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윤일영 전 육본 인사참모부장의 작심 토로

“2004년 진급비리 수사는 다음 정권이 진실 밝혀야 할 첫 번째 과거사”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7-06-05 18: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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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사 막사 지을 예산 전용해 계룡대에 대통령 별장 지어
    • 규정대로 콘도 이용하랬다고 화낸 고위 인사
    • 군부, NSC의 심리전 장비 철거 지시에 격렬히 반대
    • NSC가 학자들에게 남북군사력 비교를 맡긴 의도
    • 청와대 문서 보이며 기무사령관에게 ‘재인사’ 지시한 장관
    • 정중부 발언과 괴문서 수사는 흐지부지
    • 남재준 총장, 계룡대 내려온 차관보와 설전
    • 분노한 합참의장 지시로 헬기 돌린 진급 심사위원
    윤일영 전 육본 인사참모부장의 작심 토로
    2004년 3월12일 국회의 탄핵안 가결로 직무를 정지당한 노무현 대통령은 5월15일 헌법재판소의 기각으로 직무를 재개하며 정권 유지책을 강화했다. 그동안 실시하지 못했던 정책들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인 것인데, 안보분야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노 정부의 안보분야 개혁은 과거의 개혁과 다른 것이 많아 육군으로 대표되는 군부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로 인해 청와대와 육본 사이에 한랭전선이 형성됐다.

    이러한 때인 2004년 11월22일 아침, 국방부 앞에는 그해 10월에 있었던 대령→준장 진급 심사를 비난하는 괴문서가 뿌려졌고 오후에는 국방부 검찰단(군 검찰단)이 진급 심사를 한 육본을 압수수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남재준 육군 총장(육사 25기)이 전역지원서를 제출하며 반발했고 이 수사는 대어를 낚지 못한 채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2004년 육본 인사참모부장(인참부장)이던 윤일영 예비역 소장(육사 29기)은 이 갈등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를 만나 당시 육본과 청와대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의 정체를 들어보았다.

    전방 부대 사단장을 하던 그가 인참부장에 취임한 것은 2004년 3월이었다. 인참부장은 복지시설인 콘도와 골프장도 관리한다. 콘도는 휴가 때인 여름철 사용 신청이 폭주하는데, 계급사회이다보니 하급자는 콘도 이용권을 잡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부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담당 장교가 ‘성수기 때 신청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콘도는 3%에 불과하다. 빈 방은 3개인데 신청자는 100명이나 몰리는 것이다. 때문에 공평한 혜택을 주는 규정을 만들어놓았지만, 고급 간부들에겐 적용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할당된 횟수 이상으로 콘도를 사용한다. 그리고 본인이 와야 빌려줄 수 있는데, 가족이나 친지만 보내 콘도를 이용케 하는 경우도 많다’고 보고했습니다.

    그 즉시 ‘고급 간부들도 규정에 따라 정해진 횟수에 한해 콘도를 이용하게 하라. 본인이 오지 않는다면 콘도를 내주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 총장이 있는데 왜 부장이 결정을 내립니까.

    “인참부장 전결사항이기 때문입니다.”

    ▼ 지시한 대로 돌아가던가요.

    “그해 여름 저는 콘도 예약을 못했어요. 대천에 있는 육군 콘도에 텐트장도 있는데, 콘도를 못 구한 사람은 텐트장을 예약해 쓸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막내가 초등학생이라 ‘바닷물에 들어갔다오게’ 해주자는 생각에 대천에 갔더니, 텐트장도 다 예약돼서 빌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돌아가고 있던데요.”

    ▼ 그 지시 때문에 군 최고위 인사와 갈등이 있었다고요.

    “콘도 운영을 규정대로 하라고 한 후 고급 간부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 계신 A 고위인사가 올라오라기에 갔습니다. 그분께서는 바빠서 가시지 않고 가족을 위해 콘도를 예약하려고 했는데 실무자들이 안 된다고 한 모양입니다. 제가 모든 장교와 부사관이 고루 혜택을 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설명 드렸지만, 분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그때 B 고위 인사가 볼일이 있어 국방부에 왔다가 동기인 이분의 방에 오셨습니다. 분위기를 파악한 B 인사는 A 인사에게 ‘이보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름휴가를 간 적이 없네. 그래도 이번엔 가족들을 휴가 보내줘야겠다 싶어 콘도를 예약하라고 했더니 본인이 오지 않으면 줄 수 없다고 하더군. 우리 같은 간부가 콘도를 예약하지 못하는 것이 군이 바로 서는 것 아니겠나’라고 했습니다.”

    콘도, 골프장 무단 이용 제한해 갈등

    윤일영 전 육본 인사참모부장의 작심 토로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

    ▼ 골프장 문제로도 간부들과 마찰을 빚었죠.

