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입력2006-03-06 18: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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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가 결렬되기 전까지는 미군정에 대한 좌익의 방침은 ‘우의적 친선’이었다. 노동운동도 미군정에 협력하는 산업건설노선에 따라 전개됐다. 좌익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 문제에 대한 결정(이하 모스크바결정)이 가까운 시일 안에 완전한 독립정부로 발전할 임시정부 수립을 약속하고 있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좌익은 ‘근로대중이야말로 진실한 건설자이며, 신성한 생산애호자’라는 기치 아래 자주독립과 경제건설을 원조하는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 협력하며, 양심적 민족자본에 대해서는 파업을 하지 않을뿐더러 생산에 적극 협력하는 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현실은 좌익의 기대를 배반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로 들어가자 좌익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미군정은 법령 제72호를 공포해 좌익의 활동을 포괄적으로 구속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당 간부 10여 명을 체포했고, 조선공산당(이하 조공) 본부의 퇴거를 명령하는 한편, 조공 기관지 ‘해방일보’에 정간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직접 공세와 함께 38선의 무허가 월경(越境)을 금지하고, 한국을 항구적인 미군기지로 전환할 계획을 발표했으며, 입법의원 설립을 승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좌익은 미군정의 이 조치를 분단의 영구화, 좌익의 분열과 조공의 고립화 및 단독정부 수립 음모로 받아들였다.

    미군정은 5월17일 삼척탄광노동자의 파업투쟁과 7월3일 조선화물자동차주식회사 경성지점 종업원의 무단해고 반대투쟁을 단호하게 진압했다. 미군정은 7월23일 ‘민주성’과 ‘자율성’을 요건으로 내세운 법령 제97호(노동 문제에 관한 공공정책 및 노동부 설치)를 공포해 좌익계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산하 노동조합을 부인하고 우익계인 대한노총의 활동 자유를 장려했다. 우익은 미소공위의 ‘휴회’를 ‘결렬’로 선전하며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1946년 6월2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에 단독정부를 즉시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익은 좌익단체와 좌익인사에 대한 테러를 강화했다.



    미군정의 조선공산당 간부 체포령

    좌익은 가장 확실하고 평화적인 정권장악 수단으로 간주해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우익의 테러로 수세에 몰리자 정세를 뒤집을 대책 마련에 골몰했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응방안을 놓고 분열됐다.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좌파는 미군정과 협력을 유지하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광범위한 좌우합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공은 ‘신전술’로 기울었다. 조공은 모스크바결정의 총체적 실천에 따른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전망을 유지하면서, 군정협력에서 군정의 실정(失政)에 대한 적극적인 폭로와 규탄으로, 반동경찰과 우익의 테러탄압에 대한 무저항에서 자위적 반격으로, 대중의 일상적 요구투쟁 억제에서 촉진으로 정책을 전환하는 한편 좌우합작 반대와 ‘좌익의 독자적 진출’을 선언했다.

    정책 전환과 더불어 노동운동 노선도 바뀌었다. 전평은 기존 협력방침을 철회하고 미군정의 정책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8월13일 전평은 국민생활을 파멸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북조선처럼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대산업을 국유화하며 진보적 노동법령을 실시하고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평은 산업건설운동의 우편향을 비판하는 데 집중했다. 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은 8월23일자 논설에서 파업회피를 권고한 지령을 ‘노동자 계급의 무장을 해제하는 전술’이라고 비난하고, 전평은 노동대중의 기본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대중적 군중투쟁의 한 형태인 파업을 지극히 귀중한 투쟁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동운동 정책은 우편향에서 좌편향으로 기울어졌다. 전평 지도자들은 당시 정세를 자본과 노동 간의, 반민주진영과 민주진영 간의 ‘생사존망(生死存亡)’의 투쟁이 요구되는 ‘위대한 날’을 위한 투쟁의 시기로 규정했다. 그리고 경제적 파업에 대해 타협이 아닌, 적을 굴복시킬 것을 전제로 하는 ‘판가름 싸움’으로 인식했다.

