’에 기고한 글을 우연히 읽었다. “인생은 선택. 그리고 이 인생은 당신의 것. 의식적이고 현명하며 솔직하게 당신의 인생을 선택하십시오. 행복을 선택하십시오(Life is a choice. It is YOUR life. Choose consciously, choose wisely, Choose honestly. Choose happiness)”라고 썼다. 참으로 공감했다. 필자가 전한 말기 환자들이 후회하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내 뜻대로 한 번 살아봤다면… △일 좀 적당히 하면서 살 것을… △내 기분에 좀 솔직하게 살았다면, 화내고 싶을 땐 화도 내고… △오래된 친구들과 좀 더 가깝게 지낼걸… △좀 더 내 행복을 위해, 도전해볼걸…. 

    헤이그에서 일한 지 9년째인데 이번 겨울 같은 강추위는 처음 경험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운하가 조금이라도 얼면 스케이트 타기 열풍이 분다. 전국의 운하가 얼어붙으면 프리즐랜드에 수천 명이 모여 11개 도시를 경유하는 200㎞ 스케이트 대회가 열린다. 지구온난화 탓인지 1997년 마지막으로 개최된 후 열리지 못했다. 올해는 충분히 추워 다시 대회가 열릴 수 있다며 온 나라가 난리다.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선거에 5명이 출마했다.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난립이다. 표를 거의 얻지 못할 것 같은 재판관들이 더욱 큰 목소리를 내며 공약을 적은 문서를 돌린다. 지금까지는 어느 재판관이 소장을 하겠다고 설쳐대거나 심지어 공약 문서를 돌리는 일은 없었다. 외부에서 ICC를 두고 ‘판사의 집단인가, 정치인의 집단인가’라며 조롱하는 말도 들려온다. 



    2월 말까지 나는 소장으로서 남은 일정을 분주하게 소화하면서 평상심을 유지하며 조용하게 지냈다. 일부 재판관은 내가 출마하는 게 아닌지 주목하면서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안사람이 출마에 반대하는 데다 나도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출마자 면면을 보니 행정 감각이나 관리 능력이 전연 없는 동시에 인간관계에서도 문제가 많고 동료들의 지지가 거의 없는 분들이 나섰다. 재선 출마를 끝까지 망설이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결심했다.

    3월 11일 열린 소장 선거 두 번째 라운드에서 17명 중 12표를 받아 압승했다. 보츠와나 출신 산지 모나헹, 이탈리아 출신 쿠노 타르푸세르가 부소장으로 당선돼 나와 함께 소장단을 구성했다. 국제형사재판소 재판부는 세계 각국 유능한 법조인 가운데서 선발되는 임기 9년의 재판관 18명으로 구성된다. 재판관은 3년마다 6명씩 교체되며 새로운 재판부가 구성되면 재판관 전체회의에서 소장단 선거를 실시한다.

    리비아, ICC 직원 구금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 청사.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 청사. [위키피디아]

    변호인 접견권을 통해 리비아의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를 면회하라고 국제형사재판소가 선임한 변호인 등 ICC가 파견한 직원 4명이 리비아 당국에 6월 8일 구금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체포 영장을 발부했으나 리비아 혁명정부는 사이프 알 이슬람의 신병을 넘겨주기를 거부한 바 있다. 3월 2일 국제형사재판소 팀이 리비아를 방문해 카다피를 접견하고 왔는데 그때는 아무 문제가 없더니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인가. 

    사이프 알 이슬람은 카다피 집권 시절 반대자를 대량 학살한 혐의 등으로 2011년 ‘아랍의 봄’ 때 체포·기소돼 리비아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6년간 복역하다 2017년 6월 9일 풀려났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카다피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한 사이프 알 이슬람에 대해 전쟁범죄 등의 혐의를 적용해 기소하면서 그의 신병을 ICC에 인도할 것을 명령했으나 리비아 측은 신병을 넘겨주지 않았다. 