    “담당 장교가 골프 치는 데 문제가 많다며 골프장 출입기록을 보여주는데, 한 달에 열 번 이상 치는 사람이 있습디다. 이 팀에 꼈다가 저 팀에 끼는 식으로. 그래서 몇 회 이상은 치지 못하도록 규정을 바꾸게 했습니다. 계급이 높다고 해 정해진 횟수 이상으로 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해 복지근무단에 치고 싶은 사람이 직접 예약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게 했습니다.

    전역하신 분들의 부킹 부탁도 큰 부담입니다. 그래서 총장비서실은 언제라도 부킹할 수 있는 예약권을 갖고 있는데 남 총장은 이를 모두 반납했습니다. 남 총장은 ‘지휘관에게 부관과 운전병을 배치해준 것은 지휘관이 본연의 임무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골프와 콘도 이용은 지휘관 본연의 임무와 관계없으니 이것은 공정하게 배분해야 한다’는 말로 저를 격려하셨습니다.”

    ▼ 두 분은 골프를 안 치시는 모양이죠.

    “남 총장은 ‘군대는 국민의 돈으로 움직이는 조직이고, 전방에서 병사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하면서 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준장이 된 후 다섯 번 정도 쳐본 것이 전부입니다. 주한미군을 보면 영관 이상급은 바빠서 못 치고, 위관장교나 부사관들이 주로 즐깁니다. 한미연합사령관도 유럽에 근무할 때 바빠서 한 번도 못쳤다고 하더군요.”

    이 무렵 국방부는 계룡대에 대통령 별장을 건축하는 건을 검토했다. 기자는 이 사건을 다른 루트로 추적해 ‘주간동아’ 2005년 6월7일자에 보도한 바 있는데 요약하면 이랬다.

    16대 대통령선거가 있기 전 충북도의 일부 주민이 “대청호를 개발하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수 있는데, 특별경비 시설인 청남대가 있어 개발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며 청남대 폐지를 주장했다. 이에 노무현 후보는 청남대 반환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취임 한 달 후쯤인 2003년 4월17일 청남대를 충청북도에 넘겨주었다.

    “청남대 반환했으니 계룡대에 별장 지어야”

    노 대통령은 골프를 매우 좋아한다. 청남대에는 골프장이 있는데 청남대 반환으로 이 골프장을 이용하지 못하게 된 노 대통령은 계룡대 골프장을 찾았다. 취임 첫해인 2003년 8월3일부터 6일까지 노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대전 유성온천에 있는 군 휴양시설인 계룡스파텔에 머물며 세 차례 계룡대 골프장을 찾았다.

    노 대통령이 돌아간 후인 8월9일 계룡대 골프장 탈의실 관리인인 성모씨(당시 34세)가 탈의실에서 쓰려져 며칠 후 숨졌다. 성씨는 노 대통령이 온다고 해 2~3주 전부터 쉬지 못하고 대통령 맞을 준비를 했다고 한다. 2004년 초 성씨의 부인은 ‘남편은 대통령 방문 2주 전부터 오전 3시30분에서 오후 9시까지 근무했다. 목욕탕 천장과 벽에 낀 곰팡이를 제거하는 날이면 소독약품이 눈에 들어가 벌겋게 충혈돼 고통을 겪었다. 남편은 점심도 10~15분 만에 먹어야 했다’며 이런 내용이 담긴 진정서를 청와대로 보냈다.

    ‘대통령님, 제 남편을 돌려달라고 매달려 애원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많고 많은 곳 중에서 왜 하필 계룡대를 찾으셨나요.’

    그로부터 1년 후인 2005년 1월21일 군은 계룡대에 대통령 별장을 짓기 시작해 6월30일 공사를 완료했다. 문제는 이 별장 공사에 들어간 예산이었다. 이 공사에 소요된 73억원의 예산에 부여된 예산항목코드는 1307-217-404인데, 이 코드는 육군의 최전방 작전부대인 3군에서 장병용 막사와 화장실 목욕탕 급수시설을 짓는 데 쓰도록 용도가 한정돼 있었다. 전방부대 장병용 막사를 짓는 예산을 전용해 대통령을 위한 별장을 지은 것이다. ‘왜 이렇게 별장을 지었는가’란 기자의 질문에 당시 국방부 측은 이렇게 해명했다.

    “3군 청사가 있는 계룡대는 1987년 7월 완공됐는데, 그때 3군 총장 관사와 전시(戰時)에는 대통령 유숙 시설이고 평시에는 대통령 별장으로 쓸 수 있는 건물도 함께 지었다. 이 건물은 앞에 큰 연병장이 있는 ‘축소된 청와대’ 형태였으나, 역대 대통령들은 이곳을 찾지 않았다. 이유는 6년 앞선 1983년 12월 완공한 청남대가 훨씬 더 아늑해 역대 대통령들은 그곳에 머물며 골프를 치셨다.