    ‘신전술’의 영향을 받은 대중은 도처에서 투쟁에 나섰다.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미군 전술부대와 유혈 충돌을 거듭하며 8·15기념대회를 개최했다. 각지의 공장과 기업소에서 악덕관리자 배격투쟁이 전례 없이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하의도 농민들도 하곡수집에 반대해 무장경관과 신한공사 사원들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켰다. 좌익은 우익과 중간파를 배제하고 자신의 조직만을 독자적으로 동원해 8·15기념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신전술을 현실에서 시험했다.

    그러나 상황은 좌익에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조공은 이 시기에 고립돼 있었다. 조공은 좌우합작을 놓고 중도좌파 세력과 선을 그었고,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좌익 3당의 합당 문제로 대회파와 간부파로 나뉘어 심각한 당내 투쟁에 휩싸였다.

    의식화된 대중은 좌익의 요구에 응해 투쟁에 나섰지만, 다양한 정치적 신조와 종교적 신앙을 가진 새로운 노동자층이 탄생하고 이들은 의식화된 노동자들보다 더 광범위한 대열을 형성했다. 그리고 미군정과 우익은 좌익에 대한 광범위한 테러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투쟁에 나선 대중을 상대로 이미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미군정은 박헌영을 비롯한 당 간부 체포령을 발동해 좌익이 활동할 최소한의 합법적인 무대마저 박탈했다.

    부산철도노동자 파업이 신호탄

    조공과 전평 지도자들은 바로 이러한 정세에서 생사존망의 총 반격전을 실천에 옮겼다. 8월초 이미 총파업 계획을 세우고 실천할 날만을 기다렸다. 총파업은 표면상 대중의 일상적 이익과 정치적 요구를 투쟁을 통해 얻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했다.

    대중을 동원해 그 힘으로 미군정과 우익의 탄압 공세를 제압하는 한편 중도좌파 진영의 합작노선을 깨고, 당내 반대파의 해당(害黨)행위를 제압하는 것도 목표로 설정했다. 좌익 지도자들은 미군정의 정책파탄을 폭로해 자기반성의 기회를 줌으로써 미군정을 ‘제국주의 반동정책’에서 ‘민주주의 노선’으로 복귀시키고 미소공위를 재개해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도 총파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애초 계획한 총파업 시점은 추수기인 10월이었다. 농촌에서 계급갈등이 고조되는 추수기에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노동운동을 농민운동과 결합시켜 투쟁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투쟁 시기는 갑자기 9월로 앞당겨졌다. 대회파의 대회소집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간부파가 이를 저지할 목적에서 서둘러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계획은 투쟁의 중점을 철도부문에 둘 것과 경제적 요구와 노조활동의 자유 및 검거된 공산당 간부의 석방 등을 요구하는 ‘표준요구조건’을 제시하는 한편 철도는 9월24일, 경전은 26일, 기타는 28일에 파업을 단행하고 출판보도부문은 파업상황을 선전하기 위해 마지막에 파업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주로 농성투쟁을 하고 마지막에 시위로 넘어가되 요구조건이 관철된 산별단체에서는 파업을 종결하고, 산별 및 각 지방과 공장에 파업투쟁 지도를 위한 파업투쟁위원회를 조직하도록 권고했다.

    총파업의 신호탄은 9월23일 부산철도노동자 7000여 명이 일으킨 파업이었다. 24일 서울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전국의 4만여 철도노동자가 이에 합류해 전국의 수송망이 마비됐다. 25일 갑자기 경성출판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갔고, 26일엔 경전이 파업을 단행했으며, 10월1일엔 서울시내 전차가 3시간 동안 멈추고, 서울중앙우체국과 대구와 경주의 우체국도 파업을 했다. 파업은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노동자·학생·시민의 정치적 시위운동으로 발전했다.

    봄날 들불 번지듯

    그러나 9월30일 용산철도기관구를 둘러싸고 8시간 동안 전개된 전평과 우익 간의 공방전이 우익의 승리로 끝나고, 경전과 총파업본부가 설치된 영등포조선피혁공장이 우익에 진압되자 총파업은 현저히 위축됐다. 10월3일 선원 1만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으나 그날부터 철도는 운행을 재개했고, 10월15일께 대구와 부산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노동현장은 정상을 되찾았다.

