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호

이슈 진단

국내 최초 정당 연구소, 여의도연구원의 부침

‘보수의 두뇌’가 위기에 처한 까닭

  • |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l.net

    입력2018-07-25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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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 정부 세계화 싱크탱크로 화려한 출발

    • 1997년, 2002년 보수정당 집권 전략 수립

    • 유승민, 박세일 소장 시절 황금기

    • 집권 실패, 지방선거 패배, 지지율 하락 3중고 이겨낼까

    1995년 2월 6일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정당 연구소 ‘여의도연구소’를 개소했다. [동아일보 박문두 기자]

    1995년 2월 6일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정당 연구소 ‘여의도연구소’를 개소했다. [동아일보 박문두 기자]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라는 서양 격언이 있다. 한국 보수정당이 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6·13 지방선거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은 자유한국당 패배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두뇌’ 구실을 하는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원 문제가 지적된다.

    한국 최초의 정당 연구소

    7월 11일 김성태 자유한국당 당대표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이 여의도 자유한국당 구당사에서 현판을 떼어내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이날 영등포로 당사를 옮겼으나 여의도연구원은 구당사에 남았다. [뉴시스]

    7월 11일 김성태 자유한국당 당대표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이 여의도 자유한국당 구당사에서 현판을 떼어내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이날 영등포로 당사를 옮겼으나 여의도연구원은 구당사에 남았다. [뉴시스]

    7월 6일 자유한국당 당사가 있는 서울 여의도 한양빌딩은 이사 준비로 어수선했다. 자유한국당은 한나라당 시절이던 2007년 이 건물에 입주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 그곳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11일 영등포 우성빌딩으로 옮기며 여의도 시대를 마무리했다. 2016년 총선 패배와 정당 국고보조금 감소, 집권 실패, 지지율 하락으로 당비 납부 실적 저조 등으로 인한 재정난이 주된 이유였다. 여의도연구원은 구(舊)당사에 남게 됐다.  
     
    여의도연구원의 전신 여의도연구소는 1995년 공식 출범했다. 한국 정치사상 첫 정당 연구소였다. 당시 집권여당(민주자유당) 총재이던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정책 추진 일환으로 설립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해 2월 개소식 축사에서 “미국 공화당의 중요 정책을 개발해내는 헤리티지 재단 같은 1급 연구소가 돼달라”고 당부했다. 초대 소장은 훗날 이명박 정부 첫 고용노동부 장관이 되는 이영희 박사가 맡았다. 여의도연구소 설립의 산파 구실을 한 노승우 전 의원은 “여의도연구소는 민주자유당 전체의 자산으로 당이 존속하는 한 영속성을 지닐 것”이라고 말했다. 

    집권여당 정책연구소로 출범한 여의도연구소의 시작은 장대했다. 연구직원 20명, 행정직원을 포함하면 40명이 넘는 인력이 당시 민주자유당사 근처 동우국제빌딩 5~6층을 임차해 사용했다. 연구위원실이 지나치게 호사스럽다는 지적을 받아 다시 검소한 집기와 장식으로 교체하는 해프닝이 벌어질 정도였다. 

    연구인력 면면도 화려했다. 설립 당시 정관에 박사급 연구위원 대우를 ‘차관급’으로 명시했다. 출범 첫해 박사급 연구위원 13명을 공개 채용했는데 220여 명이 지원해 경쟁률이 16대 1에 달했다. 선발자 중에는 현직 국립대 교수, 서울 소재 주요 대학 전임강사 등이 포함됐다. 

    여의도연구소는 설립 초기부터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시 소장은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정책을 건의했다. 연구위원은 당 정책위 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은 여의도연구소가 만든 정책 자료를 정기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연구소가 요구하면 정부기관도 자료 제출을 거부할 수 없었다. 여의도연구소가 생산한 보고서, 여론조사 자료는 공신력을 인정받았다.