    이로써 대통령 별장이 무용지물이 되자 육군 총장이 이 건물을 공관으로 사용하고, 육군 총장 공관은 차장이 쓰게 됐다. 계룡대는 육군이 지은 것이라 육군 총장이 대통령 별장으로 공관을 옮겨간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계룡대를 찾아와 골프를 치는 일이 잦아지자, 대통령이 쉴 공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됐고 대통령 별장을 차지한 육군이 대통령 별장을 지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연말이 되면 남는 예산이 생겨나는데, 국방부는 육군의 남는 그 예산을 우선 조치해서 대통령 별장을 짓게 했다.”

    기자가 우선조치와 전용(轉用)이 어떻게 다르냐고 따지자 이 관계자는 “사실상 똑같다”고 시인했다. 육군의 불용 예산으로 대통령 별장을 지은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막사 지을 예산으로 지은 것은 사실”

    ▼ 육군 인참부장이면 병영시설 짓는 자금이 전용되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요.

    “예산 전용 부분은 전혀 몰랐습니다. 계룡대 골프장 직원이 사망하고 그 부인이 소송을 내 법원이 과로사가 입증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후 청와대 관계자가 몇 번 찾아와 ‘육군 총장 공관은 원래 대통령 별장이었으니 그것을 내달라’고 하는 바람에, 청와대가 계룡대에 대통령 별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에 대해 저는 ‘그런 지시는 말이 안된다. 휘하 연대장 관사가 강가의 경치 좋은 곳에 있다고 해서, 사단장이 휴가를 즐겨야겠으니 그 공관을 내놔라 한다면, 연대장과 연대 병사들이 사단장을 어떻게 보겠는가. 그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면 어떤 부하도 사단장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거절의 뜻을 전했습니다. 남 총장을 만나 물어보니 총장께서도 ‘윗분에게 누를 끼칠 수 있는 것이라 들어줄 수 없다며 잘랐다’고 했습니다.”

    ▼ 그렇지만 그 별장은 완성됐습니다.

    “남 총장이 퇴임하기 직전인 2005년 4월1일,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는 숫용추 계곡 쪽으로 구보를 나갔는데 계곡 안쪽에 ‘병영시설 개선공사’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가림판 안에서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뭐야. 계룡대 안에 내가 모르는 공사가 있나’ 하고 현장 사무소로 들어가 인참부장이라고 밝혔더니, 한 장교가 알아보고 ‘대통령 별장을 짓는 공사입니다. 이 공사는 국방부에서 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왜 병영시설 개선공사란 간판을 붙여놓았나’라고 물으니 그는 ‘병영시설 개선공사 예산으로 건축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 이 공사와 관계된 장교들이 찾아와 ‘미리 보고를 못 드리고 공사하게 돼서 죄송하다. 국방부 지시로 공사를 하게 됐다. 공사비는 병사들 막사를 짓기로 한 예산에서 조금씩 염출했다’는 설명을 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병사들 막사 지으라는 돈으로 별장을 짓는다고?’하며 야단을 쳤습니다. 그때 나는 ‘이 별장은 두고두고 장교들의 조소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2004년 5월26일과 6월3일 남북한은 장성급회담을 열고 휴전선에서의 심리전 중단에 합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상당수 장교는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심리전을 왜 포기하냐며 반발한 것으로 압니다.

    “합참과 육해공군 모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왜 심리전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게 됐는지 정말 답답합니다.”

    ▼ 그 회담에서는 서해 NLL(북방한계선)에서 남북한 해군이 우발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교신방법에 대한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7월14일 북한 경비정이 거짓 내용이 담긴 송신을 일방적으로 보내고 NLL을 넘었고, 이에 우리 초계함이 경고사격을 하자, 북한은 남측이 NLL 교신 합의를 어겼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런데도 NSC(국가안전보장회의)는 우리 쪽이 허위사실을 보고한 것으로 보고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합참 정보본부장인 박승춘 중장이 일부 언론에 진실을 알린 것이 밝혀져 퇴임하게 되었죠. 당시 육군 수뇌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박 장군은 직을 걸었던 용기 있는 분입니다. 연평해전의 승리와 우리 고속정이 침몰한 서해교전을 기억하며 씁쓸해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정중부의 난’ 발언의 진실

    ▼ 그리고 7월28일 노 대통령은 조영길 장관을 퇴임시키고 윤광웅 대통령 국방보좌관을 새 장관에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윤 장관을 임명하기 전 노 대통령은 남 총장에게 국방장관을 맡아달라고 제의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윤일영 전 육본 인사참모부장의 작심 토로

    군 검찰의 진급비리 수사로 기소된 실무 장교들이 군사법원에 출두하고 있다.

