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4월22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18대 국회의원 당선인과의 만찬에 앞서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 내외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李相得·73) 의원이 두 차례 내부 권력투쟁에서 판정승을 거뒀다. 총선 직전 ‘불출마’를 요구한 ‘55인 선상반란’을 뚫고 18대 국회에 입성한 데 이어, 정두언 의원의 ‘권력 사유화’ 파문도 잠재웠다. 동생인 대통령이 진화에 나선 뒤에야 거둔 신승(辛勝)이었다. 내상(內傷)도 입었다. ‘권력 사유화’ 논란 과정에 오른팔 박영준 비서관이 낙마했다.
여권 내부에서 치이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국민 여론도 심상치 않다. ‘형님내각’ ‘상왕정치‘에 이어 ‘모든 것은 형을 통하면 된다’는 ‘만사형통(萬事兄通)’이란 말까지 등장했다.그에게 그만큼 힘이 쏠려 있단 얘기다.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활동반경은 좁아들게 마련이다. 이상득 의원 스스로 인터뷰에서 “‘이력서’ 때문에 교회도 못 간다”고 밝혔다.
맑은 날이 있으면 궂은 날도 있고,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권력의 세계에서 ‘아우와 형’의 우애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알 수 없다. 100일 동안 고작 두 차례 기싸움이 벌어졌을 뿐이다. 이명박 정부의 임기는 앞으로도 1700여 일이나 남아 있다.
“국회의원으로 당선은 됐지만,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제 처지가 고통스럽습니다.”
5월17일. 광주를 방문한 이상득 의원은 한나라당 광주·전남 당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대통령의 형’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하는 고충을 토로했다.
두 번의 판정승
다음날인 5월18일 밤. 서울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에 친(親)이명박계 중진 및 핵심 의원 31명이 모였다. 이재오 전 의원을 7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내세우자는 논의를 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예정에 없이 이상득 의원이 참석하는 바람에 분위기는 ‘친목모임’으로 바뀌었다. 한 참석자는 “당초 취지와 달리 모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수유동 회동 이후 이재오 전 의원 측의 지원을 받아 원내대표 경선을 준비해온 정의화 의원이 중도하차했다. 독자적으로 당 대표 출마를 준비하던 안상수 의원도 경선 포기를 선언했다. 이상득 의원이 불쑥 나타나 던진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는 한마디에 ‘이재오 대표 추대’ 논의는 없던 일이 돼버렸다. 총선 직전 이상득 의원의 총선 불출마를 요구하며 ‘55인 선상반란’을 주도한 이재오 전 의원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다’는 그의 얘기는 현실과 다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구조다. 정두언 의원의 ‘권력 사유화’ 주장을 계기로 불붙은 제2차 파워게임에서 이상득 의원은 청와대 ‘왕비서관’으로 불리던 박영준 전 비서관을 잃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지막에는 이상득 의원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여전히 최고 권력의 균형추가 SD(이상득 의원의 영문 이니셜)에게 있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통령 아우가 공격받는 형의 손을 들어준 상황이지만,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에 이어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만 해도 늘 앞서 나간 것은 형인 이상득 의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둘째형은 우리 가족의 희망”이라고 표현했을 정도.
승승장구한 둘째형
1월30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 참석한 이상득 의원이 권철현 의원에게서 건네받은 이력서를 보고 있다.
“만나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집안에 일이 있지 않고서는 가끔 교회에서 시간을 맞추어 만나는 정도지요. 워낙 서로 일에 쫓기다 보니 통화조차 어려워요.”
코오롱 사장 시절이던 1982년, 이상득 의원은 ‘정경문화’ 인터뷰에서 동생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가끔 비즈니스에서 조금 관계를 갖지요. 그쪽도 건설회사를 하고, 우리 그룹도 건설회사가 있으니 중개역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경영자로서 경영기법은 서로 달라 전혀 도움을 주고받지 못합니다.”
당시는 재계가 형제 CEO 출현에 높은 관심을 보인 시기였다. 그럼에도 정작 당사자였던 이상득 의원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경쟁의식이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노사관계’를 얘기하다 이 의원은 “능률도 중요하지만 우리 회사의 인사방침은 철저한 연공서열에 두고 있습니다. 어떤 회사처럼 능력 있다고 30대에 사장을 시킨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특정 회사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다분히 이명박 대통령이 30대에 사장에 오른 현대건설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동지상고 수석 졸업, 육사 입학과 중퇴. 그리고 서울대 상대 입학과 코오롱 입사까지. 세 형제 중에 가장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으며 성장한 이상득 의원에 대한 집안의 기대는 유달리 컸다.
이와는 달리 이명박 대통령은 부모의 관심 밖에 있었다. 자서전에서 이 대통령은 “이 의원이 육사를 중퇴하고 다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바람에 가정형편은 더욱 쪼들렸고, (이 대통령은) 고등학교 진학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정경문화’ 인터뷰에서 이상득 의원은 동지상고를 다닌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동지상고보다 포항고교가 더 나았지요. 그런데 아버님이 동지상고의 재단이사로 계셔서 저희 3형제는 모두 동지상고를 나왔습니다.”