    나는 구금 소식을 들은 즉시 리비아 혁명정부 수반 무스타파 압둘 잘릴과 통화하려고 했으나 놀랍게도 국제형사재판소 내 누구도 리비아 정부 관계자 전화번호를 몰랐다. 아랍어를 하는 비서가 이리저리 수소문해 잘릴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잘릴 수반이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음으로 순차 통역을 끼고 1시간 45분간 통화했다. 잘릴은 “ICC 직원들이 신문을 마치고 트리폴리로 이동했다가 72시간 내로 석방될 것”이라고 했다. 잘릴은 또 “여권만을 압수했을 뿐 행동의 자유가 있고 호텔에 투숙하고 있으며 문제가 된 사람은 호주 여성 변호사 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실비아 페르난데스 재판관이 억류된 이들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내용을 보고했다. 페르난데스 재판관에 따르면 호주 여성 1인을 특정해 간첩죄 적용을 운운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훗날 내 후임 소장으로 선출된 페르난데스 재판관은 이 사건을 맡은 예심부 재판장으로서 법원 선임 변호인 임명과 피고인 접견 등 국제형사재판소 변호인 팀이 리비아를 방문하도록 허가한 분이었다. 

    리비아 측은 언론 플레이를 시작했다. 호주 출신 메린다 테일러 변호사를 특정해 그녀가 도피 중인 카다피의 오른팔인 이스마일로부터 받은 기밀문서를 속옷 속에 감추었다가 사이프 알 이슬람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각됐다는 둥, 사이프 알 이슬람에게 서명하라고 건넨 펜에 카메라 및 녹음 기능이 있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다. 리비아의 언론 플레이에 일방적으로 당하면서도 나는 보도자료를 일부러 온건하게 작성해 발표하도록 했다. 리비아가 체면 손상 없이 물러서도록 배려한 것이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네덜란드 미국 등 관계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구금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국제형사재판소 내부에서 구성한 위기대책위원회의 거의 모든 멤버가 강경하게 대응하라고 주문했다. 나더러 당장 리비아로 날아가 담판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협상에서 리비아의 양보를 받아내려면 온건하게 대응하는 게 낫다고 봤다. 또한 리비아 측에 안면이 많은 직원을 파견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선주민 출신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2012년 6월 12일 에보 모랄레스(왼쪽에서 세 번째) 볼리비아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를 방문했다.

    2012년 6월 12일 에보 모랄레스(왼쪽에서 세 번째) 볼리비아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를 방문했다.

    어려운 국제협상 국면에서는 조금 참고 감정을 억제하면서 끈기 있게 달라붙는 태도와 경험이 필요한데 아직 그런 것이 전연 구비되지 못한 우리 젊은 직원들의 태도와 중간 보스들의 감정적 강경론이 우려됐다. 그들의 열정은 높이 사고 싶으나 평소에 그들은 국제기구의 직원으로서 대접받고 우쭐했을 뿐 궂은일을 해결하는 경험을 해본 일이 없었다. 내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중심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아주 힘든 궁지로 몰릴 뻔했다. 

    하필이면 이날 저녁 약속이 두 건이나 있었다. 저녁 식사 장소에 도착했다. 네덜란드와 덴마크 축구 경기가 있어 온 시가지가 조용했다. 밥을 먹으면서 네덜란드가 덴마크에 1대 0으로 지는 모습을 봤다. 초대된 만찬을 급히 마치고 평소에 나를 따르고 잘 협조하는 영국대사관 법률 자문관인 호세인 캔바가 생일이라고 파티에 초대했기에 오후 9시경 꽃다발을 들고 그의 집을 방문해 문전에서 축하 인사를 하고는 리비아에서 발생한 사태를 설명한 후 곧바로 사무실로 귀임했다. 우리 직원의 구금 사실이 새어 나갔는지 BBC를 비롯한 언론이 본격적으로 보도를 시작했다. 