    전평 주도의 파업투쟁은 총반격전이라 하기에는 미흡한 투쟁으로 종결됐지만, 투쟁의 불씨는 봄날 들불이 번지듯이 남한 전 지역으로 퍼져갔다. 10월1일 대구에서 시위 중인 노동자가 경찰 발포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대구지역 노동자들이 경찰서로 들이닥쳐 군정 경찰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대구폭동을 시발로 남한 각지에서는 수백수천의 노동자, 농민, 시민이 경찰서, 군청, 지서, 읍면사무소 등을 습격해 군정경찰과 군정 관리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등 지방행정을 사실상 마비시키면서 일대 항쟁을 전개했다. 실로 전투를 방불케 하는 격렬한 양상이었다. 항쟁은 12월 초까지 73개 시·군을 휩쓸고 지나갔으며, 연인원 230만명을 동원해 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군중투쟁 기록을 남겼다.

    친일경찰의 득세

    9월 총파업은 대구폭동을 계기로 경북도로 확대되고 다시 경남을 비롯한 남한 각지로 파급됐다. 대구·경북 지역이 항쟁의 발원지가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미군정이 친일경찰을 군정의 요직에 기용하고, 경제정책 실패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며, 미소공위 휴회로 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1946년 여름 하곡 수집을 계기로 최고조에 달했다. 대구경북 지역은 미군정 정책파탄의 총체적 모순이 곪을 대로 곪아 불만 붙이면 터질 화약고와 같았다.

    대구에 진주한 미군은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를 해산하고 친일관료들을 군정관리로 임명했다. 미군정은 김의균을 도지사로, 대구공소원장(지금의 고등법원장)과 검사장에 이호정과 한규용을, 대구지방법원장과 검사장에 함승호와 오완수를 임명했다.

    이들은 모두 일제 강점기에 판사를 역임한 자들이었다. 경북경찰청장에는 일제강점기 도회 의원을 지낸 조근영이, 그 후임에는 광복 직전까지 군수로 있던 권영석이 임명됐다. 대구경찰서장에는 박을수와 그 뒤를 이어 이성옥이 임명됐는데 둘 다 친일경찰로 민족운동을 탄압한 자들이었다. 친일경찰은 일제시기 악행을 버리지 못한 채 광복 후에도 여전히 고문, 구타 등을 자행해 지역 주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광복 후 대구경북 지역 주민들이 겪은 가장 큰 고통은 식량부족이었다. 1945년 경북의 쌀 수확량은 약 200만 섬이었다. 이 양은 도민들에게 풍족하지는 않지만 식량이 모자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햅쌀이 출하됐는데도 쌀값은 큰 폭으로 올랐다. 악덕상인들이 쌀을 사재기해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식량사정이 악화되자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발표하고 1946년 2월부터 쌀을 수집했다. 강제공출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몰아친 쌀 수집은 농민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쌀 수집가격도 시중에서 암거래되는 가격보다 현저히 낮아 농민들이 수매에 응할 리 없었다. 자연히 수집실적이 저조했으며, 경북의 실적은 목표량의 7.3%에 불과했다.

    농민의 불만은 더욱 증폭됐다. 하곡 수집은 일제 강점기 때도 없던 것으로 추진방식도 강제적이고 폭력적이었다. 하곡수집 실적은 전국적으로 평균 목표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8%에 머물렀다. 하지만 경북은 계획량의 74.4%를 기록했다. 이처럼 경북에서 유독 수집 실적이 높았던 것은 군정 관리와 경찰이 나서서 농가마다 할당량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실적이 저조할 경우 해당지역 관리는 문책을 당해야 했으므로 수집에 혈안이 됐다.

    수매를 거부할 경우에는 경찰이 강제로 수매케 해 농민들과 충돌이 잦았다. 경찰과 관리의 압박에 못 이겨 자신의 가재도구를 팔아 하곡을 사서 할당량을 채우는 농민도 있었다.