    “그 부분은 제가 대답할 사안이 아닙니다.”

    ▼ 2004년 9월3일자 내일신문에 남 총장이 ‘정중부의 난’을 거론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 기사의 서두는 남 총장이 육본 간부회의에서 “나는 어차피 문제가 되면 사표 쓰고 아무 때나 나갈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 무슨 문민화냐. 옛날 정중부의 난이 왜 일어났는지 아느냐. 뭘 모르는 문신들이 (무신들을) 무시하고 홀대하니까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군 검찰 독립은 무슨 황당한 얘기냐. 이는 인민무력부 안에 정치보위부를 두자는 것으로 북한식과 똑같다. … 난 이거 용납 못한다. … (한 참석 간부에게)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고 이걸 막아라. 관련 의원을 따라다니며 로비를 해라. 못 막으면 이번에 진급은 없다. 만일 제도개선이 이뤄지면 법무 병과는 폐지해야 한다. … (또 다른 참석 간부에게) 성우회를 찾아가 로비를 해라.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그들의 힘으로 막아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 보도가 사실입니까.

    “그 보도가 있기 3일 전인 9월1일 한 국방부 출입기자가 전화로 ‘금주 주간상황회의에서 육군 총장이 국방부의 문민화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는가’라고 물어왔고, 이어 국방부 대변인도 ‘육군 총장이 주간상황회의에서 정중부의 난을 발언했느냐’고 물어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내일신문 보도가 나온 것입니다.

    그 주의 주간상황회의는 8월30일에 열렸는데, 늘 그렇듯 저는 회의에서 오고간 내용을 메모했습니다. 그리고 회의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 그 메모를 복사해 인사참모부의 처장과 과장들에게 돌렸습니다. 서로 바쁜데 회의를 열어 상황회의 내용을 전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내일신문 보도가 터져 기자실에 갔더니 내 수첩 복사한 것을 공보관실과 기무사도 갖고 있었습니다.

    기무사는 남 총장 발언에 대한 조사를 했는데 그런 사실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제 메모를 증거로 들고 청와대에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기자실에서 제 메모를 보이며 남 총장이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 그러면 누가 내일신문 기자에게 ‘정중부의 난’ 운운하는 이야기를 해줬을까요.

    “윤광웅 장관께서 분명히 조사하겠다고 했는데 결과를 내지 않고 흐지부지 끝냈으니 알 수가 없죠.”

    ‘정중부의 난’ 사건을 계기로 육본과 청와대는 분명히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기자는 이 문제를 좀더 깊이 알아보기 위해 송영근 당시 기무사령관과 전화 통화를 해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매년 9월10일쯤이면 국회의 국정감사가 시작되므로 8월말쯤 나는 최재천 의원을 포함한 국회 국방·법사위원들을 찾아가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국회 연락장교들과 식사하러 갔는데 최 의원이 전화를 걸어와 ‘남 총장이 정중부 발언을 했다는데 알고 있느냐’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라고 했더니 최 의원은 ‘사실 관계를 확인해서 알려달라’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즉각 조사를 시키니 주간상황회의를 녹화하거나 녹음한 것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회의 내용을 적은 것이 있는가 알아보니 윤 부장과 참모차장 수석부관, 그리고 공보관의 메모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윤 부장의 메모가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세 메모 어디에도 정중부는커녕 그와 유사한 발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었습니다. 물론 참석자들을 상대로 탐문해보았지만 역시 ‘없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사가 끝나갈 때 내일신문 보도가 나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군 사법개혁 놓고 군 법무관과 대립

    다시 윤 장군과의 문답이다.

    ▼ 그 사건이 있기 전 군 검찰과 남 총장 사이에 대립이 있었죠.

    “당시 정부는 사법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군 사법개혁도 대상이었습니다. 군 사법개혁은 군사법원의 판결을 지휘관이 감형(減刑)하는 관할권을 없애고 군 검찰을 국방부 직속 기관으로 만들자는 것이 핵심인데, 이에 대해 법무장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군인이 반대했습니다. 군대는 상명하복(上命下服) 개념으로 지휘하는 조직인데, 그 핵심 수단이 관할권인지라 이것을 없앨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군에 별도의 검찰청이 생기면 지휘권이 위축돼 유사시 제대로 싸울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군 사법개혁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실이 중심이 돼 추진했다. 국방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군무(軍務)회의다. 조영길 장관 시절 법무관리관실은 그들이 마련한 군 사법개혁안을 군무회의에 올렸다. 군무회의에 올라오는 안건은 위원들의 표결로 결정하는 의결사항과, ‘알고 있어라’는 뜻으로 보고만 하는 참고보고사항 두 가지로 나뉜다.