    6월 10일은 일요일이었다. 모처럼 화창하게 해가 비친다. 무슨 소용이랴. 아침에 잠깐 쉰 후 사무실에 출근했다. 목요일 저녁 사태가 터진 것을 안 후 해결에 집중하고 있다. 위기대책위원회의 토론 결과와 정보 보고를 받아보니 변호인 팀을 아무런 준비 없이 파견했음이 드러났고 대책위원들이 아무런 준비나 경험이 없고 무슨 일을 어떤 순서로 처리해야 할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느낌이 완연했다. 정확한 사실 정보가 있어야 이를 토대로 대책을 세울 텐데 입수하는 정보는 상충되거나 언론의 추측 보도에 기댄 것이었다. 트리폴리의 혁명정부와 진탄에 할거한 민병대 간 서로 통신과 통제가 안 되고 알력이 심해 누구를 상대로 협상해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첫날 내가 통화한 대통령도 아무런 실권이 없어서 우리 변호인 팀을 구속한 진탄 지역의 민병대에게 중앙정부 대통령인 그의 지시가 먹혀들지 않을 뿐 아니라 내게 전화를 거는 리비아 정부 인사마다 자기가 실권자니 오직 자기와만 통화하고 다른 사람과는 연락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월요일 아침 자국민이 구속된 4개국(러시아, 호주, 스페인, 레바논) 대사가 찾아와 장시간 대화하며 정보와 의견을 나눴다. 위기대책위원회는 전날 리비아로 파견한 재판소 고위직인 마크 뒤비송 팀에 큰 기대를 걸면서 그 팀의 현지 보고를 듣고 대책을 숙의하기로 했다. 뒤비송은 벨기에 출신으로 합리적이고 유능하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나는 구속자 4인의 가족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달했다. 

    6월 12일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과 그 나라 외무장관 및 네덜란드 주재 대사가 예방해 이들을 접견했다. 국가원수인데도 단출한 규모의 수행원을 이끌고 왔다. 선주민 출신으로서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코코넛 농장의 일꾼으로 노조를 조직해 정치에 투신했다. 2006년 1월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그해 11월 국제형사재판소를 찾은 이후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일전에 찾아왔을 때는 토지개혁에 관한 일장 연설을 했다더니 이번에는 국유화를 통한 경제 발전을 강조했다. 말미에 가서야 사법 개혁을 언급하면서 ICC의 경험과 지식을 전수해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스페인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대통령의 언변이 좋은 것 같았다. 리비아에서는 일주일째 희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다각도의 국제 협력을 얻어내는 차원에서 국제형사재판소 회원국도 아닌 리비아 사태를 ICC에 회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접촉해 도움을 얻고자 했다. 또한 구속된 이들이 국제법상 면책과 특권을 누리는 신분이므로 즉각 석방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공식 서한을 만들어 유엔 법률국에 보냈다. 유엔 측 법률책임자 패트리샤 오브라이언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면책특권이 적용되기가 법률적으로 어려우므로 안보리가 리비아를 ICC에 회부하면서 채택한 결의문 1970호를 근거로 해 리비아는 ICC에 협력할 의무가 있으니 즉각 석방을 요구한다고 쓰라고 권고했다. ICC 재판연구관에게 스터디를 시켜보아도 유엔 법률책임자의 견해가 대체로 옳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ICC 직원들이 특권과 면책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면 사기가 저하될 수 있었다. 결국 유엔 법률책임자와 협의를 거쳐 그의 권고에 입각한 서한을 안보리에 송부했다.

    천신만고 끝에 구금자와 접견

    리비아 현지의 뒤비송 팀은 관계국 대사 4인과 함께 국제조약에서 인정하는 영사 접견(consular visit)을 위해 트리폴리에서 진탄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들은 진탄을 15㎞ 앞두고 그 지역 민병대가 더는 갈 수 없다고 통보하면서 정지시키는 통에 발이 묶였다. 진탄 지역 민병대는 자기네 지역 청년 300여 명의 희생으로 리비아 혁명이 성공한 것이니 방문하는 대사들을 인질로 잡고라도 중앙정부로부터 수억 달러의 자금을 챙겨야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뒤비송 팀은 3시간 남짓한 논란 끝에 결국 진탄에 진입해 민병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4인의 구속자를 10여 분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구속자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는 양호한 상태에 있는 듯했고, 가져간 약은 잘 전달됐으며 처우는 나쁘지 않은 듯 보였다고 한다. 피의자와 변호인 간 비밀보장이 되는 접견권(privileged visit)은 전연 인정되지 않았으며 이를 항의하니 이번 방문은 정식의 영사 접견이 아니라고 둘러대더란다. 

