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홍씨가 장보고의 유골과 유물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운주사 대웅전 뒤편 구릉.
운주사 경내에는 이른바 최고의 명당이라는 터가 전해지고 있다. 대웅전 뒤편에 있는 작은 구릉이다. 이 구릉 위쪽에는 두 기의 탑이 세워져 있는데, 그중 원반형으로 생긴 3층탑에는 아예 ‘명당탑’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범씨 설화
이 구릉은 남쪽을 향해 있는데다, 좌우 양쪽에 좌청룡 우백호에 해당하는 두 산줄기를 거느리고 있다. 또한 뒤편에 배산(背山)으로 천불산을, 앞쪽에 안산(案山)으로 범바위산(일봉암이라고도 함)을 두고 있어 풍수적으로 명당의 요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이 자리는 왕혈(王穴) 터, 또는 왕후지지(王侯之地)라 불렸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 왕이 나와 칠산바다(전남 영광군 앞에 있는 바다를 말하나 일반적으로 서·남해를 의미함)에 도읍을 정한다는 것이다. 설화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왕씨가 개성에 도읍하여 500년 해먹고, 다음에는 이씨가 한양에 도읍하여 500년 해먹고, 그 다음에는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하여 700년을 해먹는다… 그러나 이곳에 묘를 쓰면 범씨가 나와 칠산바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 왕조를 펴는데, 그때가 되면 주변 7개국이 조공을 바칠 만큼(또는 중국이나 일본의 기를 누를 만큼) 강력한 국가가 된다…
설화 내용 자체도 특이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터에는 범씨만이 묘를 쓸 수 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범씨는 흔히 볼 수 있는 성씨가 아니다. 다른 많은 성을 두고 왜 하필 범씨가 나온다고 했을까. 범씨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일반적으로 범씨 성의 한자는 范(풀이름 범)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범’자 중에는 帆도 있고 汎도 있다. 帆은 돛을 뜻하며 汎은 물 위에 뜨는 것을 의미하는 한자다. 그런데 칠산바다에 도읍을 정할 국가는 어떤 식으로든 해양국가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배(船)와 관련된 인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범씨 성을 사용한 게 아닐까.
또 다른 설화를 살펴보자. 이 터가 왕혈 터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외지 사람들이 밤중에 몰래 시신을 가져다가 묘를 쓰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해에 꼭 인근 마을에 불볕 가뭄이 들어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필시 누군가가 그 자리에 몰래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믿고 징이며 꽹과리 등을 들고 굿판을 벌이며 몰려가서는 묘를 다 파헤쳤다고 전해진다. 땅을 파헤쳐 보면 흔히 생석회가 두껍게 발라져 있고, 그 아래에서 육탈(肉脫)된 뼈들이 나오곤 했다는 것이다.
자연 지형이 아니다?
그렇게 찾아낸 뼈들을 버리지 않고 마을의 좌장 격인 어른이 한쪽에 치워두면 묘를 쓴 사람이 밤중에 몰래 와서 찾아갔다고 한다. 옛적 시골에서는 이런 일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몰매로 다스리곤 했는데, 그런 마찰을 피하기 위한 현명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파묘를 할 때는 꼭 부녀자들만 달려들었다는 점. 남정네들은 근처에 얼씬도 않고 여자들이 묘를 파헤치는 광경을 멀리서 구경만 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꽤 구체적으로 전해지는데다, 증언한 사람 자신이 육탈된 뼈들을 직접 봤다고 하니 비교적 사실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