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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청와대 습격사건 생포자 김신조 전격 증언

“北 도주자 1명은 2000년 송이 들고 서울 온 박재경 인민군 대장”

1·21 청와대 습격사건 생포자 김신조 전격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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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남파조는 5개조, 76명으로 구성됐었습니다. 1조는 청와대, 2조는 미 대사관, 3조는 육군본부, 4조는 서울교도소, 5조는 서빙고의 간첩수용소를 각각 목표로 삼았었지요. 그런데 상부의 지시에 따라 실제 남파공작원은 31명으로 축소됐던 거예요. (청와대 습격당시에) 남한 군과 경찰의 방비는 정말 허술하기 짝없었어요. 만일 당초 예정대로 5개조가 모두 내려왔다면 서울 시내는 쑥대밭이 됐을 겁니다.”

김씨는 열변을 토하면서 “당시 언론에 보도된 일부 내용은 사실과 상당히 달랐다”며 “군인과 경찰, 민간인 등 희생자는 일반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30명 전원이 사살됐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북으로 도주한 공비가 한 명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정도의 내용은 그리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당시 사건 관계자들의 직간접적인 증언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진 내용이다. 김씨의 자전에세이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에도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하지만 뒤이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내용은 기자의 귀를 의심케 했다.

“나를 좀 만나게 해주지”

“그때 도주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 사람이 바로 (몇 해 전)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 땅을 밟은 사람이에요. 참으로 어이없지 않습니까. 청와대를 치러 왔던 사람이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송이버섯까지 들고 버젓이 찾아왔으니…. 나를 좀 만나게 해주지, 왜 그냥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씨의 너스레에 장내에선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참석자 상당수가 뜻밖의 내용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30여년 전 남한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무장공비가 송이버섯을 들고 다시 서울을 왔다갔다니 쉽게 믿기지 않을 만도 했다.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2000년 9월11일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을 방문했던 북한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 박재경 대장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당시 박 부총국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용순 당 중앙위 대남담당비서 일행원 중 가장 주목을 받았다. 군사적 긴장완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던 시기인지라 그의 방문으로 남북한 군 당국자간에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조성태 국방장관의 정책보좌관 김종환 중장을 공항에 보내 영접하고, 조 장관과의 만남을 제의했다. 그러나 박 부총국장은 이를 거절하고 송이버섯만 우리측에 전달한 채 단 6시간 만에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씨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위원장은 1·21사건 책임자들을 숙청했다고 말한 것으로 압니다. 얼마 전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방북했을 때도 김 위원장은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숙청? 웃기는 이야기예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북한은 목숨을 걸고 작전을 수행하는 충성스런 군인을 쉽게 숙청하지 않아요.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씁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충성하겠어요. 그때 나를 지휘했던 사람들, 지금도 중요한 위치에 있어요. (북한 군부를 이끌어가는) 실력자들이죠.”

김씨는 강연이 끝난 후 사석에서 자리를 함께한 몇몇 참석자들에게 자신이 언급한 ‘송이 들고 서울을 방문한 사람’이 박재경 부총국장이라고 확인시켜준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시 살아서 북으로 도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함께 훈련받고 남파됐던 김씨보다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북한이라면 몰라도 남한에서는. 과연 김씨의 주장은 사실일까.

박재경은 민보성 정찰국 전력

국정원과 국내 북한관련 사이트의 북한인물정보에 따르면 박 부총국장은 1933년 6월10일 함북 출생으로 김일성 정치대학을 졸업했다. 총정치국 선전부 지도원, 부과장, 과장, 부부장 등을 거치며 선전부에서 잔뼈가 굵었다. 한 언론사 북한인물정보 사이트에 기록된 박 부총국장의 프로필이다.

“군부의 실세로 군내 선전선동사업의 총괄 책임자. 선전부 사업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 ‘음악정치’에 발맞춰 인민군협주단, 인민군공훈합창단 등을 조직하고 중대급 예술조소공연을 활성화시켜 김 위원장에 대한 찬양과 인민군 사기진작, 사상교양사업 등을 활발히 벌여 김 위원장으로부터 매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이종석 NSC 사무차장)에서 1998년부터 1999년 9월까지 북한 고위인사의 김정일 위원장 현지지도 등 공식행사 수행 횟수를 집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박 부총국장은 현철해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의 80회에 이어 73회로 두 번째로 많다. 1985년 2월 소장으로 진급한 이래 정상적으로 승진을 해오다 1993년 11월 중장, 같은 해 12월 당 중앙위 후보위원, 1994년 6월 상장으로 빠르게 진급하면서 그해 9월 부총국장이 됐고, 1997년 2월에 대장이 됐다. 차분한 성격으로 말이 없는 편이며 술은 어느 정도 하나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가족관계는 알려진 것이 없다.”

김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박 부총국장은 1968년, 김씨와 같은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이어야 맞다. 그런데 박 부총국장의 경력사항은 1985년 이후 기록뿐이어서, 정작 중요한 1968년 1·21사건 당시 어느 부서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른 곳의 인물정보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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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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