    언론계의 신문 제작 거부

    시장에서 쌀이 자취를 감추고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쌀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1945년 11월 쌀 한 말은 140원에 거래되었다. 그러나 1946년 9월말에는 1500원으로 10배 이상 폭등했다. 시민들은 쌀을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공정가격으로 배급되는 쌀과 보리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 탓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946년 5월에는 콜레라마저 발생해 대구시민 120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또한 6월에는 수해가 발생해 쌀 대체작물이 큰 피해를 보았으며 교통도 두절돼 식량사정이 더욱 악화됐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시민들은 연일 도청과 부청으로 모여들어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기아(飢餓) 시위에 나섰다.

    전평의 총파업은 대구지역 주민들을 완전히 새로운 상황으로 몰아갔다. 전평이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란 이름 아래 미군정 운수부(運輸部) 산하 전국 4만여 철도노동자를 앞세우고 총파업에 돌입한 것은 1946년 9월24일이었다. 파업의 선봉에 선 단체는 부산철도기관구였다. 부산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은 이미 9월15일 미군정청 운수부장 앞으로 제시한 임금인상, 일급(日給)제 반대 등 6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부분 태업으로 맞서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해답이 없자 다른 지역 철도기관구보다 하루 앞선 9월23일 0시를 기해 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24일 대구역 철도노동자 1000여 명도 파업에 돌입해 ‘대구철도쟁의단본부’를 조직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일급제 반대, 임금 인상, 쌀 배급 증대, 해고 반대, 급식 부활 등을 요구했다.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박헌영(가운데).

    러치 미군정 장관은 24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런 사전교섭과 요구도 없이 파업에 들어간 철도파업은 불법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대구지역의 파업은 26일을 기해 전 산업분야로 확대됐다. 26일 오전부터 대구우편국 직원들이 동조파업에 돌입했고, 이튿날부터는 경주를 비롯해 포항, 안동, 상주 등 경북도 내 우편국도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26일 오후에는 적산(敵産)관리업체인 대구중공업 주식회사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섬유업계에도 파급돼 사환(絲丸)직물, 동아(東亞)직물, 대구견직 3개 공장 노동자들도 파업을 시작했다. 27일 적산인 신흥제사(新興製絲)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편창(片倉)제사, 조선생사 노동자들도 동조파업에 들어갔다.

    도청 광장에 모인 기아(飢餓) 시위대

    파업 바람은 대구의 언론계에도 불었다. 출판노조 소속 각 신문사 노조원들은 25일 오후 서울에서 전국출판노조가 파업에 들어간 데 자극받아 27일부터 일손을 놓기 시작했다. 좌익지인 민성일보의 공무국 직원들은 27일자 신문부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민성일보에 이어 중도지인 영남일보, 우익지인 대구시보, 경북신문, 적산인 경북인쇄소 등에 소속된 노조원들도 29일부터 파업을 벌여 30일자 이후 신문제작을 거부했다. 공무국 직원들이 주도한 이 파업으로 대구의 언론은 유혈사태를 부른 격동기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9월27일 경북도 당국은 노조측에 협상을 요구했다. 헤론(Gordon J. F. Heron) 미군정 지사와 김의균 조선인 지사는 전평 대구지방평의회 윤장혁 위원장을 비롯 파업본부 노조간부 4명을 도지사실로 불러 파업철회를 종용하는 협상을 벌였다. 윤장혁은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과 중앙의 지령이 없는 한 파업을 중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헤론 지사는 식량문제는 지방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수송에 애로가 있고 절대량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관노(官勞) 담판은 서로의 팽팽한 주장만 확인했을 뿐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협상 결과 별다른 진전이 없자 윤장혁 등 노조간부들은 27일 오후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이하 ‘대구투위’)라는 간판을 정식으로 내걸었다. 9월27일 현재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수는 철도노조원 1200여 명, 섬유 및 직물업체 노동자 1800여 명, 도내 우편국 직원 1200여 명, 출판노조원 112명, 기타 직종의 노동자 660여 명 등 모두 5000여 명에 달했다.

