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비서실장 입장문, 정당史 치욕으로 남을 듯
참모 조직이 나라 이끄는 한국식 거버넌스
대통령 만나지 못한 박근혜 정부 장관들
‘수석비서관 조국’ 앞에서 서명한 박상기·김부겸
관료 집단이 적극성·활기 가질 수 있나
윤석열 대통령과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오른쪽). [동아DB]
윤석열 대통령은 당대표 출마를 준비하던 나경원 전 의원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과 기후환경대사직에서 해임했다. 이에 대해 나 전 의원이 자신의 부족함도 있겠지만 전달 과정의 왜곡도 있었다고 본다면서 “해임이 대통령의 본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에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언론에 위와 같은 입장문을 돌렸다.
10년 넘게 정치를 하면서 이런 글은 본 적이 없다. 언젠가 보게 될 것이라는 상상도 못 해봤다. 이 ‘입장문’을 모바일 메신저 앱으로 보내준 후배는 제정신인지 의심스럽다는 문자를 덧붙였다. 정치권 안팎의 많은 사람이 실망을 넘어 분노하기까지 했다.
비서실장 본분 한참 벗어난 일
2018년 6월 21일 박상기 당시 법무부 장관(앞줄 왼쪽)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앞줄 오른쪽)이 이낙연 국무총리(뒷줄 왼쪽)와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DB]
물론 이렇게 말하면 저 입장문 속에 나경원 전 의원의 출마에 반대한다는 명시적인 구절은 없지 않으냐는 반박이 나올 수 있다. 그런 반박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전당대회를 앞에 둔 시점에 비서실장이 저런 발언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의 눈에 나 전 의원의 출마를 막으려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바로 다음 날 국민의힘 초선의원 50명이 집단 성명을 내서 나 전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홍준표 대구시장이 부동산 투기 의혹까지 제기했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 비서실장의 글이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현실적으로는 막강한 영향력이 있더라도 법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참모에 불과한 비서실장이 공개적으로 특정 정치인의 여당 대표 출마를 막기 위해 나선 것은 우리 정당사에 오래 동안 지워지지 않을 치욕으로 남을 것이다.
입장문의 내용보다 더 걱정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절차와 형식에 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을 위촉하거나 기후환경대사를 임명하는 권한은 대통령이 가진다. 특정인을 해촉하거나 해임했을 때 그 이유나 과정을 꼭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만약 ‘대통령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결정 과정에 제기된 의문에 해명을 하려면 대통령이 해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하기 어려우면 대변인이 해야 한다. 대변인의 발언은 바로 대통령의 뜻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법에 의해 주어진 권한은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이 행사하고 책임져야 한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참모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전달해서는 안 된다. 김대기 비서실장의 입장문에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실지”와 같은 전언 내지 제3자의 관찰과 같은 어색한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이런 현상이 염려되는 것은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정권에 상관없이 ‘청와대’ 혹은 ‘대통령실’로 불리는 법적 실체 없는 기관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현상이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다. 법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은 기관이나 개인은 실제로 중요한 결정에서 배제되고 대통령의 참모 조직이 실질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비정상적인 현상이 일상화되는 것이다. 법적 권한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지는 경우도 드물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불릴 정도로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된 우리 헌법 체계에서 결정권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현상은 예전부터 있었다.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내각이 심하게 표현하자면, ‘허수아비 집단’으로 보일 정도로 힘을 잃은 것은 박근혜 정부 때가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도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은 대통령을 만날 수가 없었다. 처음에 장관의 대면 보고가 어렵다는 소문이 돌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통령이 직접 기자회견에서 해명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도 배석한 장관들을 돌아보며, “대면 보고를 늘려가는 방향으로 하겠지만,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황당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중요한 대국민 메시지가 나오거나 국정 방향이 발표되는 것은 주로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석상에서였다. 국무회의는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형식적인 것이 돼갔다.
