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4년 중국에 대한 편견의 정점을 찍은 왕웨이친의 처형 장면. 이 사진 한 장으로 중국 형법제도의 역사, 유사 이래 전개된 혹형 비판의 전통은 ‘중국의 잔혹성’이란 이미지에 묻혀버렸다.
그러고 나서 죄수의 사지를 차례로 절단했는데, 처음에는 팔목과 발목, 그 다음으로 팔꿈치와 무릎, 마지막으로 어깨와 엉덩이 부분을 잘라냈다. 숙련된 회자수는 죄수의 신체 부위를 서른여섯 개 남짓으로 나누어버렸다. 회자수가 일을 마치고 나서 관리들에게 소리쳤다.
“시아르언르어(殺人了)!”
티모시 브룩이 ‘능지처참’(박소현 역, 너머북스, 2010)에서 소개한 왕웨이친(王維勤)이란 죄수의 처형 장면이다. 이 처형이 있은 지 몇 달 뒤인 1905년 4월 능지형은 청나라 법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능지
지난 호에서 공자가 자신의 아버지 묘소도 몰랐던 사람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경위를 알아보았다. 공자 부모가 정식 혼인이 아닌 야합(野合)에 의해 맺어졌다는 기록은 공자가 아버지 묘소를 몰랐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편에 나오는 간단한 문구에 대한 해석의 오류가 낳은 결과였다. 그것도 당시 가장 탁월했던 경학(經學)의 대가 정현(鄭玄)이란 학자의 오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오류의 가능성 앞에 좀 더 겸손할 수밖에 없다.
문구 해석의 오류가 역사의 왜곡을 초래하는 미시적 요인이라면, 이번 호에서 다룰 주제는 왜곡의 거시적 요인이다. 곧 어떤 역사적 사실에 앞서 사람들이 갖게 되는 편견, 선입관 때문에 생겨난 왜곡이다. 편견이나 선입관에는 문화적, 정치적 차이가 한몫을 한다. 중국의 형벌제도 중 하나인 능지형(凌遲刑)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서구 언론과 지식인들의 호들갑이 오늘의 주제다. 호들갑치고는 꽤나 강력했지만.
능지처참이니 참수니 하는 말, 사극(史劇)에서 들어보았으리라. “능지처참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집행된다고 생각하는 혹형(酷刑)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참수(斬首)는 목을 벤다는 뜻이다. 능지는 몸을 조각내는 형벌이다. ‘Death by a thousand cuts’ ‘천(千) 조각을 내어 죽임’, 이게 더 실감나려나 모르겠다. 이 끔찍한 말은 동양, 특히 조선이나 중국의 처형 장면과 동일시되며, 곧 전제왕정의 개념 또는 이미지의 일부를 형성한다.
사진과 헤테로토피아

고야의 ‘전쟁의 참화’.
호기심이 생겼을 것이다. 유럽 법령에서 사라진 혹형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 사진으로 나타났을 터이다. 그리고 휴대용 사진기에 찍힌 이 사진을 통해 베이징의 능지형은 문화적 기억으로 ‘영구보존(archiving)’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진이 없었다면 이 사진이 입증하고 있는 중국과 서양, 동양과 서양의 간극은 이듬해에 메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들로 인해 중국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이 정상적인 것처럼 벌어지는 공포와 혐오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이질적 세상)로 인식되었다.
선정적인 사진의 파급효과는 상상보다 심각했다. 사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편견을 유럽 대중의 의식 속에 불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국의 고문당한 육체가 주는 관능적 이미지가 다시 유포되기 시작했다. 중국인은 극한의 고통을 초래하는 기술을 완성했다는 ‘중국적 잔혹성’의 수사학(修辭學)이다. 수플리스 시누아(supplice Chinois·잔혹한 형벌). ‘중국의 형벌’이라는 관념. 뒤에 살펴보겠지만, 이 수사학은 식민주의의 합리화, 즉 이 야만을 멈추기 위해서는 우리 유럽인이 개입해야 한다, 서구 문명만이 이 폭력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사명감으로 진화했다.
#처형2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수레로 실려와, 공개적으로 사죄할 것.” 다음, “위 호송수레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된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에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 녹인 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버린다.”
1757년 3월 2일, 시종(侍從) 무관(武官)이 된 뒤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되어 반역죄로 극형을 받은 로베르 다미엥에 대한 판결이다. ‘암스테르담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분명히 이 사건은 판결문 그대로 집행됐다. 부통이라는 치안관의 목격담은 한층 상세하고 끔찍해서 차마 다 옮길 수 없지만, 사실 전달을 위해 확 줄여 조금만 소개한다.
“유황을 태웠으나 그 불길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죄수 손등의 피부만 약간 상하게 했을 뿐이다. 그 다음에는 소매를 팔뚝 위까지 걷어 올린 사형집행인이 45㎝ 정도의 불에 달군 특제 쇠집게를 집어 들고, 먼저 오른쪽 다리의 장딴지를, 다음에 넓적다리를, 오른팔의 근육 두 군데를, 다음에는 가슴을 찢었다. 집행인이 아무리 체력이 강하고 억센 사람이라 하더라도 쇠집게로 집고 있는 곳의 살을 같은 방향으로 두세 번 비틀어가면서 잘라내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그리고 잘라낸 부분에는 각각 6리브르 화폐 크기만한 흉측한 구멍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