    민병대는 국제형사재판소 직원을 구금한 곳은 교도소가 아니라 게스트하우스라고 주장하면서 내부를 보여줬다고 한다. 중앙에 복도가 있는 구조의 건물 한 편에 두 여성의 침대가 놓인 방이 있고 다른 편에 두 남성의 침대가 놓인 방이 있었으며 중무장한 군인이 중간의 복도를 오가면서 동초 역할을 하더란다. 이 같은 보고를 토대로 우리는 구속자 가족들에게 구금된 4인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전할 수 있었다. 뒤비송 팀이 트리폴리로 귀환하는 날짜에 맞춰 경호팀을 리비아로 증파했다. 

    리비아 측이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지목한 메린다 테일러가 요청한 변호인인 국제형사재판소의 안드레아 오셔를 리비아로 보냈다. 오셔는 6월 16일 천신만고 끝에 메린다를 접견했다. 원래는 접견 후 트리폴리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일정을 바꿔 진탄에서 유숙하면서 메린다를 계속 만나겠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 소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좋은 징조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강경론 vs 온건론

    6월 18일 새로운 1주일이 시작됐다. 4인이 구금된 지 열흘이 넘어간다. 호주 신임 외무장관으로 지명된 봅 카 상원의원이 나와 통화하자고 한다. 호세 마누엘 가르시아 마르가요 스페인 외무장관과 레바논 외무장관은 자국민이 구금됐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국민이 구금된 4개 나라 대사와 외무장관의 태도가 제각각이다. 러시아 외교부 차관은 마침 프랑스 대사관저에서 공식 만찬을 하는 도중에 내게 전화를 걸어 길게 통화함으로써 만찬의 분위기를 깼다. 

    호주의 봅 카 장관은 만사를 제치고 트리폴리로 날아가 리비아 혁명정부 요인을 만나고는 기자회견을 열어 온갖 세부 교섭 사항을 공개했다. 국내 정치용이었다. 그러곤 나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소장이 사과문만 발표하면 구금자를 석방한다는 게 리비아 정부의 태도라고 주장하면서 ICC가 사과할 것을 요청한다. 그의 이 같은 비(非)외교적 행태가 석방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협상에서 사용할 카드를 다 공개해 우리를 곤경에 몰아넣은 정치 쇼의 장본인이다. 호주 대사는 우리의 노력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자기네 장관의 지나친 쇼에 입을 다물고 있다. 내 오랜 친구의 아들인 러시아 대사 코로드킨은 국제형사재판소가 좀 더 강경한 태도를 표명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 스페인 대사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했으나 국제형사재판소 대변인실의 스페인 여성과 친해 자세한 속사정을 듣고 있기에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 부임한 레바논 대사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말만 하더니 난데없이 한 나라의 대사를 ICC 건물 입구에서 보안검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현안과 관계없는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닌가! 소장인 나를 포함한 재판관, 검사 모두가 검색 장치를 통과한다고 응수하고 헤어졌다. 

    오후 9시가 넘은 시각 비서실장 린 파커와 마티아스 대외담당관이 찾아와 리비아가 내놓은 새로운 제안을 전했다. 우리가 이 제안에 동의하면 리비아 검찰총장이 수사 결과 보고서와 협상 지침을 갖고 목요일 헤이그로 오겠다는 것이다. 리비아는 우리 측의 사과와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직원을 국제형사재판소 내부적으로 처벌할 것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위기대책위원회에서 질베르 비티와 사비에르 케이타가 리비아 측의 요구를 들어줘선 안 된다고 강경하게 주장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장인 내가 결단할 시점에 이른 것 같았다. 

    딜레마는 두 가지다. 구금된 이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을 인정하는 듯한 말을 내가 하면 그들이 권리로서 가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침해되는 데다 후일 이들이 재판소나 나를 고소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확실한 잘못이 있으면 백번이라도 사과하겠으나 도대체 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리비아의 일방적 발표밖에 없는데 이를 근거로 사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국제형사재판소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문제이므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나는 고민 끝에 강경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더라도 온건론을 고수하라고 비서진에게 지시했다. 우리에게 협상의 지렛대가 없으며 거절했을 때의 결과를 생각해보면 리비아가 적진 격인 헤이그의 우리 사무실에까지 찾아와 협상하겠다는 의사를 표할 때 이를 받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체면을 위해 호주 여성 변호사에게 갓난아기를 떼어놓고 장기간의 구금을 견디라는 것은 인도적으로도 무리였다. 리비아의 협상 제의가 과연 정부의 결정인지 어느 한 정파나 세력의 무책임한 제스처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참으로 힘든 결정이었다.

    apologies와 regret

    그간 리비아 당국과 접촉한 경험에 따르면 잘릴 혁명정부 수반이 내게 약속한 것도 진탄의 다른 민병대가 부인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나와 협상하기 위해 찾아온다는 검찰총장 일행이 과연 권한을 위임받은 후 오는지 확인할 수 없으며 설사 협상이 성공하더라도 합의 사항이 제대로 지켜질지 장담할 수는 없다. 그동안 협상해본 결과 그들에 대한 나의 인식은 신뢰성 제로였다. 