    9월28일과 29일, 그리고 30일은 투위를 중심으로 파업노동자들의 위세가 한층 고조됐다. 이에 권영석 제5관구경찰청장은 치안책임자로서 윤장혁 등 대구투위 간부들에게 회담을 요구했다. 28일 권 청장은 ▲파업 이유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겠지만 ▲쟁의는 합법적으로 하고 ▲앞으로 각 단체 대표 3인 이내가 실내에 모여 쟁의에 대해 토의하는 것은 인정하되 ▲시위행동과 선동적 행동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윤장혁은 공안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합법적으로 쟁의를 벌이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사건의 날’인 1946년 10월1일 오후. 도청 광장에서는 부녀자들이 중심이 된 1000여 명의 기아 시위대가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구역 앞 광장과 서쪽의 금정 일대에서 무장경찰대와 시위대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대치했다. 삼엄한 경계태세 속에 시위대의 혁명가 합창이 울려 퍼졌다.

    경찰측이 대구투위 간판을 떼라고 요구했으나 대구투위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긴장이 고조됐다. 양측이 타협해 경찰이 바리케이드와 무장을 해제하려고 할 때 시위대 쪽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돌팔매가 경찰을 자극했다. 이 투석을 계기로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고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이때 노동자 1명이 피살됐다.

    경찰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하자 이날 밤 대구의 좌익간부들은 비상대책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다. 회의 결론은 다음날 전 조직원을 동원해 경찰에 대한 항의규탄은 물론 책임추궁을 벌인다는 것으로 귀결됐다. 2일 대구의과대학, 대구사범대학, 대구농과대학 학생들은 대구사범대학에서 연합집회를 연 뒤 경찰 발포로 사망한 사람의 시체를 메고 대구경찰서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전 10시경 3개 대학 학생들과 남녀 중학생 수천명이 대구경찰서를 포위하고 발포중지와 무장해제,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했다.

    대구역과 금정의 대구투위 앞에서도 다시 위기가 고조됐다. 전날 경찰의 총격으로 동료 한 사람을 잃은 파업 노조원들은, 200명으로 늘어난 무장경찰대와 기마경찰대가 역전 일대의 교통을 차단하고 있었음에도 대구투위 앞에 재집결하는 데 성공했다.

    오전 10시도 채 안 돼 파업노동자 숫자는 수천명 선으로 불어났다. 박헌영이 쓴 ‘10월인민항쟁’에 따르면 9·9식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관들이 단상에서 선동하는 여공을 사살하고 그 뒤를 이어 나오는 노동자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해 18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보복총격으로 경찰관도 4명이 사망했다.

    경찰 무기고 탈취와 미군 전차대 투입

    약 1만5000명의 군중이 대구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경북도 미군정 경찰부장 플레지어(John Charles Plezia) 소령은 권영석 경찰청장과 이성옥 대구경찰서장에게 무력으로 군중을 해산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서장은 플레지어의 진압명령을 거부했다. 플레지어와 권 청장이 경찰서를 떠나자 오전 11시30분경 이 서장은 무장해제를 결심하고 부하들에게 모든 총기를 무기고에 넣도록 명령했다.

    낮 12시쯤 연좌해 있던 학생과 청년 수백명이 해산 권고를 무시하고 경찰서로 진입해 유치장을 부수고 그 안에 있던 100여 명을 석방했다. 이들은 무기고를 파괴하고 경찰무기를 모두 탈취했다. 군중의 험악한 기세에 놀란 20~30명의 경찰관은 경찰서 서쪽 담을 넘어 도망쳤다.

    경찰서를 접수한 군중은 탈취한 무기 수십 정으로 무장했으나 실탄은 갖지 못했다. 무기탈취 후 군중은 무장대를 중심으로 100명에서 200명씩 분단(分團)을 조직해 일부는 대구경찰서를 지키고 일부는 파업 노동자가 수세에 몰려 있는 대구역전으로 갔다. 또 일부 분단조직은 대구시내 각 정·동에 파견돼 포진했다. 남아서 대구경찰서를 지키던 분단은 오후 3시쯤 미군의 탱크가 진격해오자 도망쳐 시내의 다른 분단에 합류했다.

