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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증하는 화학물질 중독사고

폐 뚫고 간 찢는 10만 흉기, 온 가족을 노린다

급증하는 화학물질 중독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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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활의 이기(利器)는 종종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로 돌변한다. 아스피린과 두통약, 세제, 살충제 등 일상적으로 쓰이는 화학제품 또한 그러하다. 한해 7만여명에 달하는 화학물질 중독환자가 병원을 찾는다. 전문가들은 “해마다 수천 가지 새로운 화학제품이 출시되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우려한다.
급증하는 화학물질 중독사고
생후 14개월 된 동민(가명)이가 폐렴에 걸리는 데는 1∼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지난해 가을 엄마가 전화를 받느라 잠시 시선을 뗀 사이, 동민이는 화장대 위에 놓인 아로마 향초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병 안에 든 보랏빛 기름이 동민이의 작은 입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순간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동민이를 보고 깜짝 놀란 엄마는 급히 동민이를 안고 집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동민이는 폐렴 판정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다. 아로마 향초병에 든 기름은 파라핀이었는데, 이 방향족 탄화수소가 폐로 흘러들어가 기관지를 파괴, 폐렴으로 악화된 것이다. 동민이는 일주일 동안 입원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표백제, 살충제, 수은까지 삼켜

아이를 키우다보면 별의별 사건을 다 겪게 된다는 것이 ‘선임(先任)’ 부모들의 충고다. 동전을 빨고, 의자에서 떨어지고, 공을 주우러 차도로 뛰어드는 철부지 때문에 부모의 간담이 타들어간다. 먼저 아이를 키워본 부모들은 “아이란 그러면서 크는 것”이라며 위로를 건넨다.

그러나 단순히 성장치레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위험한 어린이 안전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사고로 인한 어린이 사망률은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사고사망 어린이 수가 10만명 당 15명으로 스웨덴이나 영국보다 3∼4배 높은 수준.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도 줄곧 1위를 달리다 지난해에야 비로소 멕시코에 오명(汚名)을 넘겨줬다.



어린이 사고사망의 원인으로는 교통사고나 질식, 익사 사고가 가장 많이 꼽힌다. 그러나 화학물질에 의한 중독사고도 무시 못할 정도다. 파라핀을 마셔 폐렴에 걸린 동민이의 경우처럼 가정에서 사용하는 각종 화학제품에 의한 중독사고는 어린이들이 응급실을 찾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5세 미만 영유아가 의약품이나 가정용 화학제품에 노출되어 병원을 찾는 경우는 연평균 8300여건. 통계청은 화학제품에 의한 중독사고로 사망하는 5세 미만 영유아가 연평균 8∼9명에 달한다고 보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응급센터 임경수 응급실장은 지난 2003년 한 해 동안 응급센터를 찾은 어린이 응급환자의 사고원인을 분석했다. 총 3559명의 어린이 응급환자 중 57명이 화학물질에 중독된 경우였다. 이는 외상, 이물질, 화상 다음으로 많은 수치다. 어린이 중독환자들이 집어삼킨 화학물질은 다양했다. 감기약, 혈압약, 항우울제, 소독약, 무좀약 등의 의약품과 살충제, 다리미풀, 방부제, 세제, 접착제, 체온계 수은 등이 철부지들의 호기심에 포획됐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화학물질은 그 종류를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다. 각종 의약품을 비롯해 표백제, 합성세제, 모기약, 살충제, 체온계, 자동차 세정액, 샴푸와 린스, 접착제 등은 모두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제품. 화학물질의 종류 또한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화학물질이 10만여 종에 이르며 매년 1000∼2000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만들어진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대략 3만6000여종의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으며, 매년 300~500여종의 화학물질이 새로 생산되고 있다.

화학물질은 생활에 유용하고 편리한 물질이지만, 동시에 중독사고를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컵라면 용기나 음료수 캔 등에서 검출되는 환경호르몬이 장기적으로 인체에 해를 입힌다면, 가정용 화학제품은 즉각적인 중독을 일으킨다. 통계청은 연간 중독 사망자 수를 약 3400명으로 보고 있는데, 이중 화학물질에 의한 중독사고가 60%에 달한다(나머지는 식중독이나 동식물과의 접촉에 의한 중독 등).

응급처치가 생사 좌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02년 한 해 동안 7만여건의 화학물질 중독사고가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이중 80%가 자살 등 고의적 중독이고, 나머지 20%는 사고에 의한 중독이라고 본다. 한 해에 무려 1만4000여명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화학물질에 중독되는 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화학물질 중독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걸까.

사고로 인한 화학물질 중독은 특히 어린이들에게서 많이 발생한다. 세 살바기 재영(가명)이는 세탁용 세제인 락스를 한 모금 마셨다가 응급실 신세를 진 경우.

“아이가 콜라병을 들고 마시는 버릇이 있어요. 제가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사이에 누나와 화장실에서 놀다가 락스병을 들고 마신 모양이에요. 락스 색깔이 예뻐서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도 하죠. 독한 맛을 느끼고는 자지러지게 울어대서 119를 불렀어요. 병원에서는 아이가 며칠간 설사를 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날 이후로는 아예 화장실 문을 잠가두고 있습니다.”

별다른 탈을 겪지 않은 재영이와 달리 장기간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1월 경기도 오산에 사는 2세 여아가 간질치료제를 집어먹고 전신쇠약증과 눈이 돌아가는 증세를 보였다. 가솔린을 마신 두 살바기 민규(가명)는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다. 민규를 담당한 서울 목동이화여대병원 응급센터 어은경 교수의 말이다.

“주말에 가족과 야외에 놀러나갔다가 종이컵에 따라놓은 버너용 가솔린을 한 모금 마셨다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맛이 이상해서 곧바로 뱉어냈기 때문에 별 탈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밤새 아이가 보채고 기운 없이 축 늘어지니까 다음날 응급실로 데리고 왔죠. 가솔린이 폐로 넘어가 폐 점막에 모두 흡인된 상태였습니다. 산소 농도도 이미 많이 떨어져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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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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