    리비아 측 협상 대표단 명단이 통보됐으나 그들의 배경을 알아낼 방법이 없다. 협상 대표인 압델아지즈 알 하사디는 원래 판사였는데 검찰총장에 임명됐다고 한다. 협상의 키를 쥔 것은 그들인데도 헤이그로 오겠다고 한 것이 나쁜 조짐은 아니었다. 

    나는 의전 책임자에게 공항 영접을 극진히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네덜란드 정부도 우리와 보조를 맞춰 공항 의전에 신경 쓰겠다고 한다. 린과 마티아스는 협상 대표인 나에게 말씀 자료(speaking note)를 만들어줬다. 

    6월 22일 드디어 협상의 날이 밝았다. 리비아 대표단은 오전 10시 국제형사재판소에 도착했다. 수석대표인 알 하사디 검찰총장은 50대 중반의 나이였다. 30년간 판사로 일했다고 한다. 한국에 7년간 대사로 근무했다는 헤이그 주재 리비아 대사가 이들을 수행했는데 한국말을 몇 마디 하는 바람에 긴장 속에서도 반가웠다.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시계를 찼고, 김우중 회장을 좋게 기억했다. 

    리비아 측은 조사 결과를 설명하면서 사과와 처벌을 요구했다. ICC 직원들이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의 변호사라는 핑계로 기밀문서를 전달해 그의 권토중래를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아주 강하게 갖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체포하고자 지명수배한 이들을 ICC가 증인으로 채택한 후 증인보호조치를 내리면 이들이 국제법상 면책특권을 갖는 것으로 오해했다. 

    설왕설래 끝에 나는 잘못한 일이 있으면 당장 사과하겠으나 당신네의 조사결과 외에 우리도 조사해봐야 하는데 수사 결과 보고서도 안 가지고 왔으니 우선 조서를 모두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우리가 조사해보고 잘못이 발견되면 응분의 처벌을 하겠다고 했다.

    폭풍 전야의 정적

    2012년 7월 2일 리비아 트리폴리 남서쪽에 있는 도시 진탄에서 내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리비아에 억류된 ICC 직원 4명이 풀려났다. [신화=뉴시스]

    2012년 7월 2일 리비아 트리폴리 남서쪽에 있는 도시 진탄에서 내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리비아에 억류된 ICC 직원 4명이 풀려났다. [신화=뉴시스]

    오전 협상을 마친 후 보좌진과 사과의 수준을 두고 숙의를 거듭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간단하게 사과할 방법이 없을까? 우리는 영국인 비서실장인 린을 중심으로 사과 표현의 정도가 다른 세 가지 문안을 작성했다. 

    리비아 측 인사들이 기도 행사를 열면서 3시간을 소비한 후 오후 회의에서 우리가 작성한 문안 중 사과의 수위가 가장 낮은 것을 그들에게 던졌다. 한참을 훑어보더니 지엽적 문구 몇 대목에 집착하면서 사과의 수위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았다. 사과(apologies)라는 표현을 전연 쓰지 않고 유감(regret) 운운하는 것으로 통과되는 분위기여서 속으로 안심했다. 몇 가지 기술적 표현을 두고 논란을 벌인 후 타결 직전에 이르렀다. 

    막판에 즉각적 석방을 요구하는 대목과 관련해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즉각적(immediate)이라는 표현을 삭제하자고 요구했으나 나는 못 한다고 버텼다. 그들의 논리는 4인의 구금자가 반역 행위를 했다고 리비아 언론이 2주일 넘게 보도했는데 국제형사재판소의 압력에 굴복해 즉각 석방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언성을 높이면서 아랍어로 한참을 떠들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다고 했다. 문구가 어떻든 자기들이 노력해 금방 석방할 것인데 못 믿는다고 화를 불같이 낸다. 나는 그들이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구금된 4인이 가족과 통화하게 해주면 그들의 제안대로 문구에 합의하겠다고 대안을 냈다. 그들은 이 같은 내 제안을 수락했다. 