    법무관리관실은 군 사법개혁안을 ‘참고보고사항’으로 올렸다. 그러자 대부분의 참석자가 “이렇게 중요한 일이 어떻게 참고보고사항이냐”고 지적해, 몇 주 후 법무관리관실은 ‘의결사항’으로 바꿔 올렸다. 그러나 장관과 합참의장, 3군 총장 등 대부분이 반대해 의결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조 장관이 물러나고 윤 장관이 취임했다.

    ▼ 군 사법개혁에 반대하는 조 장관이 퇴임하고 청와대에 있던 윤 장관이 취임했으니 군 법무관들은 청와대와 협력해 군 사법개혁을 관철하려고 했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때부터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들이 나섰습니다. 그들이 계룡대의 3군 총장을 찾아와 군 사법개혁 취지를 설명했지만, 3군은 물론이고 합참도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청와대 비서관을 맞은 남 총장은 조곤조곤 논리적인 설명으로 청와대 비서관의 설득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 16대 대통령선거가 있기 전, 군 검찰은 병무비리 수사를 대대적으로 펼쳐 찬사를 받았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다음에는 민정수석실 제보를 토대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인 신일순 대장의 비리를 포착해, 2004년 5월8일 건군 이후 최초로 현역 대장을 구속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 후 사법개혁이 추진되자 군 법무관을 이끄는 수뇌부는 ‘사회에서는 검찰이 정보기관인 국정원과 수사정보기관인 경찰을 지휘하는데, 군에서만은 국정원에 해당하는 기무사와 경찰에 견주는 헌병이 군 검찰보다 세다며, 군 검찰을 독립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나눴답니다. 또한 일부 장교들은 국회의원 C씨 등을 만나 남 총장이 군 개혁에 반대한다며 남 총장의 행위를 정중부의 난에 빗대어 대화를 했는데, 이것이 와전돼 육군 상황회의에서 남 총장이 문제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정보를 제공한 관계자는 이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시각·장소까지 정확히 꿰고 있던데요. 당시 육본도 이러한 정보를 갖고 있었죠.

    “그것은 사건의 한쪽 당사자인 육군이 아니라 제3자이자 상급 기관인 국방부가 명확히 조사해서 가려야 시비가 없는 것 아닙니까. 내일신문 보도가 있은 후 윤 장관은 면밀하게 조사하겠다고 하곤 결국 흐지부지 조사를 끝내버렸습니다.”

    ▼ 내일신문 보도가 오보라면, 왜 육군은 법적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까.

    “법적 대응보다는 국방부가 허위내용을 유포한 자부터 먼저 잡는 것이 순서 아닌가요? 모두가 알고 있는 자들을 잡지 않은 이유는 언젠가 밝혀질 것입니다.”

    남북한 군사력 비교 파문

    ▼ 조 장관 시절인 2004년 초여름 NSC는 국방연구원에 남북한 군사력 비교를 하게 해 파문을 일으켰죠.

    “윤 장관이 계룡대를 초도 순시할 때 군사력 평가에 민간 엘리트들을 참가시키라고 해 장군들이 놀랐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가 학자들에게 군사력 비교를 맡깁니까. 상대 전력에 대한 정보는 공개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정보기관이 구해오는 것이기에, 정보기관에서 비교합니다. 냉전시기 미소 간의 군사력 비교도 CIA나 DIA(국방정보본부)가 했습니다.

    NSC는 ‘1974년부터 방위력 개선 투자를 해왔는데 왜 우리 군사력이 북한에 뒤지는가’ 하는 의문에서 국방연구원에 건국 이래 최초로 남북군사력 비교를 맡겼습니다. 국방연구원은 정보가 없으니 필요한 정보를 합참에 요구했는데, 합참의 영관급 장교들이 그 의도를 알아채고 NSC 측과 육두문자를 써가며 싸웠습니다.”

    기자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추적 취재했다. 국방연구원은 미국 랜드연구소가 개발한 모델로 비교를 했는데, 그 결과 한국은 공군력에서 월등히, 해군력에서 근소하게 앞서고, 육군력에선 상당히 처지는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 비교는 핵과 화생방무기를 빼놓고 한 것으로 밝혀져 합참과 3군 본부가 들끓었다. 윤 장군의 설명이다.

    “각군의 반대가 하도 심하니 국방연구원 책임자가 육본에 와서 설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비교를 했는데 한국이 공군은 약간 세고, 해군은 약간 열세, 육군은 상당히 열세인 것으로 나왔습니다.”

    ▼ 그러한 갈등 속에서 윤 장관이 취임했지요. 육본은 윤 장관을 주의 깊게 지켜봤겠네요.

