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속 재산을 둘러싼 싸움은 끝이 없다. 가까운 혈족 간에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어려웠다. 멀쩡하던 나라가 두세 동강 나기도 했고, 여러 나라가 편을 갈라 전쟁을 벌였다. 때로는 상속 다툼을 이용해 아랫사람들이 자신의 권력을 키우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기록한 문서는 차고 넘친다.
영화 ‘흥부’의 한 장면. [스포츠동아]
일찍이 맹자가 양혜왕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어찌 꼭 이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까?(何必曰利)” “그러나 어쩌겠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상정(常情)이다. 제아무리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사회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페인 왕위쟁탈전, 최후의 승자는?
스페인의 마지막 합스부르크 왕 카를로스 2세. 나중에 그의 죽음으로 인해 스페인 제국의 왕위 계승을 두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위). 프랑스의 루이 14세 [wikimedia commons]
조약에 따라 큰아들 로테르 1세는 부왕이 사용하던 황제 칭호를 계속 쓸 수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북부) 및 로렌(로트링겐) 지역을 차지했다. 둘째 루이 2세는 라인강의 동쪽, 곧 동프랑크 왕국(독일 지방)을 다스리기로 했다. 막내아들 샤를 2세는 서프랑크 왕국(Francia occidentalis)의 통치권을 인정받았다.
세 왕자의 상속 전쟁은 이후 서유럽 역사에 뚜렷한 이정표를 남겼다. 훗날 동프랑크에서 독일이, 서프랑크에서 프랑스가 일어났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 역시 프랑크 왕국의 유산이었다.
동서양의 역사에는 허다한 왕위계승 전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페인 왕위계승전은 가장 복잡다단했다. 이 전쟁은 1701년 시작돼 1714년까지 10년 넘게 지속됐다. 전쟁에 끼어든 국가도 여럿이었다. 프랑스, 스페인, 영국, 오스트리아 및 네덜란드 5개국이 뒤엉켜 혼전을 벌였다.
1700년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의 유언장에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를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돼 있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왕손이 ‘펠리페 5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스페인 왕위계승전의 발단이 된다.
당시는 해상무역의 승패가 유럽 각국의 운명을 좌우하던 시기였다. 각 나라는 저마다 신대륙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고심했다. 펠리페 5세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해상강국 스페인과 프랑스의 견고한 동맹 관계를 의미했다. 그들과 경쟁 관계에 있던 영국과 네덜란드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국제 관계를 고려한 듯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의 왕위계승권이 자국에 있다며 분쟁을 일으켰다.
사망한 카를로스 2세에게는 두 명의 공주가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혼했고, 다른 하나는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저마다 자국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스페인의 왕위가 루이 14세의 손자에게 돌아간 것을, 레오폴트 1세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왕자 카를로스 대공(大公)이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옳다고 역설했다.
따지고 보면 이미 사망한 카를로스 2세 역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외손이었다. 그의 모후 마리아나는 오스트리아의 왕녀로, 아들 카를로스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여러 해 동안 섭정했다. 아들의 사후에도 그녀의 정치적 입김은 스페인 조정에서 상당했다.
오스트리아는 영국·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나중에는 포르투갈도 이 동맹에 가담했다. 전쟁터는 유럽 대륙을 넘어 아메리카 식민지, 인도까지 확장됐다. 이 전쟁은 1713년 유트리히트 조약이 체결되며 막을 내렸다.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막대한 재정적 손해를 입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확보한 식민지를 빼앗겼다.
가장 큰 승자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아메리카에 있던 프랑스 식민지를 몽땅 차지했다. 또 스페인 식민지들과의 교역권을 보장받았다.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교역권(asientoright)을 차지해, 향후 30년간 라틴아메리카로 노예를 수출할 권리를 얻었다. 바야흐로 영국의 시대가 동터오고 있었다. 포르투갈도 상당한 전리품을 챙겼다. 브라질에 대한 식민지 지배권을 확고히 하며 국경선을 확정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얻은 것이 거의 없었다. 네덜란드는 17세기에는 유럽 최고의 해상강국이었으나,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 위상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겨우 오퍼르헬러 지방 일부를 영토로 얻는 데 그쳤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안하면 손해가 막심했다.
오스트리아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벨기에에 대한 통치권을 얻었다.