    6월 23, 24일은 주말이었다. 리비아 측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고 가족과 통화하게 해준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가족들은 아주 실망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화요일이 됐는데도 리비아 사태는 안개 속이다. 금요일 우리와의 합의문을 가지고 돌아갔으니 이를 자기네 국무회의에 상정해 결론을 내든지 무슨 통보가 있어야 하는데 트리폴리 정부와는 일체 연락이 안 되고 우리가 신청한 비자 발급까지 중지한 채 대꾸가 없다. 참 답답하고도 믿기 어려운 이들이다. 협상 때 살펴본 그들의 태도를 보면 우리에게서 별로 얻을 것이 없으므로 4인을 무한정 잡아놓기보다는 석방해 사태를 마무리하려 한다는 느낌이었다. 나만의 착각일까. 다만 그들의 행동이나 의사 결정이 항상 느리고 예측 불가능해 참고 기다려야만 한다. 

    달이 바뀌어 7월이 됐다. 폭풍 전야의 정적 같다고나 할까. 리비아 측이 직원들을 풀어줄지 모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모두들 흥분해 미리 김칫국을 마시는 형국인데 나와 비서실장만은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리비아 측과 협상하거나 접촉하면서 한두 번 속은 게 아니어서 이런 정보가 거짓이거나 금방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소장이 직접 리비아로 오라”

    리비아 측이 나를 초청했다. 이 비상사태 속에서도 한 달간 휴가를 다녀온 이탈리아 여성인 행정처장이 자기가 대신 가겠다고 나섰으나 리비아는 여성은 안 된다고 보기 좋게 한 방 먹였다. 소장의 방문이 석방의 조건은 아니지만 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다소 협박성의 의사 전달처럼 들렸다. 나는 다음 날 곧바로 리비아로 들어갈 예정으로 그날 밤 각종 준비를 진행했다. 

    7월 2일 오전 3시 비서실장 린과 함께 로마를 거쳐 리비아로 들어갔다. 평소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정부가 외교부 고위관리를 보내 공항에서 나를 영접하면서 자기네 공군기를 제공한다고 해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로마의 군용공항으로 이동하니 중형의 제트 항공기가 대기하고 있지 아니한가! 대통령이 타는 전용 비행기라고 한다. 비행기에 올라 더욱 놀란 것은 내부가 호화롭게 치장돼 있고 객실 디자인이 몹시 예술적인 데다가 장식 자재가 아주 비싼 고급 물품이었다. 

    2시간가량 비행해 트리폴리 군용공항에 도착했다. 리비아 외무차관 압둘 아지즈가 영접을 나왔다. 나는 선두에서 경호를 받으면서 그들이 제공한 벤츠 600에 외무차관과 함께 탑승했다. 비서실장과 다른 인원은 여러 대의 벤츠 차량에 나눠 타고 함께 진탄으로 출발했는데 2시간 반이 걸린다고 한다. 

    연도에서 바다가 보이고 시내는 각종 푸른 나무가 심어져 그런대로 보기 좋으나 교통질서가 엉망이어서 경호가 없이는 헤쳐나가기 어려웠다. 누런색의 척박하고 메마른 토양은 정리가 안 돼 있고 군데군데 불탄 탱크나 파괴된 미사일 발사대가 널려 있다. 

    2시간 남짓 동승하는 동안 외무차관과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인간의 정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재주껏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속내를 파악하고자 힘썼다. 

    진탄 시내 깨끗하고 넓은 부지의 군부대 건물에 도착하니 그 지역 유지와 민병대 수뇌부가 길게 도열해 있다. 리비아 전통 복장을 한 사람, 군복을 입고 턱수염을 길게 기른 사람, 총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 등 20여 명이 모두 무장한 채 도열해 나를 맞는다. 나는 기계적으로 악수하고 넘어가지 않고 그들의 독특한 체취에도 불구하고 한 명씩 껴안기도 하고 특별한 칭찬의 말을 한 마디씩 각각 던지면서 개별적으로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국제형사재판소가 카다피의 잔당들과 내통해 혁명정부를 전복시키고자 획책한다는 의심을 강하게 표현했기에 그렇지 않다는 의사표시로 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나의 주안점이었다.