    “8월9일 계룡대 초도순시를 한 윤 장관은 ‘군은 새 정부의 합법적인 정책을 따라야 한다. 국방정책이 결정되면 불만이 있을 수 있으나 군에 있는 동안은 그 불만을 토로해서는 안 된다. 군인사법을 재검토하겠다. 군사력 평가는 문민 엘리트들이 하도록 하겠다. 국방부는 군 조직이 아니라 정부 조직이니 문민화를 지속하겠다’는 것 등을 강조했습니다. 육군으로서는 주목할 내용이 많았습니다.”

    ▼ 장관이 군인사법 재검토를 거론했습니까. 윤 장관의 초도순시 후 정중부 발언 보도가 있었고, 이어 문제의 대령→준장 진급 심사가 있었군요. 자료를 보니 10월5~7일 갑·을·병 추천위가 진급시킬 장교를 추천하고, 8일에는 선발위가 이를 확정짓고, 9일엔 남재준 총장이 서명함으로써 육군의 장군 진급자 추천이 마감됐더군요. 이 심사를 앞두고 남 총장이 내린 지시는 무엇이었습니까.

    “남 총장은 저를 인참부장에 임명하면서 ‘인사는 공정하고 투명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참부장이 진급 문제에 관한 여론을 수렴한다며 주요 지휘관을 만나고 다니면, 많은 장교가 인사참모부장을 만나려 하게 되고 그에 따라 이상한 소문이 돌게 된다. 각 지휘관은 인사 평정과 지휘관 추천만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게 하는 것이 인사 군기다. 군 인사법령에도 그렇게 하라고 돼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남 총장의 지시였던 셈이지요.”

    ▼ 인사참모부에서 진급 업무를 담당했던 장교들은 진급 심사철이 되면 인사참모부장이나 인사관리처장(준장)이 주요 지휘관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2004년 심사 때는 그러한 의견수렴을 진짜로 하지 않았습니까.

    “진급심사 때 저와 인사관리처장은 차기 총장 후보인 1, 2, 3군 사령관이나 연합사 부사령관, 기무사령관을 포함한 그 어떤 지휘관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부서(副署) 거부한 합참의장

    ▼ 주요 지휘관의 의견을 무조건 받지 않겠다는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군인사법에 지휘관은 인사 평정과 지휘관 추천만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게 돼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추천해야 문서로 기록이 남아 법치가 이뤄집니다. 인참부장을 만나 구두로 부탁하는 것은 전형적인 인치입니다. ‘기록 따로, 청탁 따로’ 하는 지휘관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지휘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법대로 하자는 것이 개혁이지, 법을 지키지 말자는 게 개혁입니까?”

    ▼ 총장이 서명한 육군의 진급추천은 국방부 장관에게 보내 제청을 받아야 하지요. 장관 제청을 받기 전 김종환 합참의장과 심각한 충돌이 있었지요. 합참의장은 장관에게 보내는 진급추천서에 부서(副暑)해야 하는데, 김 의장은 처음엔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육군에서 진급 추천자를 확정지으면 국방부 장관의 제청을 받기 위해 우리가 서울로 올라옵니다. 10월12일 국방회관에 임시 진급업무 사무실을 만들고 제청심의회를 하는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자료가 있으면 제공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1시40분쯤 부서를 받기 위해 합참의장을 찾아갔는데 의장께서 합참의 진급자가 적다며 격노하셨습니다.

    진급은 공석(空席)이 있어야 이뤄집니다. 공석은 병과별 출신별로 할당됩니다. 육군과 합참 국방부 연합사에도 균등하게 배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올해 보병 공석이 두 자리라면, 육군에서 육사 출신 보병 한 명을 진급시키고, 합참에서는 비육사 출신 보병 한 명을 진급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국방부와 연합사에서는 진급자가 나오지 못하니 다음해에는 육군과 합참에는 공석을 주지 않고 국방부와 연합사에 근무하는 보병에게 육사와 비육사를 나눠 공석을 할당하는 것입니다. 추천위와 선발위는 공석이 있는 곳에서 진급자를 뽑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드렸는데도 김 의장은 노기를 풀지 않아 서명을 받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심사위원장이 윤 장관에게 진급심사 결과를 보고했는데, 의장 서명이 없는 것을 본 윤 장관이 전화로 김 의장을 불러 서명하게 했습니다.”

