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호

아주 사적인 타인의 리뷰

남인순 의원이 본 영화 ‘허스토리’

‘우리’가 함께 시작하는 새로운 역사

  •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8-08-01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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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가 잇따라 개봉하고 있다. ‘허스토리’는 그 연장선에 있으면서 다소 다른 영화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보는 이의 분노나 슬픔을 자극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피해자들이 그동안 만들어온 변화와 내일의 희망을 보여주는 쪽에 무게를 뒀다. 남인순 의원은 그것을 ‘허스토리’의 미덕으로 꼽았다.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굉장히 뭉클하고 좋았다. ‘이 영화를 더 많은 사람이 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다.” 

    영화 ‘허스토리’에 대한 감상을 물었을 때 남인순 의원(더불어민주당)이 한 말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지낸 남 의원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온 정치인이다. 시민운동가 시절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 진상 규명과 일본의 공식 사과 등을 요구했고,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관련 활동을 계속했다. 남 의원이 지난해 대표 발의한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등을 위한 일본군위안부 전문 연구소 설립 내용을 담고 있다. 남 의원은 “영화 ‘허스토리’를 통해 더 많은 이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좋겠다”며 “특히 우리 미래 세대, 청소년이 이 영화를 많이 보게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담담해서 더 감동적인 이야기

    이 영화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스토리 구성이 탄탄하고, 배우들 연기도 훌륭하다. 영화를 보며 여러 번 감탄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는 전에도 많았다. 우리가 직면하기 어려운 역사적 진실을 다루다 보니 관객을 감정적으로 힘들게 만드는 영화도 다소 있었다. ‘허스토리’는 그렇지 않다. 분노나 슬픔 같은 정서를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는데도 마음을 움직인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주인공 ‘배정길 할머니(김해숙 분)’가 등장하는 장면이 많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나는 건 일본군위안부 피해 신고센터를 찾아가 평생 감춰온 얘기를 털어놓으려 하던 부분이다. 어떤 극적인 장치도 없는데 김해숙 씨 연기를 통해 할머니의 상처와 갈등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동안 내가 만나온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도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영화 속 배정길 할머니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실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삶이 상당 부분 녹아 있다. 지독한 가난, 가족과의 갈등,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트라우마 등 배정길 할머니를 고통스럽게 하는 요소들이 하나둘 드러날 때마다 내가 아는 할머니들 생각이 났다. 영화를 보며 여러 번 울었다.”
     
    ‘허스토리’의 배경은 1990년대 초반, 부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0년도 더 지난 이 무렵,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일본군위안부의 실체가 우리나라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 등 학자들이 관련 자료를 발굴, 공개한 게 출발점이다. 이어 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피해자들도 하나둘 증언에 나섰다. 이들을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많은 소녀가 전장에 끌려가 성적 학대를 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일제가 소녀들을 ‘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한 사례도 확인됐다. 1992년 12월, 부산에 사는 할머니 4명은 일본 정부에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묻고 사죄와 배상을 받겠다고 나섰다. ‘일본 정부’를 피고로 한 이 재판 원고 중 2명은 일본군위안부, 2명은 근로정신대 피해자였다. 이후 일본군위안부 1명, 근로정신대 5명이 추가로 소송에 참여하면서 원고단 수는 10명으로 늘었다. 영화 ‘허스토리’는 바로 이들의 법정 싸움을 다룬다.

    영화로 되살아난 역사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관부재판’을 다룬 영화 ‘허스토리’. 정의로운 사람들의 연대가 가진 힘을 보여준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관부재판’을 다룬 영화 ‘허스토리’. 정의로운 사람들의 연대가 가진 힘을 보여준다.

    ‘부산(釜山)’에 사는 이들이 일본 ‘시모노세키(下關·하관)’ 법원에 소를 냄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은 당시 ‘관부재판(関釜裁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이 나올 때까지 10년 넘게 이어진 재판 기간에 10명의 할머니는 수시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 법정에 섰고, 때로는 호통으로, 때로는 절규로 자신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일본 법원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이 재판은 많은 이의 기억에서 잊히고 말았다. 

    영화 ‘허스토리’에서는 김해숙을 비롯해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의 배우가 바로 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되살려낸다. 이들이 각각 연기한 배정길, 박순녀, 서귀순, 이옥주는 영화적으로 각색된 인물이다. 극중 이름도 실제 원고 할머니들의 이름과 다르다. 그러나 이들의 피해 사례 상당 부분은 재판 기록에서 가져온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속 법정 장면에서 서귀순이 학교 담임교사의 말에 속아 근로정신대에 가게 된 사연이 공개된다. 이는 ‘관부재판’ 당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일본인 전직 교사가 증언대에 올라 ‘교사 시절 조선인 여학생들을 근로정신대에 보냈다’고 고백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아니지만 당시 할머니들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10년의 송사를 함께 진행한 김문숙(91) 씨는 2001년 펴낸 자전 에세이 ‘쓰러진 자의 기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일본인 전직 교사)는 눈물로 참회했다. 5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죄책감에 한국 쪽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이케다 선생의 고백은 또 한 번 우리를 일제 만행에 몸서리치게 했다. 그녀는 48년 전(1944년) 자기가 담임교사로 있던 서울의 방상초등학교에서 자신이 6학년 4반 여학생 제자 6명을 자신의 손으로 정신대로 보냈음을 밝혔다. (중략) 그들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눈물을 흘렸다.’ 

