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형
푸코는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감시와 처벌’(오생근 역, 나남, 2003)에서 고통의 극대화를 위해 세밀하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중세 형벌제도를 고찰했다. 다미엥의 처형은 여느 능지형을 훨씬 능가하는 잔혹성을 보여준다. 이는 신체 자체를 형벌의 대상으로 삼는 형벌제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두 가지를 짚어보자. 첫째, 서유럽도 그렇게 형벌이 잔혹했으니까 오십보백보일 뿐 중국 형벌을 두고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중국 형벌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던 유럽인의 편견이 갖는 한계를 보여주는 증거의 하나는 된다. 또한 혹형에 대한 문화적, 미학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서 행했던 살해, 혹형과 고문의 실상을 고려하면 왕웨이친의 처형을 두고 유럽인의 반응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유럽 군대는 의화단을 진압하면서, 진압이 아니라 거의 ‘학살’했다. 나폴레옹 군대는 스페인의 애국자들을 능지형과 유사한 방식으로 처형했는데, 이는 프란치스코 고야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면, 서유럽에서 혹형이 사라진 것은 중국보다 100년 정도 앞선다. 문제는 시기가 아니다. 시기를 놓고 논의하다보면, 중국보다 유럽이 먼저 개명(開明)했다느니, 그게 그거라느니 하는 선형적(線型的) 논란에 빠진다. 마치 한 줄 위를 가는 것처럼 한 사회가 지나간 길을 다른 사회가 지나간다고 보는 단순한 사유로는 사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조차 이런 사유 습관에 젖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이런 인식 태도는 역사학과 거리가 멀다. 역사학의 출발은 먼저 왜 A사회와 B사회가 다른가, 그다음은 왜 A사회는 C사회로 갔는데 B사회는 C사회로 가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단선적·단계적 발전? 그런 거 없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처형 장면 중. 절차에 따라 고통을 더해가는 형벌을 집행하는 과정에 성직자는 끊임없이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설득한다. 고증이 잘된 장면이다. 중세 유럽의 처형은 죄수와 집행자, 성직자가 벌이는 하나의 의식(儀式)이자 연극이었다. 이와 비교하면 중국의 처형은 무미건조한 집행 이상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의 처형을 목격한 유럽인들은 미학적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 미학적 거부감이 문명의 담지자라는 유럽의 자의식과 결합하면서 중국의 야만성에 대한 경멸로 이어진다.
신체
원래 인간의 몸은 형벌의 마당이다. 신체를 대상으로 금고, 징역, 유배, 거주제한 등이 벌어진다. 근대의 이런 형벌도 ‘신체에 대한 형벌’이다. 그러나 근대 형벌제도에서 징벌과 신체의 관련이 과거의 신체형과 동일하지 않다. 중세 유럽이나 동아시아 왕조국가에서 형벌은 신체 자체에 가해졌다.
근대 형벌제도에서 신체는 ‘도구 또는 매개체’와 같은 것이 된다. 즉, 신체를 감금한다든지, 혹은 노동을 시킨다든지 해서 신체에 제재를 가하지만, 그 목적은 개인에게서 권리인 동시에 재산으로 생각되는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것이다. 이 형벌제도에 의하면 신체는 구속과 박탈의 체계, 의무와 제한의 체계 속에서 취급된다. 육체적 고통, 신체 자체의 괴로움은 이미 형벌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징벌은 견딜 수 없는 감각의 고통을 다루는 기술의 단계에서 그 모든 권리 행사를 정지시키는 경제의 단계로 이행해버린 셈이다. 푸코의 이러한 지적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신체 자체에 대한 행형(行刑)에서 신체 권리 박탈이라는 행형으로의 변화가 고상한 인도주의(Humanism)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국가 형벌 권력의 효율적 작동을 위한 재편이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18, 19세기 형벌제도 개혁자들은 신체형이 민중을 위협하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었다.
신체는 세균 전파라든지 수명 같은 생물학적 생존의 토대나 사건의 대상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권력은 신체가 직접적으로 정치의 영역 속에 들어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직접적 영향력을 가했다. 생산하는 신체인 동시에, 복종하는 신체. 푸코는 신체형이 되기 위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첫째, 형벌은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평가하고, 비교하고, 등급을 정할 수 있는, 어떤 분량의 고통을 만들어내야 한다. 둘째, 고통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규칙이 수반되어야 한다. 세칙(細則)에 따라 계산되어야 한다. 셋째, 신체형은 일종의 의식(儀式)을 구성한다. 목을 베어 매다는 효시(梟示)를 생각하면 된다.
이런 점에서 중세의 신체형은 잔인하지만 야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유, 절차와 과정, 양형(量刑), 효과 등이 치밀하게 계산된 문명적 행위다. 그러므로 중세의 신체형을 야만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적 잔혹성’의 경우처럼 아직 다른 차원의 형벌이 온존하는 세계를 ‘야만’으로 규정하려는 ‘문명세계’의 계략이다. ‘문명’이 ‘문명’을 대신한다고 하면 명분이 서겠는가? ‘문명’이 ‘야만’을 척결해야 한다고 해야 침략과 폭력이 정당화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자신들의 폭력은 다시 피지배자들의 야만성을 통해 합리화된다. 저 야만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폭력과 혹형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고문
신체형에 대한 통찰에도, 역시 푸코가 관찰한 서유럽과 중국은 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통 자체에 대한 인식의 차이다. 고통의 문제는 고문과 처형을 나누어 살펴보아야 될 듯하다. 현행법상 고문은 한국의 사법체계에서 불법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세법에서 고문은 합법이었다. 이를 형신(刑訊)이라고 했다. 조선의 형신에는 죄에 따라 말로 하는 평문(平問)과, 신체에 고통을 주는 곤장, 압슬(壓膝), 낙형(烙刑)이 있다. 고문은 엄연한 사법적 행위다(현대의 고문은 불법이기 때문에 기준도 없고 따라서 훨씬 무자비하다. 미국 관타나모 기지의 고문을 떠올리면 된다).
중세법에는 죄를 입증할만한 모든 증거가 수집된 뒤에 유죄성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즉 피의자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이 아니라, 범죄자로 인지되는 개별적인 증거 요소가 있을 때마다 단계적으로 하나씩 유죄성이 구성되었다. 예를 들면, 절반쯤 완전한 증거가 하나 있을 경우, 그것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용의자가 무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절반 유죄인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반역 사건 고변에 언급되면 언급된 만큼 죄가 있는 것이다. 중대한 범죄일수록 경미한 증거라 하더라도 당사자는 ‘어느 정도’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