    주마등처럼 스친 4·19학생의거

    리비아에 억류된 4인을 구출한 일은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뉴시스]

    리비아에 억류된 4인을 구출한 일은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뉴시스]

    헤이그에 온 리비아 중앙정부의 검찰총장과 협상을 완전하게 타결한 줄 알았는데 우리 직원을 구금한 진탄 민병대 측이 협상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다시 확인해야 한단다. 군부대 내의 넓은 회관의 무대에서 각국 대사들, 전 세계 미디어, 국제형사재판소 직원들, 민병대 무장군인 200여 명이 보는 앞에서 민병대장과 내가 마주 앉았다. 

    군복을 입고 턱수염을 기른 작은 체구의 민병대 사령관이 뭐라 길게 말을 한다. 리비아 측 사람이 통역을 하지만 이 말이 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나의 발언 차례가 왔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비서실장 린과 함께 사과 문안에 관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모른다. 나는 준비된 문안과 별도로 즉흥적으로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백 명 젊은이의 넋을 위로한다는 취지의 말을 그들에게 건넸다. 4·19학생의거 참가자로서 수십 년 전 그 당시의 상황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러곤 준비된 문안을 정확히 통역할 수 있게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진탄 인사들은 대체로 무표정했지만 청중 속에 앉아 있던 그 지역 출신 국방장관의 얼굴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아침부터 여러 시간 협상했지만 아직도 구금된 이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석방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아주 어려운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오후 4시가 되자 그때까지 딱딱한 말만 하던 사령관이 내게 오더니 점심을 먼저 먹고 구금자를 면회할지, 아니면 면회하고 오찬을 할지 물어왔다. 점심이 무슨 문제인가. 나는 이른 새벽에 헤이그를 떠나면서 아침을 먹은 둥 마는 둥 했을 뿐만 아니라 오후 4시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지만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당연히 구금된 직원들을 먼저 만나겠다고 했다. 직원들을 오늘 석방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적 판단이 들기 시작했다. 

    건물 내에서 미로 같은 복도를 요리조리 걸은 후 연결된 다른 빌딩의 어느 지점에 이르자 턱수염을 기른 이가 집총을 하면서 “송상현 소장 외에는 아무도 이 지점을 넘어 따라올 수 없다”고 매서운 음성으로 소리친다. 모두들 움찔했다. 나 역시 구금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린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내 팔을 잡으면서 혼자 못 가게 했다. 나는 뿌리쳤다. 살 만큼 살았으니 무슨 위해가 닥치더라도 감당할 각오와 준비가 돼 있었다. 고하 할아버지가 혹독한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각오로 늘 준비된 삶을 살지 않으셨을까. 

    내가 이끌려 간 곳은 어느 군 고위 간부의 방인지 집기가 좋고 에어컨이 시원하게 가동됐다. 우리 직원 4인은 이 큰 방의 구석에 서 있었다. 나는 심장이 뛰는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자네들이 심리적으로 기죽지 않고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보여 참 기쁘다”고 겨우 한마디 입을 떼었다. 그리고 한 명씩 껴안았다.

    직원들을 데리고 네덜란드로

    포대자루같이 생긴 흰색 내리닫이 옷을 입은 터라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스페인 직원 에스테반 피랄타에게 “너는 그리스정교나 영국성공회 주교가 되기로 결심했느냐”고 순간적으로 농을 던졌다. 그 바람에 분위기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문제의 호주 출신 메린다 테일러 변호사와 그녀의 통역인 레바논 여성은 아랍 여성처럼 검은 베일을 얼굴 전체에 뒤집어쓰고 구석에 서 있다. 나는 “너희 둘은 리비아 국적을 취득하기로 결심했느냐”고 다시 농을 던지고 안아주었다. 