    추천자 바꾸라는 청와대 문서

    다음날인 13일은 청와대를 대신한 국방부와 육본 사이에 대충돌이 일어난 날이다. 이날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전해철 비서관이 윤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어 강호식 국장이 윤 장관을 만나고 돌아갔다. 기자는 두 사람에게 왜 윤 장관에게 전화를 걸고 찾아갔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전 비서관은 “전화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강 국장은 “방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변한 바 있다. 강 국장이 돌아간 후 윤 장관은 바로 송영근 기무사령관을 호출했다. 송 전 기무사령관은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오후 3시쯤 윤 장관이 ‘기무사가 추천한 진급자 세 명을 전부 바꿔야겠다’는 전화를 주셔서 깜짝 놀라 달려가니, 장관 방에 윤 장관과 유호열 차관, 김승열 차관보, 김 의장이 계셨습니다. 윤 장관은 구두 지시를 하고 있었고 김 차관보는 이를 5~10분간 받아적더니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윤 장관은 제 앞으로 문서를 내밀며 ‘청와대에서 기무사 추천자를 바꿔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알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서 내용이 금시초문의 것들이라 ‘이것을 이유로 세 명을 다 바꾸라고 한다면 기무사가 부적절한 추천을 한 것이 되니, 제 영(令)이 서지 않습니다. 사령관은 있으나마나한 상황이 되니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윤 장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셔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명령입니까? 승복하진 못하나 명령이라면…’이라고 했더니, 장관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있고 유호열 차관이 ‘명령으로 알고 조치를 취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표를 내겠다는 생각으로 ‘승복 못 합니다’하고 장관 방을 나왔는데, 유차관이 따라 나와 저를 차관 방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 ‘사의를 표하는 것을 보고 당신을 다시 보았다. 훌륭하다. 그러나 사표를 내면 핵폭발이 일어난다. 지금은 사표를 낼 때가 아니다’라고 설득하셨습니다. 당시 기무사는 육군 2명, 공군 1명을 준장 진급자로 추천했습니다. 저는 계룡대로 전화를 걸어 육군과 공군으로 하여금 심사위를 열어 세 명을 탈락시키고 청와대가 원하는 다른 세 사람을 추천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기무사로 돌아와 청와대 문건을 조사해보니 육군 1명에 대한 혐의는 사실무근이고 또 한 명의 것도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다음날 장관에게 보고했더니, 장관은 ‘청와대와 협의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명에 대한 정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분명히 밝혀져 육군은 그를 재추천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저는 저는 임기를 채우지 않고 기무사를 떠나게 됐습니다.”

    계룡대 찾아온 국방부 차관보

    기무사와 국방부가 갈등하던 시간 육본과 국방부는 격렬하게 맞붙었다. 윤일영 장군의 말이다.

    “국방부는 진급심사 초기부터 ‘육군 추천자를 150%나 120%로 올려라’고 요구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요구이기에 ‘군인사법상 그렇게 할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13일 오후 4시33분경 국방회관 앞에서 우연히 김승열 차관보를 만나니 ‘장관 지시로 계룡대에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채 3분이 안 돼 남 총장이 ‘즉시 계룡대로 오라’고 전화 주셨기에 저도 내려갔습니다.

    김 차관보는 ‘해·공군 총장 공관을 거쳐왔다’며 저보다 늦게 육군총장 관사에 왔습니다. 그는 ‘이번 추천에 대해 청와대 인사위에서 하자가 있다고 한다. 우선 기무사에서 새로운 사람을 올릴 테니 육군은 다시 심의해 새로운 사람으로 추천해달라. 육군 추천자도 호남과 충청 영남 출신의 수가 균형을 이루도록 다시 추천해달라’라고 했습니다.

    이에 남 총장은 ‘하자가 있다면 절차에 따라 재심할 수 있으나, 하자가 없는데 지역 조정을 하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심사위원들이 공정하게 심사한 것을 특정지역 출신이 적다고 하여 다시 심사하는 것은 명분도 없고 법적으로도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 차관보는 윤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남 총장 의견을 보고하고, 남 총장을 바꿔주었는데 남 총장은 같은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래도 계속 김 차관보가 지역조정을 해야 한다고 해, 저는 ‘군인사법’이라는 책을 쓴 임모 중령을 불러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밤 8시2분쯤 공관에 온 임 중령은 ‘육군이 추천자 후보를 120~150%로 올리는 것은 군인사법 취지에 맞지 않고, 국방부는 육군이 추천한 사람에 대해서만 제청심사를 할 수 있다’는 의견을 올렸습니다. 그런데도 김 차관보는 한 명이라도 지역조정을 해야 한다고 해, 저는 심사위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9시16분쯤 심사위원들을 찾아갔더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며 반발했습니다. 이를 보고하자 남 총장은 ‘나도 심사위원들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김 차관보는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지역조정 하라” vs “못한다”

    ▼ 14일에는 더 이상 갈등이 없었습니까.