    미군 진압부대가 대구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쯤이었다. 이때 선발대로 나선 것은 보병이었다. 미군은 사건현장에 접근하고도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위협 정찰만 했다. 오후 3시쯤 미군은 전차대를 투입하면서 적극적인 해산작전에 나섰다. 오후 3시 미군의 도시폭동 및 시가전 진압용 전술차인 M-7 마운트(Mount) 4대가 출현했다. 미군탱크의 출현으로 대구경찰서는 총성 한 번 없이 수복됐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무장시위대는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시위대가 대구경찰서를 점령하던 때부터 “경찰이 항복하고 경찰서가 점령됐다”는 소문이 일시에 대구 시내로 퍼졌다. 다소 과장되고 들뜨기조차 했던 이 소문은 과격청년들을 자극했음은 물론, 평소 경찰에 짓눌리며 밑바닥 삶을 살아오던 기층민과 부랑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이들 중에는 극렬하게 설치며 앙갚음하러 다니는 무리도 있었다. 군중심리, ‘주의자’들의 선동, 부랑자들의 난동이 삼박자가 돼 오후 1시 이후 대구시내와 인근 면 지역에선 처참한 살육이 벌어졌다.

    폭동 초기 경북도 내에서 약 45명의 경찰관이 살해됐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폭도로 변한 군중은 경찰의 얼굴과 몸뚱이를 칼과 도끼로 난자하고, 큰 돌을 머리에 떨어뜨려 짓이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경찰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대구시내에서 주변 군·면으로 확대

    탱크를 앞세운 미군의 출현으로 시위대는 해산했으나 폭도로 변한 일부 시위대가 곳곳에서 소동을 부리자 미군정 관리들은 속이 탔다. 대구시내 각 기관 직원 대다수도 미군정에 등을 돌렸다. 미군정에 몸담고 있는 도청과 부청의 중하급 간부들은 2일 오후부터 노골적으로 자리를 뜨거나 태업을 했다. 경북도청의 부장급 이상 조선인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도 ‘총사직론’이 제기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후 4시부터 권영석, 플레지어 조·미 경찰청장과 최문식, 이재복 등 좌익인사들 사이에 담판이 이루어졌다. 미군정은 이 비상사태를 조선인들이 자율적으로 수습하도록 요구했으나, 실제로는 좌익 쪽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소동을 중지시키라는 당부였다. 그러나 최문식, 이재복 등에게는 폭도로 변해버린 일부 비조직 군중의 광기에 찬 보복행위를 중지시킬 수단이 없었다. 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오후 5시 미군정은 결국 계엄령을 선포했다.

    대구지구 계엄사령관 포츠(Russell J. Ports) 대령은 포고령 제1호에서 경찰이 치안을 유지할 것이며, 최후 수단으로 군대가 동원될 것이고, 시민은 경찰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0명 이상의 집회와 회의가 금지되고,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야간통행도 금지됐다.

    10월3일 포츠 계엄사령관은 최문식, 이재복, 손기채 등 대구의 좌익요인들을 내세워 선무(宣撫)방송을 하는 한편 이날 포고령 2호와 3호를 연달아 발표했다. 계엄포고령 2, 3호는 폭도들에게 무기반환, 피랍자 석방, 약탈중지 등을 명한 것으로, 위반하면 군대동원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을 담고 있었다. 이때쯤 대구 시내에서는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유혈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됐지만, 3일 이후부터는 점차 대구부를 벗어나 인근 읍면으로 번졌다.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1946년 10월 대구 ‘10·1사건’에 이어 경남북, 전남, 경기 등 여러 곳에서 좌익 주도의 방화, 파괴 행위가 잇따르자 우익 청년 당원들이 의용경찰대를 편성하고 소탕에 나섰다.

    대구와 인접한 몇몇 군에서는 10월2일부터 대중이 들고 일어났다. 미군이 출동하자 대구를 탈출한 과격한 군중 일부가 화물차량을 빼앗아 타고 대구 외곽지역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군에서는 좌익 성향인 인민위원회나 농민조합, 민청 조직이 중심이 됐다. 경북도에서는 경찰과 마찰이 잦은 곳, 하곡 수집 등의 실적문제로 군 당국과 농민조합 간에 대립이 심한 곳, 지주나 친일토호의 뿌리가 깊어 반감이 쌓인 곳, 주민의 반발의식이 강한 곳에서 격렬하고 잔혹한 살상이 빚어졌다. 도내에서 민경(民警)간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은 영천군과 칠곡군이었다.

