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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 칼로리에서 마르크스까지

당신의 서가에 꽂힌 책과 교양

양배추 칼로리에서 마르크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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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사를 연구해 ‘근대의 책읽기’를 펴낸 바 있는 저자가 근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문화 속에 스며든 ‘앎’의 의미를 파헤친다. 새 연재 ‘천정환의 문화오디세이’는 식민지 시대의 낯선 풍경과 유행처럼 스쳐 지나가는 오늘의 풍경 사이에 ‘의미의 다리’를 놓아줄 것이다(편집자).
양배추 칼로리에서 마르크스까지

조선시대 서당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여대생 최득주양은 집안이 어려워지자 학업을 중단하고 술집에서 접대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평소 최양의 사정을 동정하던 학교 강사 원모(30)씨가 술집 ‘My Dear’로 찾아왔다. 원씨가 그래도 학교는 졸업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걱정하자 최양은 다음과 같이 발끈했다.

“그까짓 교육 누가 받고 싶어는 한데요? 이젠 오라 해도 안 가요. 내겐 당치 않아요. 부잣집 딸년들 테니슨 시(詩)나 읽고, 캐베쓰 칼로리나 외구, 흥! 칼로리는 모르고 먹어도 난 맥주 맛이 좋더라.”

최양은 가난과 학업중단에 마음을 다쳤기 때문인지, 테니슨(A. Tennyson, 19세기 영국 시인) 시를 읽고 양배추 칼로리를 외게 하는 대학 교양교육이 ‘부잣집 딸년’들에게나 가당한 것이지, 자신의 처지에서는 사치라 생각하고 있다.

이태준이 1940년에 발표한 소설 ‘청춘무성’의 한 장면이다. 이 소설에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최득주는 오늘날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여전 문과(오늘날의 인문대)를 다니는 것으로 ‘설정’된 듯하다. 당시 이태준은 이화여전에 출강하고 있었고, 소설에서처럼 가르치던 여학생과 연분이 나 결혼까지 했다. 문과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최득주와 그녀의 친구들이 소설 속에서 영문학, 노문학, 한문학 지식을 주워섬기기 때문이다.

생활고 때문에 유흥가에 뛰어든 여대생 최득주의 경우는 마땅히 동정받을 만한 것이지만, 1940년 당시의 평균을 고려할 때 최득주는 매우 예외적인, ‘한 줌도 안 되는’ 존재였다. 일제시기 내내 한국 여성의 문맹률은 90%를 넘었고, 1936년을 기준으로 여자아이의 보통학교 진학률은 13%, 여고보 진학률은 2% 이하였다.



그래서 테니슨이나 칼로리라는 말을 알고, 나아가 그런 교양교육을 받는 것이 사치일 수도 있다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높은 교양이었다.

근대에 들어서 미혼여성들이 최초로 직업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자 까소링(gasoline)껄, 까페껄, 빠스(bus)껄, 웨트레스(waitress)껄, 데파트(department) 껄들이 나타났다. 이들 중에서 가장 학벌이 좋아야 했던 ‘껄(girl)’은 데파트껄이었다. 1935년 11월, 서울 종로에 있던 ‘화신백화점’에는 여자판매원 140여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중 여자상업학교를 빼면 이화여고 출신이 가장 많았고 동덕여고, 경성여고, 숙명여고, 배화여고 졸업생들이 그 뒤를 이었다. 영어도 구사할 줄 알았다던 이들 젊은 여성이 가진 ‘교양’의 상대적 수준은, 지금의 대졸을 훨씬 능가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일제시대 여성의 절대다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이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1937)를 보면 갓 여고를 졸업한 이들 백화점 판매직 여점원들이 서로의 ‘교양’에 대해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저 계집앤 영화라면 왜 저렇게 죽구 못 살까?”

“남 참견은! 이년아. 누가 너처럼 밤낮 고리타분하게 소설만 읽구 있더냐?”

“흥! 소설 읽는 취미를 갖는 건 버젓한 교양이란다!”

“헌데 좀 저급해! 읽는 소설이…… 그래두 추월색이나 유충렬전을 안 읽으니 그건 신통하다.”

“아무리 근대적 감각을 향락하기 위해서 그런다구 하더래두 계집아이가 영활 너무 보러 다니면 뒤통수에 불(不)자가 붙는 법이다. 응? 알았어? 불량소녀….”

요약하면 소설을 읽는 것은 좀 고리타분하지만 고상한 교양이고, 영화에 빠져드는 것은 세련됐지만 약간의 불량기를 감당해야 하는 취미라는 것이다. 저들 백화점 여점원들도 동시대 보통 여성들에 비하면 정말 많은 ‘교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끼리는 소설을 보느냐 영화를 보느냐, 그 중에서도 어떤 소설이나 영화를 보느냐 하는 문제로 고상함과 덜 고상함을 따진다. 과연 그러하다. 교양은 항상 상대적인 위치 감각, 곧 상-하, 고-저를 구분하여 값을 매기는 사회적 감각과 결부되어 있다. 교양은 각자 개인들이 개발하여 갖춰서(cultivating) 타인에게 내보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달라진 교양의 역사를 훑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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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hicnunc@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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