이 전쟁이 시작될 때만 해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싸움 같았다. 그런데 전쟁의 결과는 세인의 예상을 초월했다. 패권을 거머쥔 것은 엉뚱하게도 영국이었다.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가 빚더미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영국은 지구상 어디에서건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상속 분쟁을 이용하라
니가마사의 외손자이자 도쿠가와 가문의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 [wikimedia commons]
본디 스케마사는 오미 북부의 실력자인 교고쿠(京極) 가문을 섬기는 영주였다. 그런데 교고쿠 가문에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다. 1523년 교고쿠 가문의 당주(우두머리) 교고쿠 다카키요는 자신의 숙로(宿老·고관) 고사카 노부미쓰와 상의해 차남 다카요시를 후계자로 정했다.
그러나 장남 다카노부(후에 다카히로로 개명)가 승복하지 않았다. 영주 여러 명이 장남 편에 섰다. 아사미 사다노리, 아자이 스케마사, 미타무라, 이마이 등이 다카노부를 지지했다. 그들은 상속 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아사미 가문이 실권을 쥐었다.
그러자 스케마사는 방향을 선회했다. 그는 차남을 지지한 고사카 노부미쓰와 화해하고 아사미 가문을 공격했다. 1525년경 스케마사는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오다니성에 주군이었던 다카키요와 그의 장남 다카노부를 모셨다. 그들 부자는 사실상 스케마사의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1534년 스케마사는 다카키요 부자를 비롯해 오미의 여러 영주를 불러 모아 자신이 제정한 법령(知行安堵狀)을 승인하게 했다. 이어서 1538년에는 스케마사가 사실상 지배하던 오미 북부 지방에 채권 무효를 뜻하는 덕정령(德政令)을 실시했다. 그는 입으로는 교고쿠 가문을 섬겼지만, 실상은 드넓은 오미 북부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얼마 후 다카키요가 죽고 그 장남 다카노부가 가문을 계승했다. 다카노부는 스케마사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1541년). 교고쿠 가문과 혈족 관계에 있던 롯카쿠 가문이 다카노부를 도왔다. 롯카쿠 가문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스케마사를 견제해왔다.
궁지에 빠진 스케마사는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 가문에 구원을 요청했다. 아사쿠라 가문 역시 스케마사와 비슷한 처지였다. 본래는 슈고(守護·쇼군이 파견한 지방관)를 섬기는 가신이었으나, 지방관을 대신하는 실질적인 지배자로 성장한 것이었다. 아사쿠라 가문은 자신들과 사회적 지위가 동일한 스케마사를 도와줬다. 이후 스케마사의 아자이 가문은 아사쿠라 가문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이어나갔다.
스케마사는 정치적 수완이 탁월했다. 그는 새로 일어난 사원 세력, 곧 혼간지(本願寺)와도 친선을 유지했다. 1540년 아사쿠라 가문이 가가(加賀)의 혼간지와 충돌하자, 양측을 화해시키기도 했다. 아사쿠라와 롯카쿠 등 많은 영주는 사찰 세력인 혼간지와 대립했지만, 스케마사는 친화력을 발휘해 별다른 마찰 없이 세력을 키워나갔다.
스케마사의 가문은 날로 번창했다. 1567년 그의 손자 나가마사는 센고쿠 시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누이 오이치를 아내로 맞을 정도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다이묘(大名)로 성장한 셈이었다.
그러나 아자이 가문의 역사도 종지부를 찍을 날이 다가왔다. 1570년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가문을 공격하자 나가마사는 처남 노부나가에 반항했다. 3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니성으로 쳐들어가 나가마사를 베었다.
그럼에도 나가마사의 외손들은 살아남았다. 그의 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며느리가 되었다. 정확히 말해 2대 쇼군이 된 히데타다의 아내였다. 나가마사의 외손자는 도쿠가와 가문의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였다. 주군 가문의 상속 분쟁을 출세의 기회로 삼은 스케마사. 그의 핏줄은 도쿠가와 가문의 이름으로 19세기 후반까지 일본을 지배했다.