    만성적 재정난

    단, 운영비 면에서는 출범 초부터 난관을 겪었다. 민주자유당은 당초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서 배당될 국고보조금 중 100억 원을 출연, 재단법인 여의도연구소를 설립한 뒤 매년 국고보조금 중 일부를 추가로 투입해 기금 규모를 200억 원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관위는 “용도가 법으로 정해진 국고보조금을 별도 기관이나 법인 설립기금으로 전용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막아섰다. 이에 따라 당비와 기부금 등으로 43억 원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여의도연구소의 부침(浮沈)은 민주자유당 후신 한나라당이 1997년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본격화했다. 모당(母黨)의 재정난으로 별도 사무 공간을 포기하고 당사에 입주해야 했다. 재단기금도 대부분 차입 형태로 당에 유입됐다. 여의도연구소 운영비는 차입금 이자조로 지급된 연간 3억 원가량의 자금에서 충당했다. 인력 유출도 일어났다. 초기 13명에 달했던 박사급 연구위원이 2001년 4명으로 줄었다. 

    여의도연구소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2000~2003년 유승민 소장 재임기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을 거쳐 제5대 소장으로 발탁된 유승민 의원은 대권 후보이던 이회창 당시 총재의 각별한 신임을 바탕으로 여의도연구소의 위상을 재정립했다. 

    2004년 8월 취임한 제7대 박세일 소장도 여의도연구소의 면모를 일신했다. 그는 소장 취임 후 여의도연구소 쇄신에 몰두해 그해 10월, 정책개발·정책기획 등 2개실 산하에 정치·행정, 경제1, 경제2, 사회·문화, 통일안보, 정책기획, 정책홍보, 조사분석 등 8개팀 체제를 갖췄다. 박사학위 소지자를 대상으로 연구위원·부연구위원 7명을 신규 채용하는 등 인력도 확충했다. 

    이무렵 여의도연구소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던 재정 상황에도 다소 여유가 생겼다. 제16대 국회 후반기 정당법이 개정돼 각 정당이 의무적으로 정당 연구소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해당 연구소에는 국고보조금의 30%가 배정됐다. 당시 한나라당이 연간 114억여 원의 정당 국고보조금 중 약 38억 원을 여의도연구소에 투입하면서 운영에 숨통이 트였다. 

    2004~2018년 사이 13년 6개월 동안 여의도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한 정낙근 박사는 이 시절을 여의도연구소의 전성기로 꼽았다. 야당 연구소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연구소의 정책 개발 역량과 미래 당 비전 제시 능력이 제고됐다는 것이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박세일 소장의 유대 관계도 연구소 위상 정립에 한몫했다고 한다. 정 박사는 “당시 박세일 소장은 주 1~2회 당 대표를 독대했다. 여의도연구소가 생산한 보고서, 정책자료, 여론조사 보고서 등은 대표와 최고위원회의에 보고되고 정책으로 채택됐다. 연구자로서는 신나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정치 상황에 따른 격랑

    그러나 2005년 여의도연구소는 출범 후 최대 위기를 맞는다. 그해 1월 박세일 전 소장이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으로 옮겨가고 후임으로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출신 윤건영 당시 의원이 오면서다. 그해 4월 국회의원 재선거를 앞두고 여의도연구소는 ‘4·30 국회의원 재선거 지역별 심층 분석’ 보고서를 작성, 박근혜 당시 대표에게 제출했다. 문제는 보고서 내용이 언론 등 외부에 유출된 것이다. 이 보고서에는 한나라당 소속 후보들의 불법·탈법 의혹까지 가감 없이 적시돼 있었다. 박근혜 대표가 이에 진노하면서 여의도연구소는 조직이 축소되는 상황을 맞았고 윤건영 소장은 취임 6개월 만에 사임했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여의도연구소는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재집권 비전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집권 비전으로 ‘선진화’를, 이념으로 ‘공동체자유주의’를 제시했고 이를 당 정강정책에도 반영, 명문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7년, 2012년 대선에서 각각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이 승리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대선 이후 여의도연구소는 다시 세(勢)를 확장했다. 2013년 5월 황우여 당시 새누리당 대표 체제에서 명칭도 ‘연구원’으로 격상됐다. 2016년 기준 총 직원 78명, 연구인력 38명, 연간 예산 110억 원 규모로 외형적 성장을 이뤘다. 