    영화 ‘허스토리’에는 이 에세이를 쓴 김문숙 씨를 모델로 한 인물도 등장한다. ‘문정숙 사장’(김희애 분)이다. 문정숙은 ‘허스토리’에서 여행사 대표이자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장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실제 김씨의 삶과 일치한다. 부산에 ‘정신대 신고 전화’를 개설하고, 피해 할머니들을 물심양면 후원해 ‘관부재판’에 참여하도록 이끈 것,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재판 당시 통역을 도맡은 것 등도 모두 ‘팩트’다.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김씨는 1990년 우연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뒤 사재를 털어 할머니들을 돕기 시작했다. 지금은 부산에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운영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의 남다른 삶은 김희애의 연기를 통해 스크린에 생생히 되살아났다. 남 의원은 “이번 영화로 김희애 씨를 다시 봤다”며 “그전에도 연기 잘하는 배우인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찬사를 보냈다. 

    김희애 씨가 ‘문 사장’ 역을 맡은 뒤 부산 사투리와 일본어를 공부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사투리와 일본어 실력도 놀랍지만 내가 더욱 감탄한 건 다른 부분이다. 이 영화에서 문 사장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아무 관계없는 삶을 살았다. TV 뉴스를 통해 관련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옆에 있는 딸한테 ‘저렇게 안 되려면 학교 열심히 다니라’고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자기 가까이에 일본군위안부 출신 할머니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후 그를 통해 이 문제의 실체를 파악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 피해 당사자가 아닌데도 세상 누구보다 열심히 싸움에 뛰어든다. ‘관부재판’이 처음 시작되고, 그 긴 시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영화 속 문 사장, 현실에서는 김문숙 씨 공이 크다. 나는 여성운동을 하며 그런 분을 참 많이 만났다. 자기 이해관계보다 역사와 정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 전형을 김희애 씨가 연기를 통해 보여준 것 같아 감동적이었다.” 

    ‘허스토리’에는 ‘문 사장’ 외에도 정의로운 조력자가 다수 등장한다. 수임료 한 푼 받지 않고 할머니들의 소송을 돕는 재일교포 ‘이상일 변호사’(김준한 분)는 ‘관부재판’ 당시 실제로 무료 변론에 나섰던 재일교포 이박성 변호사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는 이박성 변호사 외에도 10명 이상의 변호사가 일본군위안부 할머니 원고단 소송을 도왔다.

    우리 안에 있는 정의로움

    일본 내 양심적 시민들도 후원자로 나섰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모임을 꾸려 할머니들이 법원에 오갈 때 일본 우익 세력 등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경호했고, 재판을 꾸준히 참관하며 응원했다. 관부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 시모노세키법원 담당 재판부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 측 주장을 지지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을 촉구하는 일본 시민의 탄원서가 다수 접수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또한 영화 ‘허스토리’에 생생히 담겨 있다. 

    남 의원은 “이 영화는 관객의 반일감정을 부추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허스토리’에서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이 반대하는 건 전쟁과 폭력이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또한 ‘반일’보다는 ‘반전’ 메시지를 던진다. 이것은 실제로 오랫동안 이어져온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본질이다. 우리가 일본 정부에 반성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도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내용이 잘 그려져 있어 만족스러웠다”고 밝혔다. 

    영화에서 아쉬운 부분은 없나. 


    “일본 내에서 이뤄진 연대 행동이 집중 조명된 반면 국내 상황이 잘 다뤄지지 않은 듯하다. 사실 그 시절 국내 시민사회의 연대 운동도 매우 강력했다. 30여 개 여성단체가 함께 만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진행됐고, 1992년 1월 시작된 수요시위는 26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민사회가 단일 주제를 갖고 이 긴 시간 동안 운동을 이어오는 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의의가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것 같아 아쉽다. 또 영화 말미에 ‘관부재판’ 원고단 할머니가 모두 사망했다는 자막이 등장하는데, 이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 세 분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근로정신대 원고단 할머니 중에는 지금까지 법정투쟁을 벌이고 계신 분이 있다. 자료 조사에 약간 실수가 있었던 듯한데, 그 부분이 안타까웠다.”

    “할머니 예뻐요”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영화를 보면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보여주는 장면도 많이 등장한다. 한 택시 기사는 피해 사실을 증언한 할머니를 향해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비난하고, ‘정신대 신고 전화’를 받는 사무실에 돌을 던지기도 한다. 부산지역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리는 위령비 건설을 추진하자 부산시장이 면박도 준다. 

    “거의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은 당시 이런 편견을 개선해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려 애썼다. 여러 노력 덕분에 실제로 인식이 많이 개선됐다고 본다.” 