    15분간 간단한 면회가 진행된 다음 군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장교가 내게 오찬장으로 이동하자고 말한다. 내가 4명의 직원을 쳐다보면서 한참이나 발걸음을 떼지 않자 이 투박한 민병대 장교는 4인도 나와 함께 오찬장에 가 함께 식사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참 고무적인 제스처인데 구금자들이 점심을 먹었다고 눈치 없이 사양하기에 내가 국제형사재판소는 일이 많아 하루에 네댓 번 밥을 먹는다고 하면서 그들을 끌고 나왔다. 문을 나서는 순간 기자들이 덤벼 아수라장이 됐는데 초점은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에게 비밀문서를 전했다고 줄곧 보도된 호주 여성 변호사에게 집중됐다. 

    식탁은 그들 기준으로는 참으로 상다리가 휘어지는 성찬이었다. 사막에서 귀하디귀한 채소를 잘게 썰어 샐러드로 내놓았고 이름 모를 생선이 숯검정이 묻은 채로 요리돼 올라왔으며 통닭 한 마리, 이름 모를 곡류 음식과 각종 빵이 올리브유와 함께 놓여 있다. 식탁을 살필 여유가 없어 음식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내가 포크를 들자 다른 사람도 먹기 시작하는데 영 입맛이 당기지 않는다. 억지로 잘 먹는 시늉을 하면서 통닭의 다리 한 개와 생선을 꽁지 쪽으로 잘라 먹었다. 이곳 출신의 국방장관이라는 자가 오찬 후 나타나 사과와 조사 약속을 받았으니 구금자들을 데리고 돌아가도 좋다고 선언한다. 나는 4인에게 각각 구금됐던 방으로 다시 가 남겨놓은 소지품, 찢은 종이쪽지, 음식 남은 것, 기타 눈곱만 한 물건이라도 철저히 점검해 깡그리 가지고 나오도록 당부했다.

    지옥에서 생환한 듯 감격스러운 순간

    [동아DB]

    [동아DB]

    오후 6시경 구금자들이 짐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내 차가 경호차와 함께 가장 앞에 섰다. 아! 드디어 직접 리비아의 진탄에까지 와서 구금된 직원들을 데리고 헤이그로 돌아가는구나.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구나. 

    진탄에서 트리폴리로 가는 귀로에 다시 외무차관과 동승했다. 그는 국제형사재판소를 존중한다면서 앞으로 같이 잘 협력하자고 한다. 귀로에 외무차관이 계속 전화를 걸고 받는데 이 나라 총리인 압두라힘 엘 케이브 등 수많은 정부 요인이 나를 꼭 만나야 한다고 우긴단다. 달리는 차내에서 타협한 결과 다른 일행은 트리폴리 군용비행장으로 직행하고 나는 다른 이들은 거절하고 오직 총리만 만나기로 합의했다. 차가 시속 200㎞로 달리는데 무섭기까지 하다. 

    오후 8시 총리 사무실에 당도하니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엘 케이브 총리가 나를 맞이한다. 15분간 형식적인 얘기만 한 후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곧바로 군용공항에 합류했다. 사진 촬영이 만나자는 의도의 전부인 것 같았다. 

    군용공항에서 리비아 주재 관계국 대사들과 작별하고 이탈리아 대통령 전용 공군기에 올랐다. 17인승인데 우리 일행 모두가 탈 수 있었다. 구금자 4인 모두 건강하고 기분이 좋아 참 다행이었다. 러시아 대사를 지낸 코다코프가 트리폴리 주재 자기네 대사로부터 몰래 선물받은 레미 마르탱 XO 한 병을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개봉했다. 기내에 어설프게 차린 뷔페 음식을 안주 삼아 우리는 코냑 한 병을 모두 비웠다. 

    두 시간 넘게 비행해 로마의 군용비행장에 내린 것은 오후 11시경이다. 로마공항에서 기다리던 언론사 카메라 앞에서 이탈리아 정부에 깊이 감사한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네덜란드를 향해 비행하는 동안 일행 각자가 상념에 잠겼다. 암스테르담 공항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기다린다는 정보가 들어와 기수를 로테르담 공항으로 돌려 착륙한 시각은 화요일 오전 1시 반이다. 우리 직원 20여 명, 의사와 심리상담사, 구금자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옥에서 생환한 듯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니겠는가. 오전 4시 집에 도착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이제 호주 변호사는 한 달간 떼어놓았던 갓난아기 아들에게 마음 놓고 젖을 먹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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