정책보좌관 인선 직접 못 하는 장관들
처음 국회의원이 돼서 정부 각료들을 상대로 질의하게 된 것이 박근혜 정부 때였다. 현장에서 부딪혀 보면 금세 느끼게 된다. 각 부처를 대표하는 장관들이 일상적인 업무 처리를 제외하면 정작 중요한 결정 사항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답변할 때 회피하거나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곤 했다. 정부 운영이 청와대를 중심으로 이뤄지면 각 부처는 활력을 잃고 관료들은 복지부동에 젖어든다. 국가의 역량을 떨어뜨리는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다.이런 현상은 제도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장관 정책보좌관’ 제도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명칭이 ‘정책보좌관’이기 때문에 어떤 전문적인 영역에서 국무위원인 장관을 돕는 직책이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실제 운영되는 양상은 그와 전혀 다르다. 장관 정책보좌관은 노무현 정부 때 ‘장관의 국정 업무를 돕고 공직 사회 개혁을 보좌’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막상 임명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문성과는 거리가 멀다. 2019년 언론보도를 보면 그 당시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정책보좌관 39명 중 85%가 대선 캠프, 여당 등 정치권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주로 당료나 의원 보좌관, 선거 캠프 출신이 자리를 채웠다. 문제는 소위 ‘실세 장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장관 대부분이 자신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할 정책보좌관 인선을 직접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청와대(대통령실)에서 내려보내는 것이다. 정치권에 발이 넓고 청와대와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이 정책보좌관으로 오면 장관이 오히려 눈치를 보게 된다. ‘감시’나 ‘통제’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되겠지만, 이 제도를 통해서 대통령실이 내각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낙하산 비서실장 받아들인 국무총리
2015년 1월 12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새해 기자회견에서 배석한 국무위원들을 돌아보고 있다. [동아DB]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나치게 비대해진 대통령실의 위상을 두고 걱정과 비판을 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물론 역대 정부는 완강하게 이런 지적을 부정하거나 무시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쯤 됐을 때 나온 ‘청와대 정부’라는 책을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정치학자인 박상훈은 이 책에서 국무회의와 내각, 부처로 이뤄진 공식 기구와 달리 권력을 위임받는 절차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의 자의적 결정으로 구성된 비서실이 내각을 통할하고 지휘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강조한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비서실이 지난 정부에서처럼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다. 내각과 집권당의 자율성은 보이지 않는다. 비서실장은 대통령 다음의 권력 서열 2위처럼 역할을 하고 정책실장은 국무총리도 아닌데 직접 현장을 방문하며 언론을 이끌고 정책을 지휘한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청와대를 탄핵당한 박근혜 청와대에 비유한 책이 나오자 지난 정부 인사들은 격분했다. 임종석 비서실장은 공개적으로 저자가 통계를 잘못 인용했다고 반박했고, 다른 인사들도 언론에 불만을 쏟아냈다. 그러나 청와대 산하 조세재정특별위원회가 예산과 재정정책을 직접 챙기고 일자리수석비서관 밑의 자영업비서관이 중소기업벤처부의 담당 부서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면 청와대 정부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중요한 부동산 대책이 국토교통부 장관의 휴가 중에 발표되고, 군 장성 인사를 앞두고 청와대 행정관이 육군참모총장을 면담하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정적 장면은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문 서명식’이라는 행사에서 등장했다. 이낙연 국무총리와 박상기 법무부 장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수사권 조정 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검찰은 법무부 관할이고 경찰은 행정안전부 관할이기 때문에 양측의 권한을 조정하는 문제는 총리가 맡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논의 과정에서 청와대도 관여하겠지만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민정수석이 주인공처럼 등장한 것이다. “대통령께서는 민정수석이 책임지고 법무, 행안 두 부처 장관과 함께 (…) 합의를 도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라는 조국 당시 수석의 발언은 국정을 움직이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총리와 대통령의 비서가 흐뭇한 표정으로 뒤에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주요 부처 장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자신들의 권한을 조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은 ‘청와대 정부’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를 그토록 강하게 단죄했던 문재인 청와대가 기가 막히게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통령비서실이 대통령실로 이름을 바꾸고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위치만 옮겼을 뿐 참모 조직이 나라를 이끄는 거버넌스가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위)와 용산 대통령실. [동아DB]
‘청와대 정부’ 상징하는 결정적 장면
새롭게 들어선 윤석열 정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난방비 문제를 봐도 그렇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월 9일 동절기 에너지바우처의 가구당 평균 지원단가를 14만5000원에서 15만2000원으로 7000원 올렸다. 1월 26일 대통령실은 동절기 에너지바우처 단가를 9일 올린 것의 갑절로 올린다고 발표했다. 기획재정부의 반도체 세제 지원 방안에 이어 대통령실이 부처의 방침을 전격적으로 변경한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관료들이 적극성과 활기를 갖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최근 여당 전당대회에 개입하는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의 모습은 권한 집중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준다. 대통령실의 힘이 정부를 넘어 여당 내부 문제에까지 노골적으로 미치게 된 것이다. 이진복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국회를 방문해 “일부 후보들이 대통령 참모들을 간신배로 모는 것은 (…)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나”라고 말했다. ‘윤-안 연대’라는 용어에 대해 “대통령과 후보가 어떻게 동격이라고 얘기하는 건가”라는 발언에서는 권위주의적인 느낌마저 든다.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이어진 ‘청와대 정부’ 현상이 ‘용산 정부’로 심화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구조개혁 문제(governance)에 대해 많은 논의가 나온다. 1987년 체제를 바꾸기 위해 개헌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우선 선거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선거제 개혁을 언급하기도 했다. 개헌이나 선거법 개정을 말하기 전에 ‘청와대 정부’ ‘용산 정부’라는 후진적 행태부터 고쳐야 한다. 제도와 상관없이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계속된다면 아무리 시스템을 바꿔도 소용이 없다. 뻔히 보이는 문제점도 외면한다면 제도 개혁은 말할 자격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