이 대통령 자서전에 기록된 고등학교 진학을 둘러싼 에피소드와, 아버지가 동지상고 재단이사를 지냈다는 이 의원의 인터뷰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군 인맥도 형에게 의존
육사에 진학한 이상득 의원은 2학년 때 운동을 하다 팔을 다쳐 중퇴했다.
“류머티즘 관절염이어서 장기 치료가 필요했지요. 그래서 1년간 휴학했어요. 육사는 상급생에게 경례를 엄격하게 해야 하는데 (동기들에게) 1년 뒤떨어지니 도저히 못 견디겠더군요.”
이 의원이 밝힌 육사 중퇴 이유다. 육사 중퇴 후 6개월간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 상대에 입학했다. 육사 중퇴 이력은 지난 대선 때 위력을 발휘했다. 질병으로 군 면제를 받은 이명박 후보의 약점을 덮는 데 도움이 됐던 것.
노태우 정부에서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종구 한국안보포럼 회장은 대선 기간에 이명박 캠프의 국방정책자문특별위원장을 맡았다. 이 회장이 캠프에 참여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상득 의원과 육사 동기라는 인연 때문이었다.
육사를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이 의원은 육사 동기(14회)들과 꾸준히 교류해왔다. 1980년엔 동기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종구 회장은 “(이상득 의원과) 사관학교 시절에는 잘 몰랐다”고 했다. 단지 건강상 이유로 중퇴했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후 육사 14기 동기 모임을 통해 교류하게 됐고, 이 의원이 국회에 입성한 이후에는 의정활동에 도움을 주면서 더욱 가까워졌다고 했다.
이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뒤인 지난해 12월29일 성우회(군 장성 출신들의 모임) 선거에서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명박 정부의 군 인맥이 이종구 성우회장과 이상득 의원을 거쳐 대통령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비록 권력 내부투쟁에서는 대통령인 동생의 도움으로 신승을 거뒀지만, 강부자·고소영 내각에 대한 부담마저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이 의원 스스로 ‘형님내각’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업무 연속성’ 중시하는 인사원칙
“이재오 떠납니다.” 한나라당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5월26일 오전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그 옆에서 환송 나온 부인 추영례씨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권 의원은 그 자리에서 이 의원이 가리킨 인사의 이력서를 건넸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이 의원은 이력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한 달 뒤 발표된 차관급 인사 명단에 이력서의 주인공이 포함돼 있었다. 교육과학기술부 제2차관에 임명된 박종구 차관이었다. 박 차관의 임명은 ‘형님내각’ 논란의 불씨가 됐다.
김주성 국정원 기조실장 임명은 형님내각 논란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김 실장 임명을 두고 당시 여권에서는 “이상득 의원이 몸담았던 ‘코오롱’ 출신이란 점을 빼면 임명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말들이 나왔다. 자연히 이 의원 작품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김 실장은 이 의원이 코오롱 사장을 지낼 때 회장 비서실장으로 사장단 회의 등을 통해 자주 접한 사이다.
코오롱 공채 1기로 이상득 의원과 입사동기인 나공묵 코오롱그룹 고문은 “김주성 실장은 회장 비서실장이었고, 이 의원은 사장이었다”며 “사장단 회의에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이 의원과 김 실장 모두 코오롱 퇴직 임원 모임인 송죽회 회원이라는 것도 자주 접촉하는 기회가 됐다. 노 고문은 이상득 의원을 “부하 잘 챙기고, 대외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이 의원은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과는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그가 몸담았던 코오롱그룹 이동찬 회장이 세워놓은, ‘고의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절대로 목을 자르지 않는다’는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같은 인사원칙이 ‘형님내각’으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형님내각’의 연원을 이 의원이 정책위의장을 지낸 1996년 신한국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찾기도 한다. 당시 이 의원에게 보고했던 중앙부처 간부 상당수가 이명박 정부 초대 내각에 포함됐다는 점에서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 유명환 외교부 장관이 대표적인 사례로 이들은 당시 각각 재경부 차관과 건교부 기획관리실장, 외교부 북미국장으로 당정협의에 참석한 중앙부처 간부들이었다.
이력서 1000건의 역설
6선을 하는 동안 사무총장을 두 차례 역임한 이 의원은 사무처 인사에서도 ‘교체 최소화’라는 인사원칙을 이어갔다. 이 의원이 사무총장을 할 때 한나라당 사무처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이상득 사무총장은 인사의 안정성과 업무의 연속성이 더 중요하다며 총장 부임 이후 사무처 직원 인사를 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무총장이었다”고 했다.