    2017년 여의도연구원에 다시 위기가 왔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대선 패배 등으로 새누리당이 여당 지위를 잃으면서다. 그해 2월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꾼 모당(母黨)은 인명진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혁신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출범했다. ‘당 쇄신’을 내세운 비대위는 중앙당 조직 축소와 더불어 여의도연구원에 칼을 겨눴다. 사무 공간 축소와 인력 구조조정 등이 진행됐다. 박사급 연구위원 상당수가 해고되거나 재계약이 거부돼 연구원을 떠났고, 그 자리는 객원 연구위원이나 학·석사급 연구원이 대신했다. 정낙근 박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인명진 비대위는 기본적으로 여의도연구원을 불신했다. 당세가 위축된 상황에서 연구 인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당사 밖에 별도의 사무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불만스러워했다. ‘연구진이 그 많은 예산을 쓰면서 제대로 출근이나 할까’ 하는 시각을 가졌던 것 같다.” 

    이에 따라 여의도 기계산업진흥회관 신관에 입주해 있던 여의도연구원을 당사가 입주한 한양빌딩으로 이전했다. 2017년 7월 출범한 홍준표 대표 체제에서도 여의도연구원에 대한 홀대는 이어졌다. 한 전직 여의도연구원 관계자는 “인명진-홍준표 체제에서 여의도연구원은 당 대표 비서실 하부기관 정도로 취급됐다. 여의도연구원을 당 대표의 ‘말씀자료’를 생산하는 곳으로 여겼다. ‘정책 개발은 당 정책위원회가 하면 되지 여의도연구원이 왜 필요하냐’는 식이었다”고 밝혔다.

    공익적 연구기관 구실

    정 박사는 여의도연구원 위상이 축소된 또 다른 원인으로 국회 입법조사처와 예산정책처의 존재를 들었다. 연구 인력과 예산 면에서 절대 우위에 있는 두 기관에 입법 조사를 의뢰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하는 의원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2017년 여의도연구원 연간활동 실적 보고’에 따르면 여의도연구원 한 해 예산은 정당 국고보조금 88억, 기타 수익 18억, 전년도 이월금 13억 등 총 100억 원 규모다. 문제는 이 중 80~90%가 인건비로 소요돼 실제 연구 및 정책 개발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은 10억~20억 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 중 상당액이 여론조사 비용으로 쓰이는 형편이다. 

    지난해 연말 기준 여의도연구원 소속 직원은 박사급 9명, 석사급 31명, 기타 39명으로 총 79명이다. 이 중 연구 인력은 절반에 못 미친다. 2018년 7월 현재 여의도연구원의 실질 연구인력은 경제정책실 5명, 사회정책실 4명, 전략기획실 3명, 연구지원실 4명, 안보통일센터 2명, 청년정책센터 2명 등 20명 선으로 알려졌다. 나머지는 중앙당이 소화하지 못한 유급 사무원들이 연구원으로 이동한 경우다. 정당법이 중앙당 유급 사무원(당직자) 상한선을 100명 이하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여의도연구원 한 고위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100% 국고(國庫)로 운영되는 여의도연구원이 공익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밝혔다. 

    “여의도연구원의 주된 기능은 국가정책 개발, 보수정당의 싱크탱크 구실, 선거 여론조사 등 3가지로 볼 수 있는데 당 지도부는 여론조사 기능만 충실히 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연구기관으로서 본연의 임무에 벗어나는 것이다.” 

    집권 실패, 지방선거 패배, 당 지지율 하락이라는 삼중고 속에서 여의도연구원은 현재 위기에 봉착했다. 2020년 총선에서 자유한국당 의석수가 줄어들면 정당 국고보조금에 운영자금을 의존하는 여의도연구원은 존립 기반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한국 보수정당의 영욕과 부침을 함께 겪어온 우리나라 첫 정당 연구소가 다시금 옛 명성을 찾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알려드립니다>
    신동아 2018년 6월호에 실린 인터뷰 ‘경계의 지식인 김시덕’에 실린 김시덕 교수의 발언 “작년에 서울대 모 교수가 대자보에 ‘김시덕은 친일파’라고 쓰기도 했고요”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를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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