    미군의 G-2(정보기관) 주간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영천군에서는 3일 아침 2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서장과 경찰관 15명을 살해했다. 이밖에도 경찰관 46명이 실종됐는데, 이 중 적어도 40명은 시위군중이 납치했다. 시위군중도 15명이 사살되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는 등 피해가 커져갔다.

    시위군중은 대구에서 지원경찰 100명이 내려오기까지 만 이틀 동안 영천 일원을 지배했다. 그동안 경찰서와 우편국을 전소시키고 경찰무기고, 신한공사, 법원, 그리고 적어도 100여 채의 건물을 포함한 많은 공공기관과 가옥을 불태웠다. 이 소란 속에 영천군수를 비롯해 면직원과 관리 19명이 살해당했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박정희 형 박상희의 활약

    영천군과 함께 잔혹한 보복행위가 벌어진 곳은 칠곡군이었다. G-2 보고서에 따르면 10월2일 오후 9시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1000여 명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3일 새벽 왜관경찰서를 습격했다. 경찰서를 점령한 군중은 왜관경찰서장과 2명의 경찰관을 낫과 도끼로 참살했다. 지방 주민들이 주축인 시위대는 3일 오전 2시에서 3시 사이에 칠곡, 안동, 석적, 약목, 북삼 등의 경찰지서를 습격, 파괴하고 그곳의 경찰관, 관공리, 부유층 소유 가옥 50여 채를 파괴했다. 이 와중에 시위대 7명도 사망했다.

    선산군 내의 봉기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대구에서 내려온 지원인력의 선동 없이 군민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난 점과 박정희의 중형(仲兄)인 박상희(朴相熙)의 활약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박상희는 일제 강점기부터 민족의식에 젖어 항일운동을 해온 선산의 애국지사였다. 그는 신간회에도 간여했고, 조선일보 구미지국장,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10월3일 오전 9시 당시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인 박상희가 이끄는 2000여 명의 군중은 구미경찰서를 습격하고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경찰서장 등 경찰관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다. 또 구미 면사무소를 습격해 양곡 135가마를 탈취했다. 이들은 서장과 서원의 가옥은 물론 선산군 내 요인의 집을 모조리 파괴했다. 무기를 탈취한 40여 명의 군중은 선산군청도 습격했다. 6일 오전 지원경찰이 들이닥치자 박상희는 도주하다가 사살당했다. 박상희는 경찰서 점령 직후 일부 과격분자들이 감금된 경찰관과 우익인사를 즉결처분하자고 주장하자 이를 적극 만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북도에서는 오지의 산악지대인 영양군과 동해의 고도인 울릉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군에서 조직적인 봉기나 개별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경북도를 통틀어 볼 때 대구부, 달성군, 성주군, 칠곡군, 영천군, 의성군, 선산군, 군위군, 경주군 등 9개 부·군은 시위 군중이 한때 경찰서를 점령할 정도로 시위가 격렬했던 곳이다. 평소 좌익세가 드셌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불안과 미군정의 인사정책, 하곡수집 정책 등 당면한 실정(失政)으로 주민의 불만이 극도에 달해 크고 작은 마찰이 잦았던 곳이다. 또 대구와 교통이 원활하고 왕래가 활발해 대구의 유혈상쟁이 몇 시간 안 돼 곧바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피해도 컸다.

    G-2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도의 총 피해액은 4억원, 경찰측 인명피해는 보안대(경찰보조원 및 마을 자경대원)를 포함해 사망 80명, 행방불명 및 납치가 145명, 부상이 96명으로 집계됐다.

    G-2 보고서는 시위대의 피해에 대해서는 사망 48명, 부상 63명, 체포 1503명으로 집계했다. 대부분 습격을 받은 관리거나 우익인사인 민간인 사상자수는 사망 24명, 부상 41명, 납치 21명으로 집계됐다.

    한편 G-2 보고서에 따르면 소총 204자루, 권총 11자루, 탄약 2688발이 탈취당했으나 회수된 것은 소총 118자루, 권총 3자루, 탄약 1035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회수되지 못한 무기가 뒷날 빨치산의 전신인 야산대의 무기로 탈바꿈하게 된다.