세종 때의 ‘막장 드라마’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무덤인 성릉. [출처 문화재청]
“토지와 노비를 두고 소송을 벌이는 사람들은 대개 형제이거나 삼촌·조카 사이입니다. 누가 잘못되었고 누가 옳은지를 저들 스스로도 잘 압니다. 그러나 약한 이를 업신여기며, 세력을 믿고 옳고 그름을 바꾸려고 서로 소송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골육(骨肉)을 해칩니다. 천륜을 더럽히고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재판 과정에서 이치에 어긋난 사실이 드러나고 간사한 흉계가 폭로된 사람은 온 식구를 변경으로 추방함이 옳습니다. 그러면 소송도 줄어들고 풍속도 도타워질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계책이 될 만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염두에 두옵소서.”(‘조선왕조실록’, 성종21년 1월 24일)
성종이 임중의 제안을 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실록’에 보면, 성종은 이 상소문을 병조에 내리며 실행할 만한지 검토해보라고 하였다.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가까운 친족들이 선대의 재물을 놓고 다툼을 벌이기 일쑤였다는 점이다.
태평성세(太平聖歲)로 알려진 세종 때도 대제학이란 높은 벼슬을 지낸 이행(李荇)의 아들과 손자들이 재산 싸움을 벌여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1438년(세종 20) 8~11월의 ‘실록’에는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왕명에 따라 의금부에서 수사한 사건의 개요는 대략 아래와 같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이행의 차남 이적(李迹)과 그의 큰조카 이자(李孜)가 있다. 그들이 서로 이행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인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아버지 이행과 차남 이적의 불화에 있었다.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 이적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아들도 편지로 항변했는데, 언사가 몹시 불손했다. 아버지는 화를 내며 둘째 아들의 불효를 꾸짖으며 차후 토지든 집이든 노비든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행은 이 사실을 큰손자와 서자(이몽가·李蒙哥)에게도 편지로 알렸다. 그런데 훗날 이행과 이적의 부자 관계가 다시 좋아졌다고 한다.
이행이 사망하자 큰손자 이자는 과거 조부가 써준 유서(遺書)를 근거로 노비와 전택을 몽땅 자신이 차지하려고 했다. 이에 이적이 불복했다. 이적은 생전에 부친(이행)이 친필로 써준 문서를 꺼내놓으며 큰조카(이자)를 비롯해 여러 자녀가 재산을 골고루 나눠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적의 말대로 이행의 재산은 일단 분할 상속되었다.
이자는 이를 억울하게 생각했다. 작은아버지(이적)가 제시한 문서는 조작된 것이라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사헌부에 소송을 제기한다.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글을 인용하며 작은아버지가 불효한 사실을 들춰냈다. 반면 이적은 큰조카 이자가 제사를 성실히 지내지 않은 사실과 신주를 이미 불태운 점 등을 언급하며 맞섰다.
사헌부는 친족 간에 서로 화목하지 못한 점,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세종은 의금부에 명을 내려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했다.
드디어 진상이 밝혀졌다. 차남 이적이 아버지에게 못할 말을 많이 한 것이 사실이었다. 사형 죄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였다. 게다가 그는 자손이 고루 재산을 나누라는 아버지의 유서를 조작하기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반면 큰손자 이자는 서자 이몽가와 상의해 할아버지가 준 문서의 작성 시기를 변조했다. 작은아버지가 제시한 할아버지의 유서를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죄는 태형 80대에 해당했다.
세종의 처분은 어땠을까? 왕은 그들의 죄에 대한 벌을 조금씩 감했다. 이자와 이몽가는 경미한 처벌을 받았고, 이적은 함길도 경원부로 귀양을 보냈다.
이적이 귀양길을 떠날 때 이자가 찾아가 심하게 비난했다. 그는 작은아버지를 압박하며 그의 수중에 남아 있던 약간의 재산마저 자신에게 반환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숙부의 생명을 보전한 것이 누구의 힘입니까. 어찌 나의 덕이 아니오”라며 이적을 모욕했다.
이자는 양녕대군의 사위였으니, 세종의 조카사위였다. 이들 이씨 일가는 왕실의 인척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지체 높은 이들조차 이런 판국이었다.
흥부가 한 명뿐이랴
이와 유사한 사건이 15,16세기 조선 사회에서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는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상속을 둘러싼 갈등과 분란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성리학 사회의 위선에 가려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흥부전’이 그 점을 시사한다.흥부는 욕심꾸러기 형님 놀부를 관헌에 고발하진 않는다. 그것은 흥부의 높은 도덕성이었다. 조선 후기 흥부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억울한 흥부가 결국 하늘의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리만족을 느끼며 슬픔을 달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백승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