    “있었죠. 오전 7시30분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김 차관보가 ‘한 명이라도 지역조정을 해야 한다’는 전화를 걸어와 ‘심사위원들에게 지역조정을 강요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서울에서 국방부 인사국장을 만났을 때는 ‘특정인을 낙천시키고 지역 조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진급시키려면 제청위원회에서 낙천 사유를 밝혀야 한다. 사유가 불분명하면 파문이 일 수 있다’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 갈등은 오전 11시30분쯤 윤 장관이 지역 조정을 이유로 제청위원회를 열지 않겠다고 하고 제청 서명을 함으로써 일단락됐습니다. 그런데 장관 지시대로 육군 출신 두 명을 낙천시키겠다고 한 기무사가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청와대 인사위원회가 다시 검토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인사국장은 저녁 8시쯤 ‘기무사가 이의를 제기한 대로 될 것 같다며, 청와대 인사위원회가 끝나면 육군은 다시 추천을 해줘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습니다.”

    ▼ 장관이 제청 서명을 했는데 기무사 추천 때문에 육군은 다시 심사위를 연 것이네요. 그것은 절차 위반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뒤죽박죽이었죠.”

    ▼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니 군 인사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자리에 있으니 장군 진급자를 상대로 인사검증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대통령 참모들이 검증을 했다면 그 자료를 육군 심사위로 보냈어야 합니다. 군인사는 추천위와 선발위를 거쳐 각군 총장이 추천하고, 장관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재가하는 것으로 한정돼 있습니다. 각군 추천위와 선발위에서 심사한 것을 다시 청와대 참모들이 심사하는 것은 법 위반입니다. 청와대 참모들이 장관에게 압력을 넣는 것도 위법입니다. 육군에서 발견하지 못한 비리를 찾아냈으면 국방장관은 제청을 못하는 이유를 문서로 적어 육군에 보내 다시 심의하게 했어야 합니다.”

    ▼ 대통령 재가가 있던 15일 다시 합참의장과 충돌이 있었죠.

    “그날 오전 8시4분 김 의장은 전화를 걸어와 야전부대에서 당번병을 데려오려고 하는데 저 때문에 안 된다며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재가가 있은 후인 오전 11시39분 진급 문제로 다시 저를 찾기에 자세한 설명을 해드리기 위해 인사관리처장과 실무장교를 데리고 찾아갔습니다. 대통령 재가가 났으니 그때 심사위원들은 헬기나 자동차로 자기 부대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김 의장은 전화로 이들을 불러 당장 되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심사위원들이 방향을 돌려 되돌아오는 것을 제가 막아 돌아가게 했습니다. 김 의장은 너무 흥분해서 컵을 던지고 실무 장교를 걷어찼습니다.”

    분노한 합참의장

    ▼ 의장이 장교를 구타한 것은 불법 아닌가요.

    “당시는 병사가 병사를 구타해도 구속됐습니다. 대대장이 병사에게 심한 말을 했다고 해서 처벌을 받았는데….”

    이 건에 대해 김종환 전 합참의장은 “합참 근무자의 진급이 적어 화를 낸 것은 맞다. 그러나 발로 찬 것은 기억이 없다. 그때 일은 다 잊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윤일영 장군은 그가 겪은 일을 분 단위로 수첩에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그는 이 메모를 봐가며 당시에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구술했다. 그러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듯했다. 그와의 대화는 이쯤에서 접기로 했다.

    대통령 재가로 육군의 진급심사가 끝난 때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11월22일 오전 서울 국방부 서문 앞에 있는 국방 레스텔 지하에서 육군의 대령→준장 진급을 비난하는 괴문서가 발견됐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8시쯤 군 검찰이 육본 인사참모부 진급관리과에 수사관을 보내 진급 관련 서류를 가져가는 압수수색을 함으로써 ‘진급 비리 수사’가 시작됐다.

    이 수사의 요체는 남 총장이 자기 인맥을 위주로 진급시켰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 11월25일 남 총장은 자진해서 전역지원서를 냈는데 군 검찰 수사에서 남 총장 비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 듯 청와대는 이를 반려했다. 군 검찰은 남 총장은 물론이고 윤일영 부장도 기소하지 못하고, 인참부의 장교 4명만 ‘위계(僞計)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 등 진급비리 자체와는 관련이 적은 사안으로 기소했다.

    그러나 1심과 2심을 지나면서 일부 기소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나고 세 사람만 선고유예를 받아 대법원에 상고했다. 용두사미가 됐지만 그래도 군 검찰의 진급비리 수사는 기소를 했으니 끝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 장관 지시로 국방부 합조단이 수사에 들어간 괴문서 살포 사건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과거 군 수사기관은 하나회 명부와 나눔회 명부 등 괴문서를 작성한 사람을 대부분 찾아냈다. 그런데 유독 2004년 11월22일의 괴문서 작성자만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정중부 발언 조사도 흐지부지 끝내버렸다. 이 비밀은 내년에 출범할 차기 정부가 밝혀내야 할 첫 번째 과거사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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