‘권력 사유화’ 파문이 한창이던 6월9일 이상득 의원은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사람 하나 소개했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 동생에게 내가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큰소리 못한다. 동생이니 내가 잘못하면 위신이 안 서 조언을 하지 못한다. 30년간 조직생활하며 큰 원칙을 지켰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생이) 대통령 되면서 (내게) 들어온 부탁이 1000건은 된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교회를 못 간다. 이력서가 들어와서”라고 했다. 인사에 개입한 사실이 없음을 거듭 강변하며 ‘권력 사유화’ 주장을 강하게 반박한 것이다. 그러나 ‘이력서 1000건’ 언급은 역효과를 낳았다. 세간의 관심이 얼마만큼 자신에게 쏠려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실세인지를 알리는 꼴이 됐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인사 청탁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력서가 쌓이는 것”이라며 “그 자체(이력서가 쌓이는 것)가 뭔가 일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저 사람에게는 아무리 부탁해도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면 이력서가 쌓였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권력 사유화’ 논쟁 과정에 사퇴한 박영준 전 비서관이나 장다사로 정무1비서관은 둘 다 이 의원 보좌관 출신으로 이 의원과 가깝다. 청와대 인사 추천 실무자가 이상득 의원 보좌관 출신들로 채워진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 마당에 “아무도 소개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는 게 사실이다. 굳이 대통령에게 부탁하거나 소개하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실무자를 통해 (대통령에게) 올려 보낼 이력서가 얼마든지 있다는 점에서다.
모 광역자치단체장의 인사 실무를 담당했던 A씨는 “이력서는 인사권자 주변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올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력서를 누가 취합해 인사권자에게 보고하느냐다. 그 실무자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인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인사권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인사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 바로 인사 실무자를 통하는 것이다. 후보군을 압축하는 인사 실무자에게 자연 힘이 실리게 마련이다.
인사의 속성 때문이었을까. 박영준 전 비서관이 청와대에 근무하는 동안 구내식당에서는 종종 진풍경이 연출됐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얘기를 하려 해도 찾아와 인사하려는 사람이 줄을 서는 바람에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권력투쟁의 끝은?
한나라당 친이명박 진영 내부의 권력투쟁은 너무 일찍 찾아온 감이 없지 않다. 더욱이 대통령 친형을 겨냥한 잇따른 반란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역대 정권에서 대통령 친인척 문제는 성역과도 같았다. 잘못 건드릴 경우 ‘역린(逆鱗)’을 한 꼴이 돼 화를 입기 일쑤였다.
이명박 정부 들어 충신을 자처하는 정두언 의원이 대통령의 친형을 내쳐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을 두고, 실세들이 대통령과 이상득 의원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을 간파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선상반란’을 두 차례 제압하는 데는 대통령의 노력이 적지 않았다. 한나라당 모 초선 의원은 “대통령에 취임한 뒤 ‘형의 존재’가 차츰 부담이 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방치할 수야 없는 일 아니겠느냐”며 “결정적 하자가 발견되기 전까지 대통령은 형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비서관을 지낸 모 인사는 “대통령 친인척 문제를, 그것도 공개리에 제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잘 활용하면 언로가 틔어 약이 되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중지란이 일어나 자멸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또 다른 한나라당 초선 의원도 “권력 내부의 균형추가 무너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이상득, 이재오, 정두언 3대 공신 그룹이 공존했다면 적절히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뤘을 텐데, 뜻밖에 이재오 의원이 낙마하면서 3자 구도가 무너지고 1대 1 대립구도가 형성되면서 갈등 요인이 커진 것 같다”고 해석했다.
두 번의 ‘선상반란’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 진화함으로써 일단락됐지만, 앞으로 전혀 다른 상황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역대 정권을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대통령 친인척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기주자로 도약하기 위해 권력 확대를 꾀하려는 실세들의 도전을 이상득 의원이 막아내기 점점 어려울 것이란 얘기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핵심 비서관을 지낸 인사는 “이상득 의원이 꼭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대통령 형이라는 지위, 그 존재 자체로 공격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권력의 속성에 비춰볼 때, 친인척이 가장 만만한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전두환 정권 때 동생 전경환씨나 노태우 정권 때 처조카 박철언 전 의원, 김영삼 정권 때 아들 현철씨, 김대중 정권에서의 3홍씨 등 역대 정권 친인척 실세들이 대통령 재임 중은 물론 재임 이후에도 뒤끝이 좋지 못했던 게 반드시 위법행위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는 “누군가의 희생을 강제하려는 권력의 속성도 한몫했다”고 덧붙였다.
‘반격카드’ 준비하는 이상득
이상득 의원의 경우 대통령보다 손윗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손아랫사람에게는 대통령이 직접 불러 주의를 주기 쉽지만, 손윗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에서다.
두 차례 선상반란으로 코너에 몰린 이상득 의원 측은 제3의 반란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선상반란을 주도했던 인사와 관련된 X파일 루머가 나돌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나라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대선 때 동지적 관계에서 미담으로 나눈 얘기가 두 차례 권력투쟁을 거치며 ‘비수’로 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두언 의원 등 친이명박계 의원 부인들이 함께 운영한 미술관 관련 얘기도 X파일 루머 가운데 하나다.
대선 때 안국포럼이나 서울시청 출신의 경우 ‘선상반란’을 주도한 이재오 전의원과 정두언 의원 측은 물론 공격을 당한 이상득 의원 측과도 모두 잘 통하는 사이여서 정보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점도 X파일이 곧 터져 나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속 아는 놈이 더 무섭다’는 속담은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