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 지식인들은 조선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패권다툼에 지친 나머지 미국을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켜줄 구세주로 여겼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제시된 ‘연미국(聯美國)론’이 좋은 보기다. 일본의 조선반도 침략과 러시아의 극동진출을 막으려면 중국과 친교하면서 미국과의 연합을 시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 주요 논지다. 이는 숭미(崇美)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이후 미국은 열강의 다툼에서 자국의 실리만을 챙기는 기회주의적 불간섭정책을 폈다. 갑신정변, 영국의 거문도 점령,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미국은 그야말로 대국답지 않게 군사적·경제적 이해만을 쫓는 처세를 보였다. 중·일·러 사이에 끼인 한국의 입지를 살려주는 대국의 면모를 찾기 어려웠다.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조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지배를 용인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태평양의 전략적 요지 필리핀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미국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대국이 되었다는 사실은 국제정치의 역설적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을 가져온 38선 획정과 그 이후 소련과 공모한 신탁통치안(案)에서 다시금 미국은 한국을 배반했다. 미국은 대소-대중 봉쇄와 일본방어의 일환으로 1945년 한국에 주둔했을 뿐이었다. 한반도는 미국에 있어 동북아질서 유지를 위한 일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은 미국에게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먹기에는 보잘것없는 계륵(鷄肋)에 비유됐다. 동북아에서 중국, 일본, 소련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특이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애치슨선언이 한국전쟁의 원인(遠因)을 제공했지만 그 결과로서 한국과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다시금 재회했다. 작금 뜨거운 감자가 된 주한미군의 존재도 그 조약의 산물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 할까. 미국이 한국에 막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하는 등 두 나라는 전쟁 이후 한동안 밀월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때도 두 나라는 안으로는 반목했다.
지난 역사에서 한미관계가 비대칭적이었음은 여러 가지 사실(史實)로 입증된다. 한국으로서는 혜택을 입었는가 하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오늘의 한미갈등은 지난날의 불평등 경험이 현재화한 것이다. 근래에 비밀해제된 미국의 여러 정부문서를 보면 한미관계가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 휴전을 둘러싸고 이승만 정권과 미국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휴전을 반대하기 위해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북진통일을 외쳤던 이승만은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기로 작정한 미국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주고 미군을 한반도에 주둔시키는 ‘양보’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이 한국군에 북진명령을 내릴 경우에 대비해 ‘에버레디 계획(Everready Plan)’이라는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을 수립했다. 이 비상계획의 골자는 유사시 이승만을 제거하고 한국군부로 하여금 정권을 장악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미국은 반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부산정치파동’도 묵인할 정도로 이승만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전쟁을 끝내려는 자국의 입장에 반대하여 통일을 외치자 여차하면 갈아치워야 할 애물단지로 생각을 바꾼 것이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자 재빨리 이승만을 버리고 자신들의 통제 아래 있던 한국군부로 하여금 데모대에 적대하지 않도록 조처한 것은 미국이 이미 수립된 비상계획에 맞춰 자국의 국익을 추구한 기민한 움직임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과 끊임없는 갈등
박정희 정권 시기에도 한미갈등이 증폭됐었다. 5·16 군사쿠데타는 한국군 통수권(?)을 지닌 미국의 불개입을 통한 ‘적극적 방관’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장면 정권 시기 주한미사령관인 매그루더는 미국 의회증언을 통하여 “한국은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군의 극히 일부만이 가담한 쿠데타를 사실상 방관한 것은 당시 미국이 한국에 민주정부보다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더 잘 부합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쿠데타 이후의 정치일정을 둘러싸고 박정희는 미국과 심각한 마찰을 빚었다. 쿠데타 정권이 미국과 사전 상의 없이 단행한 화폐개혁이나 경제개발계획에 미국은 반대했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민정이양을 둘러싼 대립은 또 다른 사례다. 박정희가 미국과 협의하지 않고 군정연장을 선언했을 때 미국은 한국에 경제제재를 가했다. 박정희가 끝내 미국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그를 다른 지도자로 갈아치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당시 미국문서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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