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43년(1717) 봄부터 시작된 전염병은 1718년 3월 들어 잠잠해지는 듯하다가 9월부터 다시 기승을 부려 이듬해 초까지 계속됐다. 1718년 9월부터 11월까지 두 달 동안 보고된 각 도의 전염병 피해 상황이다.
9월 19일 함경도 환자 1470명, 사망자 230여 명
9월 21일 경기 환자 2750명, 사망자 1384명
9월 29일 평안도 환자 1770여 명, 사망자 400명
10월 3일 강원도 사망자 380여 명, 일가족 모두 사망 22호戶
10월 27일 평안도 환자 2314명, 사망자 540명
10월 30일 황해도 환자 1700명, 사망자 120명
11월 10일 함경도 환자 6000여 명, 사망자 1000여 명
5개 도에서 두 달 동안 환자가 1만6000여 명, 사망자가 4060여 명이나 발생했으니, 얼마나 전염력이 강하고 치사율이 높은지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사태에 직면한 조정은 어떤 조처를 취했을까?
전염병이 발발한 지역에 치료에 필요한 약재와 의서 등을 내려보내고 의원을 파견하는 것은 전염병이 성행할 때 내리는 기본적인 조처였다. 1717년 봄부터 전염병 피해가 이어지던 상황이라 이전부터 환곡의 탕감과 상환 기한의 연기, 양전의 잠정적 정지, 축성(築城)의 정지 등 민생을 안정시킬 대책이 제기되고 있었다. 전염병 피해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조정은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자의 환곡과 신포(身布)를 탕감해주는 조치를 내리고, 아직 매장하지 못한 시신을 묻어주라고 각별히 지시했다. 이어 피해가 심한 도에는 군포(軍布), 노비 신공(身貢), 신역(身役), 부역 등을 경감해주고, 곡식을 싼값에 발매(發賣)해 백성들이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하며 수령을 유임시켜 접대로 인한 부담을 줄이게 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병력을 보충하는 세초도 사망자 수만큼만 보충하도록 하고, 어영청 등 서울의 군영에 지방에서 군사들이 군역을 치르러 올라오는 것도 정지했다.
전염병의 치료와 생활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거의 다 동원한 셈이었다. 그러나 전염병의 기세는 여전히 잦아들지 않았다.
인력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재해 앞에서 임금은 신하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사에 대해 조언하도록 했다. 그리고 임금이 정전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무는 피전(避殿), 수라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감선(減膳), 제사나 연회 등에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철악(徹樂) 등을 시행했다. 자신을 반성하고 근신함으로써 재해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을 모아 재해를 소멸해 달라는 제사를 지냈다. 전염병이 확산 일로에 있던 10월 18일, 숙종은 동쪽, 서쪽, 남쪽 세 곳의 교외에 단(壇)을 설치하고 근신(近臣)을 보내 전염병으로 죽었으나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는 혼령에 대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렇게 하고도 전염병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11월에는 북교(北郊)에서 여제를 지내도록 하고는 병환 중임에도 직접 제문을 지어 내렸다.
여제는 여귀에게 지내는 제사다. 옛사람들은 전쟁이나 형화(刑禍), 홍수, 전염병 등의 재앙을 당해 비명횡사한 사람이나 제사 지내 줄 후손이 없는 귀신이 원통한 마음을 풀지 못해 여귀가 되는데, 이 여귀의 원한이 온갖 재앙과 전염병을 만들어낸다고 여겼다. 원통한 귀신을 위로해 전염병을 종식시키고 전염병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산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 숙종은 제문을 지었다.
아! 귀신도 마음이 있으니, 이치로 깨닫게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백성이 큰 재앙을 만났으니, 이런 때에 귀신이 아니면 누구에게 빌겠는가? 이에 내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통을 절감하며 최선을 다해 귀신에게 고하였는데도 언제나 들어줄지 갈수록 더욱 멀게 느껴진다. 어찌 귀신이 어질지 않아서이겠는가? 실로 나의 정성이 부족해서이다. 내 자신을 돌아보니 얼굴이 뜨거워지며 부끄럽다. 아! 본래 덕이 없는 내가 과분하게도 임금이 되었으니 백성을 구원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정성이 신명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 여름에 농사를 짓지 못해 황폐한 이랑이 눈에 가득하더니, 겨울 들어서는 한데서 거처하여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온 집안이 다 죽기도 하고 시신을 거두어 묻어 줄 사람이 없어 시체 더미가 쌓이고 마을이 텅 비게 됐다. 계속 이러면 사람의 씨가 마를 것인데 사람이 다 죽고 나면 나라는 어디에 의지할 것이며, 귀신은 또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가? 아! 참혹하다. 차마 더 말하지 못하겠다. 병든 몸으로 노심초사하여 마음이 불에 타는 듯하다. 차라리 내가 이런 일을 당하여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몰랐으면 싶다. <숙종실록 44년 11월 23일>
여제의 제문은 지제교(知製敎)가 짓는 것이 일반적이며 임금이 제문을 짓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더구나 당시 숙종은 병이 심하여 직접 정무를 보지 못하고 세자가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시기였다.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고 절박한 마음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제문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 지극하다, 백성을 염려하는 성상의 덕이여! 옥체가 불편하신 지 7, 8년이 되어 정무를 모두 세자에게 위임하셨으니, 한밤중에 신음하고 마음 쓰며 글을 지어서는 안 됐다. 그런데도 거듭해서 전염병이 참혹하게 도는 것을 근심하고 백성이 다 죽어 가는 것을 아파하여, 기도를 올릴 수 있는 모든 귀신에게 정성을 모아 기도하였고 또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글을 손수 짓기까지 하셨다. 줄줄이 이어지는 수백 마디 말이 모두 애통하고 참담한 마음에서 나왔으니, 정성과 간절함은 금석(金石)을 꿰뚫고 귀신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아! 백성을 근심하는 지극한 덕을 지니신 우리 임금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숙종실록 44년 11월 23일>
사관은 병든 몸으로 손수 제문을 지은 임금에게 후한 평가를 내렸다. 백성의 고통을 그만큼 절박하게 인식했다고 본 것이다. 여제를 통해 이런 통치자의 마음을 전해 죽은 귀신들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뎌내고 있는 산 사람들의 마음까지 함께 위로하고자 했다. 위로를 통해 살아남은 백성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