    동료들의 참극을 목격한 경찰과 우익청년들의 반격은 가혹한 앙갚음으로 나타났다. 경찰의 보복은 우선 주모자와 그 용의자들에 대한 대량검거선풍을 몰고 왔다. 대구에 계엄령이 내려진 10월2일 밤부터 11월말 사이에 경북도에서만 총 7400명, 대구와 그 주변지역에서 2250명의 좌익 정당 및 사회단체 간부, 학생, 노동자, 농민, 도시하층민, 부랑자들이 검거됐다. 이 중 6580명은 1947년 1월말께 석방됐으나 석방되기까지 경찰의 극심한 고문으로 초죽음이 됐다. 나머지 피검자 중 280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됐고 그 밖에 640여 명은 조사 중이거나 재판에 계류 중이었다.

    경찰의 보복과 대량검거 선풍

    경찰의 보복은 이름 없는 민초들에게도 가해졌다. 경북 칠곡군 인동면 신동에서는 고문경찰의 손에 농민 한 사람이 맞아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변사로 위장 처리된 고문사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부상경관을 박대했다고 여겨지는 대구시내의 의사들에게도 보복이 가해졌다.

    경찰뿐 아니라 독촉국민회, 독촉청년연맹,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도 조직적으로 보복을 자행했다. 지방에 따라 일부 우익청년단체는 좌익관계자를 직접 체포 혹은 구타하는 사형(私刑)을 감행하고 심지어 좌익관계자의 가재(家財)를 파괴하는 테러를 일삼기도 했다.

    군정재판은 10월12일부터 대구경찰서에서 열렸다. 일반 군정재판의 경우 선고할 수 있는 최고 형량이 징역 5년이었으므로 특별군정재판을 열어 최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사형 선고는 경찰관 사상자를 많이 낸 화원, 하빈, 영천 사건 주동자들에게 내려졌다. 이들은 이듬해 6월까지 길고 지루한 재판 끝에 대부분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광복 후 최초의 동족상잔이자 좌우의 유혈충돌인 ‘10·1사건’은 4년 후 다시 대규모 광포한 학살로 이어졌다. ‘10·1사건’에 연루돼 형무소나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1950년 6·25 전쟁을 전후해서 달성군 가창골에서, 경산의 코발트광산에서, 수감 중인 형무소에서 살해됐다. 더 심하게는 경찰청 담벽에 세워졌다가 가마니에 덮인 시체로 변했다. 이때 죽은 사람이 수천명에 달했다.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田鉉秀
    ●1960년 출생
    ●성균관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 석사(국사학),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 아시아아프리카대학 박사(역사학)
    ●국무총리실 한민족연구발전 위원회 전문위원, 외교통상부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전담심사반 민간위원 역임
    ●現 경북대 사학과 교수 (한국현대사, 북한현대사 전공)
    ●저서 : ‘소련군정 시기 북한의 사회경제개혁’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공저) ‘북한현대사’(공저) ‘쉬띄꼬프 일기’(역서)


    대구에서 시작된 ‘10·1사건’은 경북, 경남 등 영남지방에 이어 전남북, 경기, 충청, 강원 등 남한 전역으로 파급됐다. 10월 초순을 정점으로 11월말까지 간헐적으로 지속된 이 사건을 좌익은 3·1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10월인민항쟁’이라 이름 붙였다. 반면 우익은 이 사건을 ‘폭동’이나 ‘소요’로 불렀다. 한편 사건 직후 대구지방의 언론은 ‘10·1사건’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썼다. 폭풍의 10월이 지나간 지 60년이 되는 올해 이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1946년 10월 말 브라운 소장과 여운형, 김규식이 공동의장으로 참여한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는 ‘10·1사건’이 경찰에 대한 반감, 군정 내 친일파의 존재, 일부 한국인 관리의 부패, 파괴분자들의 선동 탓에 일어났다고 결론지었다. ‘10·1사건’이 미군정의 정책파탄에 따른 한국 민중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사태를 살육과 파괴로 몰고 간 책임은 ‘신전술’로 기울어 잘못된 정책을 채택한 조공에 있다는 것이다. ‘10·1사건’은 좌우합작보다는 좌우대립과 보복학살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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