    남 의원은 이 이야기를 하며 ‘허스토리’에서 배정길 할머니가 고등학교를 찾아가는 장면을 이야기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연하려던 할머니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자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할머니 예뻐요’라고 말하며 격려하는 부분이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계속 ‘예뻐요’라는 말이 들려오자 어쩔 줄 몰라 하던 배정길 할머니는 마침내 표정을 풀고 슬쩍 미소를 짓는다. 남 의원은 “그 장면이 참 좋았다”고 했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다. ‘우리 할머니들이 저러셨겠구나. 저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위로를 받으며 당신들의 상처를 치유해가셨겠구나’ 싶었다. ‘허스토리’에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데도 마음으로 이해하게 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그런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허스토리’에서도, 그리고 실제 현실에서도 사람들의 응원과 연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할머니들은 그 과정에서 얻은 용기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은 내 잘못으로 인한 게 아니다. 전쟁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전쟁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힘없는 사람들에게 조직적으로 폭력을 저지른 일본 정부가 책임지고 사죄하라’고 주장한다. 남 의원은 이런 변화의 과정에 대해 설명하다 또 한 번 영화 속 배정길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영화에서는 재판 도중 배정길 할머니가 ‘거짓 증언’을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갈등이 불거진다. 일본 정부를 대리하는 검사는 쾌재를 부르고, 그전까지 서로 믿고 의지하던 원고 할머니들끼리는 반목한다. 그런데 다음 공판에서 배정길 할머니가 자신이 긴 세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밝히며 또 한 번 반전이 찾아오지 않나. 그때 할머니가 한 이야기가 계속 생각난다. 친구 대신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떨쳐내려 애쓰면서 이렇게 고백하는 부분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하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 노력했을 뿐이다.’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끔찍한 상황에 몰아넣는지 느끼게 하는 발언이다. 그 재판을 지켜보는 사람 모두 진짜 죄인은 배정길 할머니가 아니라 그를 그런 상황에 내몰리게 한 전쟁이라는 걸 깨닫게 만든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그들의 지지그룹은 ‘관부재판’ 내내 이 부분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주장은 일본 판사들의 양심까지 흔들었다. 1심을 담당한 시모노세키법원이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부 승소를 선고한 것이다.

    계속 이어갈 역사

    ‘관부재판’ 당시 일본인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위안부 제도는 중대한 인권침해였다. 위안부가 된 여성의 피해를 방치한 것 또한 새로운 인권침해다. 일본은 위안부 존재를 알게 된 뒤에라도 원고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입법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상 의무를 인정했다. 일본군위안부의 피해를 배상하도록 할 국내법이 없자 아예 ‘국내법을 만들지 않은 게 잘못’이라며 책임을 물은 것이다. 손해배상액이 일본군위안부 원고 1인당 30만 엔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판결 직후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 판결은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수차례 진행된 위안부 관련 판결 중 첫 승소판결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그해 5월 ‘이번 판결은 국회의원의 입법행위와 관련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가배상법상 책임을 묻지 않은 최고재판소 판례에 어긋난다’며 항소했고, 2001년 3월 29일 히로시마 고등법원, 2003년 3월 25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모두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결국 ‘관부재판’ 원고단 대부분은 당초 원했던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내용은 ‘허스토리’ 말미에 자막으로 소개된다. 

    남 의원은 “결과만 놓고 보면 관부재판은 실패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것을 패배와 좌절의 역사로 그리지 않는다. 할머니들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우리 모두가 변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한다”고 평했다. 영화에서 재판을 시작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한다’고 강조하던 문 사장도 어느 순간 ‘(이 재판을 통해)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지’라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운동을 하다 보면 다들 알게 된다. 일이 안 풀리면 기다려야 하고, 사람들 뜻이 잘 모이지 않으면 설득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도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계속 조금씩 진전해왔다. 특히 전쟁 중 발생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단죄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목소리를 만들어낸 게 큰 성과다. ‘허스토리’에서 우리가 희망을 볼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남 의원의 말이다.

    ‘부산 종군위안부·여자 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사건’(관부재판) 연표

    1991.8.14. 김학순 할머니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 최초 증언 기자회견
    1991.9.18. ‘정신대 신고 전화’(당시 명칭) 개설
    1991.10.19.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 정신대 신고 전화 개설
    *그해 10~12월 부산 전화로 8명 신고, 그중 4명이 ‘관부재판’ 참여
    1992.5.29. 일본 변호인단 한국 방문해 일본군위안부 피해 청취
    *그해 2회 더 방문해 증거 조사 
    1992.11.14. 일본 변호사에게 소송 위임장 전달
    1992.12.23. 관부재판 원고단 일본으로 출국
    1992.12.25. 일본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법원에 고소장 제출
    1993.9.6.~1997.9.29. 구두변론 진행
    1998.4.27. 1심 판결(원고단 일부 승소)
    *원고 가운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3명에 각각 30만 엔씩 모두 90만 엔 위자료 지급을 일본 정부에 명령
    *일본 정부 공식사죄 청구 요청은 부인. 근로정신대 원고인 7명의 청구는 기각
    1998.5.8. 일본 정부 항소
    2001.3.29. 히로시마 고등법원 일본위안부 원고 역전 패소
    2003.3.25. 일본 최고재판소 원고 패소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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